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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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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게미쓰 마모루는 1887년 오이타현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외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주중화민국 공사, 주소련 대사, 주영국 대사 등을 역임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당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부상을 입어 의족을 착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외무대신과 대동아장관을 역임했고, 1945년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되었으며, 이후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과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지냈다. 그는 반둥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 무대에 복귀했고, 일소공동선언을 통해 소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했다. 1957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시게미쓰는 전후 일본의 국제 사회 복귀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범으로 기소된 점과 대동아공영권 추진에 관여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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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마모루
기본 정보
이름시게미쓰 마모루
원어 이름重光 葵
로마자 표기Shigemitsu Mamoru
출생일1887년 7월 29일
출생지일본 제국 오이타현 분고오노시
사망일1957년 1월 26일
사망지일본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정
학력도쿄제국대학 졸업
정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개진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훈장[[File:JPN Toka-sho BAR.svg|38px]]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부총리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부총리 임기 시작1954년 12월 10일
부총리 임기 종료1956년 12월 23일
외무대신도조 히데키 내각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외무대신 임기 시작1943년 4월 20일, 1945년 8월 17일, 1954년 12월 10일
외무대신 임기 종료1945년 4월 7일, 1945년 9월 15일, 1956년 12월 23일
대동아대신고이소 구니아키 내각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
대동아대신 임기 시작1944년 7월 22일, 1945년 8월 17일
대동아대신 임기 종료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25일
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2구
중의원 의원 당선 횟수3회
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1952년 10월 2일
중의원 의원 임기 종료1957년 1월 26일
귀족원 의원 임기 시작1945년 8월 15일
귀족원 의원 임기 종료1945년 8월 29일

2. 생애

1887년 7월 29일 오이타현(오늘날의 분고오노시)에서 태어난 시게미쓰 마모루는 1911년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4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영국, 미국 등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1930년 주중화민국 공사가 되었다.

만주사변 당시 시게미쓰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움직임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우려를 해소하려 노력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에는 유럽 국가들이 일본군과 중화민국군 간의 정전 중재에 나서도록 힘썼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쇼와 천황 탄생 기념 천장절 행사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착용하게 되었다.

1938년 하산호 전투 이후 시게미쓰는 주소련 대사로서 협상을 맡았고, 이후 주영국 대사를 지내다가 1941년 6월 소환되었다. 같은 해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왕징웨이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사로 임명되었다.

항복 문서에 조인하기 위해 USS 미주리에 오른 시게미쓰 (왼쪽)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 4월 20일, 도조 히데키는 시게미쓰를 외무대신에 임명했다. 1944년 7월부터는 대동아장관을 겸임했다. 1945년 일본 제국 항복 선언 직후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9월 2일 일본 제국의 전권 대사로서 우메즈 요시지로와 함께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50년 11월 21일 가석방되었다.

이후 개진당(改進党) 총재가 되어 1952년 10월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일본민주당 부총재를 거쳐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 4월 반둥 회의에서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이는 국제연맹 탈퇴 이후 일본의 첫 국제 회의 참가였다. 같은 해 8월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41] 1956년 7월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 쿠릴 열도 분쟁 해결, 국제연합 가입 등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일본은 일소공동선언 등을 거쳐 1956년 12월 18일 국제연합에 8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57년 1월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정의 별장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42]

2. 1. 초기 생애 및 외교 경력

시게미쓰 마모루는 191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외무성에 들어갔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과 영국을 포함한 여러 해외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잠시 영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시게미쓰는 오이타현 오오노군 미에정(현재의 분고오노시)에서 오오노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시게미츠 나오가타와 어머니 마츠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친가에 아이가 없어 양자로 들어가 시게미츠가 26대 당주가 되었다. 오이타현립 기쓰키고등학교, 제5고등학교 독법과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현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법학부)을 졸업했다.

1911년(메이지 44년) 9월,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하여 외무성에 입성, 독일 주재 외교관보, 영국 대사관 3등 서기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영사, 파리 강화 회의 일본 전권단원, 조약국 제1과장, 중화민국 공사관 1등 서기관, 독일 대사관 참사관,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14], 1930년(쇼와 5년) 주중(駐華) 공사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시게미쓰는 외교적 협조 노선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구미 각국의 협력 아래 중화민국과의 휴전 협상을 진행했다.

