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숙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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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혜숙옹주는 조선 성종과 숙의 홍씨의 장녀로, 이름은 수란이다. 1490년 신숙주와 한명회의 증손자인 신항에게 출가하여 70구의 노비와 전지 10결을 하사받았다. 연산군 시대에 남편 신항이 미움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으며, 1507년 신항과 사별한 후 신항의 묘지명을 신용개에게 부탁했다. 신항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려서 사망하여 신항의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고, 양자의 아들 신의는 중종의 딸 경현공주와 혼인했다. 혜숙옹주의 묘소는 남편 신항과 함께 의정부시 송산동의 신숙주 묘역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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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옹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혜숙옹주 정보 | |
이름 | 혜숙옹주 |
한자 표기 | 惠淑翁主 |
작위 | 성종의 옹주 |
배우자 |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 |
자녀 | 신수경 |
휘 | 수란(秀蘭 · 壽蘭) |
아버지 | 성종 |
어머니 | 숙의 홍씨 |
출생일 | 1478년 9월 6일 |
사망일 | 미상 |
능묘 | 신항 · 혜숙옹주묘 |
위치 |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379-7 |
2. 생애
성종은 혜숙옹주가 신항에게 시집갈 때 옹주의 시아버지인 신종호에게 옹주가 귀하게 자라 교만한 면이 있을 수 있으니 예를 가르쳐 부도(婦道)를 지킬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3]
남편 신항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연산군 즉위 후에는 미움을 받았다.
2. 1. 출생과 혼인
1478년(성종 9년) 7월 26일, 성종과 숙의 홍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수란'''(秀蘭 또는 壽蘭)이며, 혜숙옹주의 태지석과 왕실족보인 《돈녕보첩》에 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1490년(성종 21년) 4월 27일, 참판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이자 신숙주와 한명회의 증손자인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에게 출가하였다.[1] 신항은 세종의 10남인 의창군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혼인과 함께 70구의 노비와 전지 10결을 하사받았다.[2] 성종은 혜숙옹주를 신항에게 시집보내면서 시아버지 되는 신종호에게 옹주의 일을 따로 당부하였다.[3]
2. 2. 연산군 시절의 시련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이 혜숙옹주의 이복 동생인 휘숙옹주의 남편 풍원위 임숭재의 관직을 높여주자 대간에서 이에 대해 논박하였는데, 신항이 가자[4]되었을 때는 대간에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에 임숭재가 앙심을 품고 신항을 시기하여, 대간들이 신항을 비호한다며 연산군에게 모함하였다. 연산군은 신항의 가자를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간들과 승지들을 잡아들이고 신항을 잡아 하옥하였다.[5] 이어 신항의 궁궐 출입을 금지하고 가자를 개정하였다.[6]1506년(연산군 12년), 연산군은 연회를 열어 공주와 옹주, 종친의 처와 모든 왕후의 족친을 참석하게 하고, 핑계를 대어 불참하는 자는 그 남편에게 죄를 묻겠다고 어서(御書)를 내리고는, 다시 전교하여 공주, 옹주, 종친의 처와 왕후의 족친은 연회에 참석하게 하고 혜숙옹주만은 참석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7]
2. 3. 남편의 죽음과 사후
1507년(중종 2년), 남편 신항과 사별하였다. 혜숙옹주는 신항의 장례를 마친 후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신도비를 세우고, 시당숙인 신용개(申用漑)에게 신항의 묘지명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8] 남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려서 사망하였기에, 신항의 동생인 신함의 아들 신수경을 양자로 삼았다.[8] 양자 신수경의 아들 신의는 중종의 딸 경현공주와 혼인하였다.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송산(현재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있는 신숙주 묘역 근처에 남편 신항과 함께 매장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덕종 | 1438년 | 1457년 | 조선의 추존왕 |
조모 | 소혜왕후 | 1437년 | 1504년 | 인수대비 |
아버지 | 성종 | 1457년 | 1494년 | 조선 제9대 왕 |
외조부 | 홍일동 | ? | 1464년 | |
외조모 | 홍일동의 측실 | ? | ? | |
어머니 | 숙의 홍씨 | 1457년 | 1510년 | |
동생 | 완원군 | 1480년 | 1509년 | |
동생 | 회산군 | 1481년 | 1512년 | |
동생 | 견성군 | 1482년 | 1507년 | |
동생 | 정순옹주 | 1486년 | ? | |
동생 | 익양군 | 1488년 | 1552년 | |
동생 | 경명군 | 1489년 | 1526년 | |
동생 | 운천군 | 1490년 | 1524년 | |
동생 | 양원군 | 1492년 | 1551년 | |
동생 | 정숙옹주 | 1493년 | 1573년 | |
시아버지 | 신종호 | 1456년 | 1497년 | 신숙주의 손자, 한명회의 외손자 |
시어머니 | 전주 이씨 | ? | 1539년 | 세종의 10남 의창군의 딸 |
부마 | 신항 | 1477년 | 1507년 | 고원위(高原尉) |
양자 | 신수경 | 1501년 | ? | |
양손자 | 신의 | 1530년 | 1584년 | 영천위(靈川尉), 중종의 딸 경현공주와 혼인 |
참조
[1]
서적
고원위 신항이 혜숙 옹주에게 장가들다
1490-04-27
[2]
서적
혜숙옹주에게 노비와 전지를 내리다
1490-08-06
[3]
서적
옹주가 시집에서 예의를 바르게 할 것에 대해 우승지 신종호에게 전교하다
1490-04-15
[4]
문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를 올리던 일
[5]
서적
신항의 가자에 탄핵하지 아니한 승지 권주 등을 문초하게 하다
1504-12-16
[6]
서적
신항을 궐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에게 준 가자도 개정하게 하다
1504-12-18
[7]
서적
연회를 베풀어 공주 등 모든 종친의 처를 참석시키게 하다
1506-08-05
[8]
서적
신항(申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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