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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15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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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진은 임진왜란 시기 활약한 조선의 무관으로, 1590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1591년에는 동복현감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이광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했고,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하여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익산군수와 충청도 조방장을 겸임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지휘했으나, 9일간의 항쟁 끝에 전사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진주 창열사와 남원 민충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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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155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황진
한자 이름黃進
출생1550년
사망1593년 6월 (44세)
출생지조선 전라도 남원군 주생면 영천리
사망지조선 경상도 진주성 (전사)
본관장수 황씨 (長水)
명보(明甫)
시호무민(武愍)
가족 관계
아버지황윤공
어머니남양 방씨
친조부황개
외조부방응성
5촌 종숙부황윤길
경력
복무조선 군사
복무 기간1572년 ~ 1593년
계급충청도 병마절도사
직책조선 전라도 익산군 군수 (1592년 7월 ~ 1593년 6월)
임금조선 선조
지휘충청도 조방장
무과 급제1572년 (선조 5년)
군사 활동
참전 전투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
기타 정보
정당무소속

2. 생애

1550년 황희의 5대손이자 황윤공의 아들로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1570년 초시에 합격하였고, 1576년 선조 9년(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함경도에서 6년간 근무했다. 거산도찰방, 안원권관 등 하위 관직을 거쳤다. 1583년 이탕개의 난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1] 1590년 당숙인 황윤길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591년 동복현감이 되었다. 황진은 왜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5]

1592년 6월 왜군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하자 전라도순찰사 이광은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서 수비하게 했으며, 황진도 이광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했다.[6]

1593년 2월, 황진은 전라병사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과 싸웠고, 3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안성에 진을 옮기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죽산성에서 왜군과 대치하던 중, 왜군이 안산성을 함락하고자 죽산성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황진은 맞서 싸워 죽산성을 점령하고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1550년 황희의 5대손이자 황윤공의 아들로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1570년 초시(初試)에 합격하였고, 1576년 선조 9년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해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함경도에서 6년간 근무했다. 거산도찰방, 안원권관 등 하위 관직을 거쳐 선전관이 되었다. 1583년 여진족 3만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이탕개의 난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1]

2. 2. 임진왜란 참전

1590년 당숙인 황윤길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1591년 동복현감이 되었다. 황진은 왜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5]

1592년 6월 왜군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하자 전라도순찰사 이광은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서 수비하게 했다. 황진도 이광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해 왜군의 침입을 방비했다.[6]

1593년 2월, 황진은 전라병사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과 싸웠다. 3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안성에 진(陣)을 옮기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죽산성에서 왜군과 대치하던 중, 왜군이 안산성을 함락하고자 죽산성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황진은 맞서 싸워 죽산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전쟁 후, 선조는 황진에게 사후에 훈장을 추서했다.

2. 2. 1.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

용인의 전투에서 패해 남하하던 중, 진안에 침입한 왜군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웅치를 넘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왜군 제6번대 병력을 격퇴했다.
대둔산 휴게소에 세워진 이치대첩비
7월 훈련원 판관(종5품)으로 이치 전투(梨峙戰鬪)에 참가해 왜군을 격퇴했다.[7] 왜군의 대병이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해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치를 점거해 총탄에 맞아 부상하기까지 하면서 대승했다.[7] 당시 왜군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7] 이 전투로 황진은 나주판관 이복남과 함께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이 공으로 황진은 익산군수(종4품)와 충청도 조방장을 겸했다.[7]

2. 2. 2.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6월, 왜군 10만이 진주성을 공략하자 김천일, 경상도병마절도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벌였다. 황진은 9일간의 항쟁 끝에 전사하였다.[1]

황진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휘했다. 1593년 7월, 진주성에는 약 3,800명의 조선군이 있었다. 7월 중순경, 가토 기요마사,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 지휘관들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주로 진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첫 번째 전투 결과에 불만을 표시했기에 일본군은 승리를 간절히 원했다.[1]

일본군이 접근하자 조선군은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황진은 성문을 열면 일본군이 몰려들어 성을 함락시킬 것이라 판단하여 성문을 열 수 없다고 알렸다. 결과적으로, 백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증원을 담당했던 지휘관이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졌다.[1]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비통한 심정이었지만, 황진은 수비대에게 성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소총병의 지원 아래 사다리를 설치하자, 조선군은 돌과 끓는 기름을 일본군에게 쏟아 부었다. 또한 활, 박격포, 소총으로 일본군에 반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공성탑을 사용하자 조선군은 저항할 수 없었다.[1]

황진은 뛰어난 방어 능력과 지휘력으로 조선에서 유명하다. 그는 두 발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남았다가 상처로 사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6일 후, 황진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고, 아침이 되자 포위 공격은 끝났다. 그의 부하들이 그가 헐떡이며 숨을 쉬고 지쳐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황진은 여전히 칼을 잡은 채 죽었다. 그는 사망 당시 43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사기가 꺾였고, 진주성은 곧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1]

3. 인간 관계

그는 최경회 의병장과 1562년 유교 성리학 수학 시절 사형제(師兄弟) 관계를 맺었는데, 이후 1593년 임진왜란 때 사형(師兄) 최경회 의병장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4. 평가

황진은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진주 창열사(彰烈祠)와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4. 1. 사후 추증 및 기념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 창열사(彰烈祠),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됐다.[4] 시호는 무민(武愍)이다.[4]

5. 관련 문화재


  • 장원군 황성원 부자 영정 - 前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

참조

[1] 웹사이트 황진(黃進) http://encykorea.aks[...] 2020-07-24
[2] 웹사이트 sub_main3 http://jinju.museum.[...]
[3] 웹사이트 Home > Culture/Tourism > Tourism > Tourist Attractions http://english.jinju[...] 2007-12-19
[4] 인물
[5] 웹인용 선조실록수정 24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6] 웹인용 선조실록수정 25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7] 웹인용 선조실록수정 25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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