2. 2.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시게미쓰는 여러 유럽 수도에서 활동하며 만주에서의 일본군 활동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려고 노력했다.[1]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시게미쓰는 서구 열강의 도움을 얻어 국민당군과 일본 제국 육군 간의 휴전을 중재하는 데 성공했다.[2] 그러나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천장절) 축하 행사에서 한국 독립 운동가인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했다.[2] 이 사건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장군 등이 사망하고,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2] 시게미쓰는 격통 속에서도 "휴전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국가의 장래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것이다"[15]라고 말하며, 5월 5일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 직전에 상하이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이후 여생 동안 의족과 지팡이를 사용해야 했다.[2]

2. 3.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1938년 장고봉 전투(하산호 전투)에서 소련과의 국경 충돌을 해결하는 협상을 맡았다. 악화되는 영국-일본 관계 속에서 일본의 영국 대사를 역임했는데, 특히 1939년 천진 사건은 일본을 영국과의 전쟁 직전까지 몰아넣었다.[2] 일·독·이 협정을 비롯한 마쓰오카 요스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미국 내 반일 감정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워싱턴 D.C.에서 주미 일본 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와 협의하여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간의 직접 회담을 주선하려 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화민국 재편 정부(왕징웨이 정권) 대사로 임명되었다. 중국에서 시게미쓰는 대동아 공영권의 성공은 일본에 의한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평등한 대우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3]

1943년 도조 히데키는 외무대신 다니 마사유키를 시게미쓰로 교체했다. 시게미쓰는 대동아 회의 기간 동안 외무대신이었다.[4] 1944년부터 1945년까지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에서 외무대신과 대동아성 장관을 겸임했다.[6]

1945년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친왕 내각에서 잠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후, 민간 전권 대표로서 우메즈 요시지로 장군과 함께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함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18] 시게미쓰는 이를 "불명예의 종착점이 아니라 재생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2. 4. 전범 재판과 전후 정치 활동

시게미쓰 마모루는 전쟁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압력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7] 전 미국 주일대사 조지프 그루의 진술서와 수석 검사 조셉 B. 키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7] 시게미쓰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침략전쟁 수행 및 전쟁포로 학대 방지 실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소는 시게미쓰가 일본 군국주의에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전쟁포로 학대에 항의한 점을 들어 7년형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선고했다.

수감 중인 시게미쓰 마모루


1946년 4월 13일 소련 대표 검사 세르게이 A. 골룬스키는 시게미쓰가 동조 내각소이소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한 것을 이유로 A급 전범으로 기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GHQ와 미국 측 검찰단은 반대했지만,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판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소련 측의 압박에 굴복하여 맥아더도 요구를 수용했다. 4월 29일 기소 당일 체포되어, 1948년 11월 12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19]

타카야나기 켄조, 조지 퍼니스 변호사의 노력으로 형량은 A급 전범 중 가장 가벼웠지만, 당시 유럽과 미국의 언론은 시게미쓰의 무죄를 예상했기에 유죄 판결은 소련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치적 타협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스가모 프리즌 헌병 블룸 대위는 판결에 분노했고, 헌병 대장 켄워지 중령은 판결이 뒤집힐 것이라고 말했다. 수석 검사 키넌은 시게미쓰가 평화주의자이며 무죄가 당연하다고 판결을 비판했다.[19]

1950년 11월 21일, 4년 7개월 복역 후 가석방되었다.[20]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발효 후, 일본 정부와 극동국제군사재판 참가국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사면되어 형 집행이 종료되었다.

일본 점령 종료 후, 시게미쓰는 개진당을 결성, 일본민주당과 합당 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년 일본민주당 당수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 밑에서 부총리를 역임했다. 1955년 자유민주당(LDP) 결성 후에도 부총리직을 유지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외무대신을 겸임하며, 1955년 반둥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국제 외교 무대 복귀를 알렸다.[8] 같은 해 미국을 방문,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을 압박했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일본의 능력 부족을 이유로 시기상조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9]

1956년 유엔 총회에서 일본의 UN 가입 신청을 약속, 1956년 12월 18일 UN의 80번째 회원국이 되었다.[10] 같은 해 모스크바를 방문, 외교 관계 정상화와 쿠릴 열도 분쟁 해결을 시도,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2. 5. 사망

重光 葵|시게미쓰 마모루일본어는 1957년 1월, 소비에트 연방 방문 1년 후, 가나가와 현 유가와라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69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11]

3. 평가와 논란

시게미쓰 마모루는 일본의 외교관으로서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긍정적으로는 전후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에 기여하고, 뛰어난 외교 전문성과 국제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5년 반둥 회의와 국제연합 가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을 이끌어 모스크바와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8][10]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재판부가 일본 군국주의에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전쟁 포로 학대에 항의한 점을 참작한 결과였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략 전쟁 수행, 대동아 회의 주도, 대동아 공영권 추진, 전쟁 포로 학대 방지 실패, 일본 제국주의 정책 옹호 등의 비판이 제기된다.[4][3]

1932년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으로 중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 직전, 상하이 휴전 협정에 서명하였다.[15] 1945년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GHQ의 군정에 대하여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독일은 정부가 붕괴되었지만 일본에는 정부가 존재한다"라고 항의하며 포고의 즉각 철회를 요구하여, 점령 정책은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가 되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소련의 개입과 미국의 입장 변화는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19] 시게미쓰는 1950년 가석방되었고,[20]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후 사면되었다.

