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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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인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1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으며,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며 1950년대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귀국하여 방송 활동을 이어갔으나, 당뇨 합병증으로 2002년에 사망했다. 그는 해방 이후 앨범을 발표한 최초의 가수로 '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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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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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현동주 |
출생지 | 부산광역시 영도구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학력 | 일본 도쿄 음악학교 전문학사 |
배우자 | 김미정(재혼), 조창길(前), 박정혜(前) |
가족 | 아버지 현명근, 어머니 오봉식의 슬하 2남 1녀 중 장남 자녀는 슬하 1남 3녀 |
직업 | 가수 영화배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하사 |
종교 | 개신교(장로회) |
활동 시기 | 1947년 ~ 1999년 |
장르 | 트로트 |
2. 생애
1919년 12월 14일 부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공연을 보고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시절 음악과 운동에 재능을 보였으며, 1938년 도쿄 음악학교에 진학하여 성악을 공부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39년에는 '''後藤 仁|고토 진jpn'''으로 창씨개명하였고, 이는 훗날 예명 '''현인'''(玄仁)의 기반이 되었다.
1942년 귀국 후 악극단 활동을 시작하여 1943년에는 중국 톈진, 베이징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미군 위문 공연 등을 통해 재기를 모색했다. 1947년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49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 '푸른 언덕'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베사메 무쵸', '꿈속의 사랑', '장미빛 인생' 등 번안곡과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 창작곡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195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대중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노래는 한국 전쟁 등으로 고단했던 시기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전쟁 시기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군 위문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전쟁 후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갔으나, 1957년 이혼과 1959년 쇼단 파산 등 개인적인 시련을 겪었다. 결국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으나 사업 부진으로 1981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가요무대》 등 방송에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으나, 1999년 지병인 당뇨 악화로 활동을 중단했다. 2002년 4월 13일 당뇨 합병증으로 8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해방 이후 최초로 정식 앨범을 내고 데뷔한 가수로서 '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불린다.
2. 1. 유년 시절과 음악과의 만남 (1919년 ~ 1937년)
현인은 1919년 12월 14일, 부산에서 아버지 현명근과 어머니 오봉식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남도 양산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 댁이 있는 동래를 오가며 자랐다.이후 석유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가 일본 마이니치 신문 도쿄 지사의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현인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유명 러시아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독창회를 관람하며 처음으로 성악과 클래식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현인이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1931년에는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창 시절 현인은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음악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33년에는 학교 배구 대표 선수로 활동할 만큼 운동 신경도 뛰어났다. 방과 후에는 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즐겨 불렀다. 하지만 이 시기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2. 2. 경성 유학과 음악적 성장 (1931년 ~ 1937년)
1931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창 시절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1933년에는 학교 배구 대표 선수로 활동할 만큼 운동 실력도 뛰어났다. 방과 후에는 밴드부에서 트럼펫으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즐겨 불렀다. 이 시기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며,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2. 3. 도쿄 음악학교 수학과 시련 (1938년 ~ 1942년)
1938년 일본 육사 진학을 위해 도쿄로 갔으나, 진로를 바꾸어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도쿄 음악학교는 일본 유일의 관립 음악학교로, 음악 엘리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현인이 음악학교에 진학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겨 학비 지원을 중단했고, 현인은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1년 뒤인 1939년, NHK 합창단 모집 공고를 보고 오디션에 응시하여 합격,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後藤 仁|고토 진jpn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玄仁)은 이때 사용한 성 '고토'(後藤)를 '현'(玄)으로 바꾼 것이다. 유학 시절 왕족 출신인 마리코와 교제하기도 했으나, 귀국 후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했다.
