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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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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공왕은 신라의 제52대 왕으로, 897년부터 912년까지 재위했다. 헌강왕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진성여왕에게 양위받아 즉위했다. 효공왕 재위 기간 중 신라는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여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의 침략으로 영토를 잃었다. 이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성을 굳게 지키는 정책을 펼쳤으며,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912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어 신덕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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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효공왕 (孝恭王)
김요 (金嶢)
출생885년
사망912년 4월 (27세)
재위 기간897년 - 912년
능묘효공왕릉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14번지
신분
왕조신라
작위제52대 신라 국왕
가족 관계
부친헌강왕
모친의명왕태후 김씨
배우자왕비 박씨
형제자매의성왕후, 계아태후
즉위 전
작위신라 태자
재위 기간895년 10월 ~ 897년 6월 1일 (음력)
전임자태자 정 (헌강왕)
정치
계승자신덕왕
태자태자 승영 (경명왕)
기타
종교불교

2. 생애

효공왕은 885년에서 887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의 문집에 따르면, 887년 7월 5일에 헌강왕이 죽었지만, 효공왕은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형인 정강왕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5]

897년, 효공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신라는 이미 후삼국 시대의 대규모 내란에 돌입한 상태였다. 후백제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고, 900년에는 견훤이, 901년에는 궁예가 왕을 칭했다. 효공왕은 이들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신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1. 탄생과 즉위

효공왕의 이름은 요(嶢)이며 헌강왕의 서자로 태어났다. 헌강왕이 길을 가던 중 아름다운 자태의 여인을 보고 유궁에서 관계를 맺은 후 효공왕이 태어났다.[5]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국왕 중 어머니가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인 경우는 효공왕의 어머니가 유일하다. 효공왕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크고 용모가 뛰어났다.

효공왕의 출생년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최치원의 문집인 《최치원문집(崔致遠文集)》 제2권 중 당나라에 올리는 표문인 「납정절표(納旌節表)」에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5] 해당 기록에 따르면 효공왕은 885년 8월에서 886년 7월 사이에 태어났고,[7] 태어난 지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버지 헌강왕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895년(진성여왕 9년) 10월, 진성여왕은 효공왕을 입궁하게 한 뒤 태자로 책봉하였다.[5] 897년, 진성여왕에게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2. 2. 치세

효공왕은 897년 왕위에 올랐지만, 신라는 이미 대규모 내란(후삼국 시대)에 돌입한 상태였다. 특히 후백제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다. 900년 견훤이, 901년 궁예가 왕을 칭하면서, 효공왕은 이들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신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897년 당나라에 대해 발해대봉예가 발해의 서열을 신라보다 상위로 할 것을 요청했으나, 당나라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라의 최치원이 감사의 뜻을 담아 효공왕이 당나라 소종에게 보낸 공식 국서인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영내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인이며, 발해는 고구려 영내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사불허북국거상표』는 발해가 존재했던 동시대의 사료이며, 신라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낸 공식 국서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제1급 사료로 여겨진다.[3][4]

2. 2. 1. 내정

897년(진성여왕 11년) 6월, 진성여왕은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조카인 효공왕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5] 효공왕은 즉위 후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사면하고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 계급씩 올려주었다.[8]

898년(효공왕 2년), 어머니 김씨를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로 추존하였으며, 서불한 준흥과 아찬 계강을 각각 상대등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899년(효공왕 3년)에는 이찬 박예겸의 딸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8]

902년(효공왕 6년), 매형인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임명하였고, 906년(효공왕 10년)에는 파진찬 김성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2. 2. 2. 후삼국 시대의 전개

헌강왕의 아들이자 진성여왕의 조카로, 진성여왕에 의해 태자로 책봉되고 진성여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후백제를 건국하였고, 신라 왕실의 후예인 궁예 또한 901년(효공왕 5년)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8]