3. 1. 긍정적 평가

시게미쓰 마모루는 전후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에 크게 기여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1955년 반둥 회의(Bandung Conference)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이후 국제 회의에 일본이 복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 또한, 유엔총회(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에서 일본의 국제연합(United Nations) 가입을 위한 연설을 했으며, 1956년 일본이 유엔의 80번째 회원국이 되는 데 기여했다.[10]

시게미쓰는 뛰어난 외교 전문성과 국제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Soviet–Japanese Joint Declaration of 1956)을 이끌어 모스크바(Moscow)와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고, 쿠릴 열도 분쟁(Kuril Islands dispute) 해결을 시도하는 등 어려운 외교 문제 해결에 힘썼다.

3. 2. 부정적 평가

시게미쓰 마모루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다.[7] 재판부는 시게미쓰가 일본 군국주의에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전쟁 포로 학대에 항의한 점을 참작하여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게미쓰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이 제기된다.

  • 침략 전쟁 수행: 시게미쓰는 외무대신과 대동아성 장관을 역임하며 일본의 침략 전쟁 수행에 관여했다. 특히 대동아 회의(Greater East Asia Conference)를 주도하며 대동아 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추진에 앞장섰다.[4]
  • 전쟁 포로 학대 방지 실패: 시게미쓰는 전쟁 포로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를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일본 제국주의 정책 옹호: 시게미쓰는 대동아 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의 성공이 일본에 의한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평등한 대우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지만,[3]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3. 3. 논란



시게미쓰 마모루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재판 초기,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는 시게미쓰를 기소할 의사가 없었고, 미국 검찰단도 반대했다. 그러나 소련 대표 검사 세르게이 A. 골룬스키는 시게미쓰가 도조 내각과 소이소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기소를 강력히 요구했다.[19] 당시 미국 민주당 정권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판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소련의 압력에 굴복했고, 더글러스 맥아더도 이를 수용했다.

결국 시게미쓰는 1948년 11월 12일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A급 전범 중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지만, 당시 유럽과 미국의 언론은 시게미쓰의 무죄를 예상했기에, 유죄 판결은 소련을 만족시키기 위한 GHQ의 정치적 타협이라는 평가가 많았다.[19] 스가모 프리즌 헌병 대위는 "놀랐다. 당신의 무죄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곳이다"라며 분노했고,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얼마나 어리석은 판결인가. 시게미쓰는 평화주의자다. 무죄가 당연하다"라며 판결을 비판했다.[19]

시게미쓰는 4년 7개월 복역 후 1950년 11월 21일 가석방되었다.[20] 1952년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발효 후, 일본 정부와 극동국제군사재판 참가국 정부 간 합의에 따라 사면되어 형 집행이 종료되었다.

시게미쓰 판결은 재판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소련의 개입과 미국의 입장 변화는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게미쓰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전쟁 포로의 인도적 대우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죄 판결은 더욱 논란의 여지가 있다.

4. 유산

시게미쓰 마모루는 격동의 쇼와 시대에 일본 외교의 중심에서 활동한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지위를 회복하고 전후 일본의 외교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국제연합 가입 실현은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4][25]

시게미쓰는 《쇼와의 동란》, 《외교 회상록》, 《스가모 일기》 등을 저술하여 당시 시대 상황과 자신의 외교 철학을 기록했다. 이러한 저서와 관련 연구는 그의 외교적, 정치적 유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시게미쓰의 생가 저택인 무적암(無迹庵)에는 그의 유품 일부가 전시되어 있어,[26]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5. 기타

시게미쓰를 아는 사람들은 “결점이 없는 것이 결점이다”라고 그를 평하는 경우가 많았다.[27] 시게미쓰는 제1차 상하이 사변 종결 후 천장절 식전에서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오른쪽 다리를 잃고,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무게 10kg의 의족을 착용하게 되었다.[27] 100km나 떨어진 곳을 가는 등 의족을 착용한 상태에서의 보행은 매우 어려웠지만, 그는 그 사실을 신경 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훗날 미주리호 함상에서 시게미쓰를 들어 올리기 위해 애쓰는 미군 수병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시게미쓰는 전혀 겁먹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다만, 지팡이를 떨어뜨리는 등 서명에 상당히 시간이 걸려 이를 “보기 흉한 지연”이라고 함부로 해석한 핼시에게 호통을 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전후, 진주군이 아쓰기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시게미쓰는 외상 겸 대동아상(도쿠니노미야 야스히코 왕 내각)으로서 요코하마시에 “영미군을 절대 수도에 들여서는 안 되고, 직접 군정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군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28]