1942년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 4. 귀국과 악극단 활동 (1942년 ~ 1945년)
1942년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하였다. 1943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악극단을 구성하여 중국 톈진으로 건너가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랐으며, 베이징, 항저우 등지를 돌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뒤, 베이징의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풀려나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2. 5. 해방과 시련, 그리고 재기 (1945년 ~ 1950년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가족들에게 외면당했다.홀로서기를 결심한 현인은 수입이 좋았던 미군 부대 위문 공연에 참여하며 탱고 전문 악단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했다. 1947년, 29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 서며 밤무대에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같은 해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유호가 만든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의 인기에 힘입어 현인은 1949년 해방 이후 제작된 첫 음악 영화 ''푸른 언덕''의 주연으로 발탁되었고, 영화 주제가도 직접 불렀다. 이 시기 현인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 같은 외국 곡들을 번안하여 부르면서 트로트 중심의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신선함을 더했다. 1952년에는 프랑스의 유명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번안하여 소개하며 대한민국에 샹송 유행을 이끌기도 했다.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현인은 이후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195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중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며, 암울했던 시대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랬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대 초반, 특히 한국 전쟁 시기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50년 4월 1일에는 동아 극장에서 열린 은방울악극단의 '은방울쇼'에 당대 스타들과 함께 출연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군부대 위문 공연에 주력했으며, 1951년 3월 30일에는 부민관에서 열린 '손목인과 그 악단' 공연에 특별 출연했다. 같은 해 4월 24일에는 동아 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결성하여 ''멍기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랐고, 1952년 6월 1일에는 신청년극단이 제작한 가극 ''성웅 이순신''에도 출연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로 돌아온 현인은 박시춘이 이끄는 은방울쇼단에 합류하며 다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57년 두 번째 아내 박정혜와 이혼했으며, 1959년에는 직접 운영하던 봉봉쇼단이 재정난으로 6개월 만에 해체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2. 6. 전성기와 좌절 (1950년대 ~ 1974년)
1947년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이 크게 히트하면서 현인은 대중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인기에 힘입어 1949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기 현인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 같은 외국 곡들을 번안하여 불렀는데, 이는 당시 트로트가 주류였던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52년에는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번안해 부르며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현인은 이후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195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노래는 전쟁과 분단으로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반영하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마음을 위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면서 현인 역시 부산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날짜 | 내용 | 장소 | 비고 |
---|---|---|---|
1950년 4월 1일 | 은방울악극단 은방울쇼 출연 | 동아 극장 | 한국 전쟁 발발 이전 부산 활동 |
1950년 ~ 1953년 | 군부대 위문 공연 | 전국 각지 | 전쟁 기간 중 지속 |
1951년 3월 30일 | 손목인과 그 악단 공연 특별 출연 | 부민관 | |
1951년 4월 24일 | 현인과 그 악단 결성, 멍기의 노래 공연 | 동아 극장 | |
1952년 6월 1일 | 신청년극단 가극 성웅 이순신 출연 |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현인은 박시춘이 이끄는 은방울쇼단에 합류하며 다시 한번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화려했던 전성기 이면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1957년에는 두 번째 아내 박정혜와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고, 1959년에는 직접 운영하던 봉봉쇼단이 재정난으로 인해 6개월 만에 문을 닫는 등 시련을 겪었다.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 현인은 결국 1974년, 56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2. 7. 미국 이민과 귀국, 그리고 타계 (1974년 ~ 2002년)
1974년 56세의 나이에 미국 뉴욕 시티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세 번째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사업은 부진하여 1981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1981년 중반부터 1999년까지 10여 년 동안 KBS 《가요무대》를 비롯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1999년에 이르러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면서 방송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 투병 생활 끝에 2002년 4월 13일,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인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정식 앨범을 발표하고 데뷔한 가수였기에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상징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3. 학력
4.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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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연도 | 작품명 | 작사가 | 작곡가 | 비고 |
---|---|---|---|---|
1945 | 신라의 달밤 | 유호 | 박시춘 | |
1947 | 고향만리 | 유호 | 박시춘 | |
1948 | 럭키서울 | 유호 | 박시춘 | |
1948 | 베사메무초 | 현동주 (번안) | 번안곡 | |
1948 | 꿈이여 다시 한번 | 조남사 | 이인권 | 이인권 작/편곡, 영화 주제가 |
1948 | 비 내리는 고모령 | 유호 | 박시춘 | |
1949 | 서울야곡 | 유호 | 현동주 | |
1950 | 굳세어라 금순아 | 강사랑 | 박시춘 | |
1950 | 인도의 향불 | 손로원 | 전오승 | |
1950 | 전우야 잘자라 | 유호 | 박시춘 | |
1958 | 아리랑 맘보 | 나화랑 | 현인 | 나화랑 작사/편곡, 전영주 노래 |
1940년대 | 장미빛 인생 | 현인 (번안) | 박춘석 편곡, 번안곡 | |
연도 미상 | 꿈 속의 사랑 | 손석우 | 영장 | 손석우 작사/편곡 |
연도 미상 | 나폴리 맘보 | 박춘석 | 박시춘 | |
연도 미상 | 불국사의 밤 | 이은상 | 홍난파 | |
연도 미상 | 체리핑크 맘보 | 현동주 (번안) | 번안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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