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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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도는 당나라 시인으로, 승려 생활을 거쳐 환속 후 진사가 되었다. 그는 한유에게 문장을 배우고, '고침'이라는 일화로 유명하다. 소동파는 가도를 맹교와 함께 '교한도수'로 불렀으며, 그의 작품은 고심하여 시구를 다듬는 '고음'으로 평가받았다. 가도는 장강 현 주부와 보주 사창 참군을 역임했으나, 쇠고기를 과식하여 65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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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9년 출생 - 우승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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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당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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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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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도 |
본명 | 가도 |
자 | 무본(無本) |
별칭 | 낭선(浪仙) |
국적 | 당나라 |
출생 | 779년 |
사망 | 843년 (64세) |
직업 | 시인, 불교 승려 |
활동 시기 | 중당(中唐) |
생애 | |
속성 | 한(韓)씨 |
출신지 | 범양(范陽, 현재의 허베이성 줘저우시) |
주요 활동 | 처음에는 불교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 한유의 천거로 진사에 응시했으나 낙방 평생을 빈한하게 살았음 |
대표작 | 심은 약초를 캐지 못함(尋隱者不遇) 검을 시험함(試劍) 병중의 말을 보냄(病馬) |
작품 세계 | |
특징 |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시풍 "고음 시인(苦吟詩人)"이라는 별칭을 얻음 한유, 맹교와 함께 "한맹 가도(韓孟賈島)"로 불림 |
어구 | "두드려서 열고 싶습니다만, 한밤중이라 사람을 놀라게 할까 걱정됩니다.(推敲)" 추고 고사 |
2. 생애
가도는 범양(현 베이징 시) 출신으로, 처음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그만두고 승려가 되어 법호를 무책(無策)이라고 했다. 이후 낙양에서 한유에게 문장을 배웠고, 재능과 학식을 인정받아 환속하여 진사에 합격했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맹교와 함께 가도를 ‘교한도수(郊寒島瘦)’라 불렀으며, ‘퇴고(推敲)’라는 고사성어도 가도와 관련이 있다.
가도는 담론적인 ''고시''와 서정시인 ''근체시''를 모두 썼다. 그의 작품은 소식에게 "얇다"고 비판받았으며, 일부 평론가들은 제한적이고 인위적이라고 평가했다.[1]
제임스 J.Y. 류(1926–1986) 박사에 따르면, 가도의 시 "검객"()은 "4행으로 협객 정신을 요약하는 듯하다."[2][3]
"검객"[5]
"검객"의 첫 구절은 종종 길고 힘든 노력을 언급하는 격언으로 사용된다.[6]
"독행담저영, 수식수영신"이라는 두 구절을 3년 동안 다듬었고, "한 번 읊조리니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네,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고향 산의 가을에 돌아가 누우리라"라고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고스기 호안은 "자기 일에 대해, 유난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편, 당나라 시대의 이동처럼 가도의 시를 사모하여 가도의 동상(가도불)까지 만들어 섬긴 사람도 있었다.
2. 1. 출생 및 승려 시절
가도(賈島)는 범양(현 베이징 시) 사람으로, 처음에는 진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승려가 되어 법호를 무본(無本)이라고 했다.[1] 이후 낙양으로 가서 한유에게 문장을 배웠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환속하여 진사에 급제하였다.2. 2. 환속과 과거 급제
가도는 범양(현 베이징 시) 출신으로, 처음에는 진사 시험에 낙방하여 승려가 되어 법호를 무본이라 하였다.[1] 이후 낙양으로 가 한유에게 문장을 배웠고, 재능을 인정받아 환속, 진사에 급제했다.[1]835년 (대화 9년), 장강현(현 쓰촨성) 주부(主簿)가 되었다.[1] 841년 (회창 원년)에는 보주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 쇠고기를 과식하여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가도는 진사 시험을 한유에게 추천받았으나 낙방한 적이 있다. "재상이 미워하는 탓"이라는 말을 듣고 재상 배도에게 "천 가구를 부수고 연못 하나를 만들고, 복숭아와 오얏은 심지 않고 장미를 심으니, 장미꽃 지고 가을바람 불면, 가시나무가 뜰에 가득함을 그대가 비로소 알리라"라는 시를 지어 비방하기도 했다. 이는 평판이 좋지 않아 출세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가도는 글을 쓸 때 여러 번 읽고 고쳐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퇴고(推敲)'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승려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좋을지, 미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한유의 행렬에 부딪혔고, 한유는 "두드리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2. 3. 관직 생활과 죽음
835년에 장강 현(쓰촨성)의 주부가 되었고, 841년에 보주사창참사가 되어 사호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부임 전에 쇠고기를 과식해 향년 65세의 나이로 죽었다.[1]가도는 고음(苦吟)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관의 은거에 부치다'의 한 구절에서 승려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좋을지, 미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며 걷다가 한유의 행렬에 부딪혔다. 가도가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자, 한유는 "그것은 물론, 승려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좋소"라고 단호하게 대답했고, 그 후 가도는 한유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1] 이 일로 인해 "글을 쓴 후, 글귀를 더 좋게 하기 위해 여러 번 읽고 고쳐 쓰는 것"을 "퇴고"라고 한다.[1]
3. 일화
자오다오(가도)의 시 "검객"()은 협객 정신을 4행으로 요약한 듯하다.[2][3] 류(James J.Y. Liu)의 번역에 따르면 "검객"은 다음과 같다.
