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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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국사관은 만세일계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일본의 역사관이다. 난보쿠초 시대의 '신황정통기'에서 그 원형이 나타났으며,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은 천황을 기축으로 하는 나라'라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황국사관을 정통 역사관으로 확립하고, 대일본제국 헌법을 통해 이를 법제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점령 하에 비판받았으며, 현재는 초국가주의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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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사관 | |
---|---|
개요 | |
명칭 | 황국사관 (皇國史觀) |
로마자 표기 | Hwangguk Sagwan |
주요 내용 |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적 역사관 일본 우월주의 신화적 요소 강조 서구 열강에 대한 대항 의식 |
배경 | |
시대적 배경 |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주의 강화 시기 |
영향 | 교육 정치 사회 군사 등 사회 전반에 영향 |
특징 | |
천황 중심주의 | 천황을 국가의 중심으로 강조하고, 천황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옹호한다. |
신화적 역사관 | 일본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다. |
국가주의적 역사 해석 | 일본의 역사를 국가 발전을 중심으로 해석하며,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
서구 열강에 대한 대항 의식 |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대항 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
일본 민족의 우월성 강조 | 일본 민족의 혈통과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
영향 | |
긍정적 평가 | 국민 통합에 기여 애국심 고취 |
부정적 평가 | 역사 왜곡 침략 전쟁 정당화 민족 차별 심화 |
비판 | |
역사 왜곡 |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한다. |
침략 전쟁 미화 | 과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쟁의 책임을 회피한다. |
민족주의적 편향 |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조장한다. |
현대적 재해석 시도 | |
개요 | 일부 학자 및 정치인들이 황국사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
비판적 시각 | 이러한 시도는 역사 수정주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
2. 정의
황국사관은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될 수 있다.
- 디지털 대사전은 "만세일계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의 발전·전개로 파악하는 역사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1]
- 일본 대백과사전에는 "국교화된 천황 중심의 초국가주의적 일본 사관"이라고 기술되어 있다.[1]
- 정선판 일본 국어 대사전에서는 "만세일계로 하는 천황에 의한 국가 통치를 일본 역사의 특징으로 하는 사고방식"이며, "고사기·일본서기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3. 기원
황국사관의 원형은 난보쿠초 시대(1333년~1392년)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쓴 《신황정통기》에서 확립됐다.[1]
에도 시대에는 국학을 중심으로 "일본은 천황을 기축으로 하는 나라"라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막말 페리 원정 이후 막부의 반대로 천황의 정치 세력은 존황양이를 주장했다.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견해가 보인다.
4. 연혁
난보쿠초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쓴 신황정통기에서 황국사관의 원형이 확립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국학을 중심으로 "일본은 천황을 기축으로 하는 나라"라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막말 페리 원정 이후에는 존황양이를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정부는 미토학의 영향을 받아 황국사관을 "정통 역사관"으로 확립했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을 통해 황국사관을 법제화하고, 국정 교과서를 통해 전 국민에게 보급했다. 1930년대에는 문부성이 "국체의 본의", "신민의 길"을 실행하여 천황에 대한 충의를 강조했다.
1880년대에는 기기신화에 대한 비판 등 비교적 자유로운 논의가 있었으나, 1891년 구메 구니타케의 논문이 불경죄로 비판받는 사건이 발생했다.[3][4] 1920년대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역사학에도 언론이 활발해졌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위기감과 함께 통제가 강화되었다. 1935년 천황 기관설 사건, 1940년 쓰다 소키치의 저작 발금 처분 등 사건이 있었다. 1911년에는 남북조 정통론 논쟁이 있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하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고, 국민 주권이 명시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이 널리 퍼지면서 역사학 연구가 진전되었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와 같은 명칭도 사용되게 되었다. 황국사관은 초국가주의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비판받고 있다.
4. 1. 난보쿠초 시대·에도 시대
황국사관의 원형은 난보쿠초 시대(1333년~1392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쓴 신황정통기에서 확립되었다.에도 시대에는 국학을 중심으로 "일본은 천황을 기축으로 하는 나라"라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막말 페리 원정 이후 막부에 반대하는 천황 중심의 정치 세력은 존황양이를 주장했다.
4. 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정부는 미토학의 영향을 받아 황국사관을 "정통 역사관"으로 확립해 갔다.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대일본 제국은 만세일계이며 신성 불가침한 천황이 통치한다"라고 명기하여 황국사관을 법제화했다.일본 제국은 국정 교과서를 통해 황국사관을 전 국민에게 보급했다. 이 교과서는 진무 천황의 건국 신화로 시작하여 천황에 대한 충성과 역적에 대한 평가를 담았으며, 연호로 시대를 구분했다. 초등학교에는 천황의 사진 (어진영)이 배포되어 경례를 하도록 했다.
1930년대에는 문부성이 "국체의 본의", "신민의 길"을 실행하여 천황에 대한 충의를 강조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역사 교과서에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조정에 반기를 든 역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에이로쿠 연간까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오히려 역적으로 여겨졌다.
4. 2. 1. 논쟁 및 사건
1880년대에는 기기신화에 대한 비판 등 비교적 자유로운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91년 제국대학 교수 구메 구니타케가 쓴 논문 "신도는 제천의 고속"이 불경죄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받고 직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3][4]1920년대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역사학에도 언론이 활발해졌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위기감과 함께 통제가 강화되었다. 1935년에는 천황 기관설 사건이 일어났다. 1940년에는 역사학자쓰다 소키치의 기기신화 비판이 문제가 되어 저작이 발금 처분되었다.
1911년에는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시대를 "남북조 시대"로 기술한 점이 남조와 북조를 대등하게 취급한다는 이유로 제국 의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남북조 정통론)
4.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하에, 대일본제국 헌법을 개정하여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고, 국민 주권이 명시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이 널리 퍼지면서 역사학의 선사학, 고대사(상대사)·고고학 연구가 진전되었다. 또한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와 같은 명칭도 사용되게 되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전후 사학"이라고 불렸다.이에 근거한 역사가들은 황국사관을 초국가주의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주도면밀한 국가적 스케일 하에 창출된 이른바 국정의 허위 관념의 체계"라고 비판하고 있다.
혼고 카즈토는 "황국사관은 '거대한 이야기'로서 창작된 것으로, 학문적으로는 하나하나의 실증이나 정합성은 무시되었으며, '천황의 역사상조차 제대로 그릴 수 없는, 전형적인 공론'으로, 학문이라기보다는 종교의 영역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참조
[1]
kotobank
皇国史観
[2]
뉴스
皇国史観とは?
https://web.archive.[...]
しんぶん赤旗
2008-03-19
[3]
문서
現在の[[神社本庁]]系グループの各社
[4]
문서
[[出雲大社]]や現在の[[出雲大社教]]・[[出雲教]]系グループの各社
[5]
서적
皇国史観
https://cir.nii.ac.j[...]
[[岩波書店]]
[6]
서적
暴力と武力の日本中世史 (朝日文庫) Kindle版
朝日文庫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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