효공왕 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의 군웅 할거가 본격화되었으며 해마다 견훤과 궁예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898년(효공왕 2년) 7월, 궁예에 의해 패서도와 한산주의 성 30여곳을 빼앗겼으며, 900년(효공왕 4년) 10월에는 국원(國原, 충주)과 청주(靑州, 청주), 괴양(槐壤, 괴산)의 도적 두목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8]

901년(효공왕 5년) 8월에는 견훤대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쪽으로 군사를 돌려 인근 부락을 약탈하였다.[8]

904년(효공왕 8년), 궁예는 국호를 고구려에서 마진(摩震)으로 바꿨으며, 패서도의 10개 주와 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905년(효공왕 9년) 8월, 궁예의 군대가 죽령 동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계속되는 침략에 효공왕은 맞서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하였다.[8]

907년(효공왕 11년), 견훤의 후백제군에 의해 일선군(一善郡, 선산읍) 이남의 10개 성을 모두 빼앗겼다. 911년(효공왕 15년)에는 궁예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897년, 효공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신라는 대규모 내란(후삼국 시대)에 돌입했고, 그중에서도 완산에서 세력을 키우던 후백제견훤이나 후고구려의 궁예 등의 세력이 급격하게 영토를 침식해 갔다. 900년에 견훤이, 901년에 궁예가 왕을 칭했다. 효공왕은 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신라의 영토는 날마다 줄어들었다.

2. 2. 3. 외교

효공왕 시대에는 신라가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892년 견훤후백제를 건국하고, 901년에는 궁예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라는 해마다 견훤과 궁예의 침략을 받았다.

898년 7월, 궁예에게 패서도와 한산주의 성 30여 곳을 빼앗겼다.[8] 900년 10월에는 국원(國原, 충주), 청주(靑州, 청주), 괴양(槐壤, 괴산)의 도적 두목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8] 901년 8월에는 견훤대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쪽으로 군사를 돌려 인근 부락을 약탈하였다.[8]

904년, 궁예는 국호를 고구려에서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패서도의 10개 주와 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905년 8월, 궁예의 군대가 죽령 동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계속되는 침략에 효공왕은 맞서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하였다.[8]

907년, 견훤의 후백제군에 의해 일선군(一善郡, 선산읍) 이남의 10개 성을 모두 빼앗겼다. 911년에는 궁예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고쳤다.

897년 당나라에 대해 발해대봉예가 발해의 서열을 신라보다 상위로 할 것을 요청했으나, 당나라가 불허한 것에 감사하며 신라의 최치원이 집필하고 효공왕이 당나라황제인 소종에게 보낸 공식 국서인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영내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인이며, 발해는 고구려 영내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사불허북국거상표』는 발해가 존재했던 동시대의 사료이며, 신라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낸 공식 국서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제1급 사료로 여겨진다.[3]

2. 3. 말년과 최후

911년(효공왕 15년), 효공왕이 천한 첩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은영(殷影)이 간언하였다. 효공왕이 은영의 간언을 듣지 않자 은영이 첩을 잡아 죽였다.[8]

912년 4월, 효공왕은 2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공'''(孝恭)이며,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효공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여 왕위는 헌강왕의 사위이자 효공왕의 매형인 박경휘(신덕왕)가 계승하였다.

3. 가족 관계

효공왕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헌강왕
어머니의명왕태후 김씨
왕비박씨박예겸의 딸
이복 누이의성왕후경명왕, 경애왕의 어머니
이복 누이계아태후경순왕의 어머니


4. 기타

2000년~2002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배우 한근욱이 효공왕 역을 맡았다.

참조

[1] 뉴스 https://www.ulsanpre[...] 2022-02-23
[2]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2018-05-06
[3]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04
[4]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04
[5] 문서 삼국사기
[6] 문서
[7] 웹사이트 학계에서는 885년생으로 본다. https://kiss.kstudy.[...]
[8] 문서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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