스가모 프리즌에 수감되어 있을 무렵, 장애인이면서 사회복지사업가로 활동하던 헬렌 켈러의 두 번째 방일 뉴스를 접했을 때, 옛 장교들이 “저 여자는 맹인인 것을 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는 거다”라고 비난하자, 시게미쓰는 “그들이야말로 애처로운 마음의 맹인이다. 어찌 그런 폭언을 하는가. 일본인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라며 옛 장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들의 편협한 견해를 개탄했다.[29]

고노에 후미마로와는 친분이 있었지만, 패전 후 고노에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천황과 군부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언행을 계속하자, “전쟁 책임 용의자들의 태도는 모두 추악하다. 고노에 공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라고 말하며 고노에를 특히 엄하게 비판했다.

전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외상·부총리를 역임했을 때, 하토야마가 “관료 정치가가 아닌, 당인 정치가에 의한 정권 운영을 하고 싶다”라고 무심코 발언했기 때문에 외교관 출신인 시게미쓰는 하토야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하토야마가 일소 국교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던 데 대해, 시게미쓰는 대소 강경론자였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Postwar Japan https://books.google[...] Rowman and Littlefield
[2] 뉴스 Jap Officers Hurt By Bomb Explosion http://www.ussmissou[...] 1932-04-29
[3] 서적 The Rising Sun Random House
[4] 뉴스 Jap Cabinet is Shaken Up 1943-04-21
[5] 간행물 Mamoru Shigemitsu
[6] 서적 Japan and Her Destiny: My Struggle for Peace https://archive.org/[...] E.P. Dutton & Co.
[7] 서적 Defending the Enemy Bascom Hill Books
[8]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9]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0] 방송 Sonotoki transmission 305 NHK 2007-11-14
[11] 뉴스 Mamoru Shigemitsu, 69, Dead; Surrendered for Japan to Allies; Former Foreign Minister Was Imprisoned for War Crime – Led Nation Into U.N. Made Peace Overtures Entered Foreign Ministry Tried With Tojo https://www.nytimes.[...] 2020-08-15
[12] 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3] 간행물 創 創出版 1977-01
[14] 웹사이트 https://ndlsearch.nd[...]
[15] 서적 隻脚公使
[16] 서적 昭和の動乱
[17] 뉴스 駐華大使に重光葵を起用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40-12-20
[18] 서적 占領期
[19] 잡지 鬼検事キーナン行状記 1950-10
[20] Youtube 蘇る昭和の記録 昭和天皇とその時代 第二巻 https://www.youtube.[...] NPO法人科学映像館
[21] 뉴스 重光元外相仮出所 きのう四年半ぶりに 1951-11-22
[22]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23]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24] 웹사이트 外務省>報道・広報>演説 国際連合第十一総会における重光外務大臣の演説 https://www.mofa.go.[...]
[25] 웹사이트 外務省>報道・広報>演説 国際連合第十一総会における重光外務大臣の演説の英語版 https://www.mofa.go.[...]
[26] 웹사이트 重光家 https://www.city.kit[...] 2020-02-13
[27] 뉴스 今では岸田首相が3日間泊まっただけで大批判…戦後の政治家が"郊外の避暑地"に滞在していた驚くべき日数 https://president.jp[...] 2024-03-09
[28] 기타
[29] 잡지 巣鴨日記 1952-08
[30] 법원자료 法廷証第123号: [重光葵關スル人事局履歴書]
[31] 관보 官報 1940-02-05
[32] 관보 官報 1943-06-09
[33] 관보 官報 1920-09-08
[34] 관보 官報 1941-10-23
[35] 관보 官報 1941-09-16
[36] 간행물 官報 (출판사 정보 없음) 1938-08-06
[37] 간행물 官報 (출판사 정보 없음) 1936-07-22
[38] 간행물 官報 (출판사 정보 없음) 1943-06-05
[39] 간행물 官報 (출판사 정보 없음) 1943-08-02
[40]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Postwar Japan Rowman and Littlefield
[41]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arvard University Press
[42] 뉴스 Mamoru Shigemitsu, 69, Dead; Surrendered for Japan to Allies; Former Foreign Minister Was Imprisoned for War Crime --Led Nation Into U.N. Made Peace Overtures Entered Foreign Ministry Tried With Tojo The New York Times 1957-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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