"검객"의 첫 줄은 길고 힘든 노력을 언급하는 격언으로 종종 사용된다.[6]
"독행담저영, 수식수영신"이라는 두 구절은 3년 동안 다듬은 것으로, 스스로 주석을 달아 "한 번 읊조리니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네.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고향 산의 가을에 돌아가 누우리라"라고 했다. 고스기 호안은 이를 두고 "자기 일에 대해 유난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편, 당나라 시대의 이동처럼 가도의 시를 사모하여 가도의 동상(가도불)까지 만들어 섬긴 사람도 있었다.
3. 1. 퇴고(推敲)
한유와의 일화로 유명하다. 가도는 고음(苦吟)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관의 은거에 부치다」의 한 구절에서 승려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좋을지, 미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며 걷다가(일설에는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고도 한다) 한유의 행렬에 부딪혔다.[1] 가도가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자, 한유는 "그것은 물론, 승려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좋소"라고 단호하게 대답했고, 그 후 가도는 한유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일로 인해 "글을 쓴 후, 글귀를 더 좋게 하기 위해 여러 번 읽고 고쳐 쓰는 것"을 "퇴고"라고 한다.3. 2. 배도(裴度)와의 갈등
가도는 진사 시험을 한유에게 추천받았으나 한 번 떨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재상이 미워하는 탓이다"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나, 마침 새 집을 지은 재상 배도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비방했다. "천 가구를 부수고 연못 하나를 만들고, 복숭아와 오얏은 심지 않고 장미를 심으니, 장미꽃 지고 가을바람 불면, 가시나무가 뜰에 가득함을 그대가 비로소 알리라".[1] 이는 좋지 않은 평판으로 이어져 가도가 출세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1]4. 작품 세계
가도(賈島)는 당나라 시인으로, 특히 오언율시에 능했다. 한유의 제자였으나 여러 차례 진사 시험에 낙방했다. 담론적인 ''고시''와 서정시인 ''근체시''를 모두 썼다. 그의 작품은 소식에게 "얇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일부 다른 평론가들은 제한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1]
4. 1. 시풍(詩風)
가도(賈島)는 특히 오언율시에 능했으며, 그의 작품은 소식에게 "얇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일부 다른 평론가들은 제한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1] 북송의 소식은 그의 시평에서 "교한도수"(郊寒島瘦)라는 말을 사용했다. (교는 맹교, 도는 가도를 의미한다.)중국 문학 및 비교 문학 교수인 제임스 J.Y. 류(1926–1986) 박사에 따르면, 가도의 시 "검객"()은 "4행으로 협객 정신을 요약하는 듯하다."[2][3] 류의 번역에 따르면 "검객"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 글자당 약강 하나를 사용하여 원본 중국 시를 측량 번역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5]
"검객"의 첫 줄은 종종 길고 힘든 노력을 언급하는 격언으로 사용된다.[6]
다음은 가도의 시 "제이관유거", "도상건", "심은자불우" 이다.
4. 2. 대표작
가도는 특히 오언율시에 능했으며, 저서로 《장강집》 10권과 《정강집》 외 3권이 있었다.[1] 북송의 소식은 그의 시평에서 "교한도수"(郊寒島瘦)라는 말을 사용했다. (교는 맹교, 도는 가도를 의미한다.)[6]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검객〉, 〈제이관유거〉, 〈도상건〉, 〈심은자불우〉 등이 있다.
한거소린병 | 한가롭게 살아 이웃이 적고 |
초경입황원 | 풀길이 거친 뜰로 들어가네 |
조숙지중수 | 새는 연못 속 나무에 깃들고 |
승고월하문 | 스님은 달밤에 문을 두드리네 |
과교분야색 | 다리를 지나 들의 풍경을 나누고 |
이석동운근 | 돌을 옮겨 구름의 뿌리를 움직이네 |
잠거환래차 | 잠시 떠나 다시 여기에 오니 |
유기불부언 | 그윽한 약속 말에 어긋나지 않네 |
객사병주이십상 | 객사에서 병주에 머문 지 이미 십 년 |
귀심일야억함양 |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날마다 함양을 그리워하네 |
무단갱도상건수 | 뜻하지 않게 다시 상건수를 건너니 |
각망병주시고향 | 돌아보며 병주를 바라보니 이곳이 고향이네 |
송하문동자 | 소나무 아래에서 아이에게 묻네 |
언사채약거 | 말하길 스승은 약초를 캐러 갔다고 |
지재차산중 | 다만 이 산 속에 있다고 |
운심부지처 | 구름이 깊어 있는 곳을 알 수 없네 |
그의 시 〈검객〉()은 4행으로 협객 정신을 요약하는 듯하다.[2][3]
"검객"의 첫 줄은 종종 길고 힘든 노력을 언급하는 격언으로 사용된다.[6]
5. 평가
자오다오(賈島)는 현대 베이징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교 승려로 잠시 지내다가 장안으로 갔다. 그는 한유의 제자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여러 차례 진사 시험에 낙방했다. 그는 담론적인 ''고시''와 서정시인 ''근체시''를 모두 썼다. 그의 작품은 소식에 의해 "얇다"고 비판받았으며, 일부 다른 평론가들은 그것을 제한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여겼다.[1]
중국 문학 및 비교 문학 교수인 제임스 J.Y. 류(1926–1986) 박사에 따르면, 자오다오의 시 "검객"()은 "4행으로 협객 정신을 요약하는 듯하다."[2][3] 류의 번역에 따르면 "검객"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 글자당 약강 하나를 사용하여 원본 중국 시를 측량 번역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5]
원문 중국어:
검객:
십 년 동안 칼을 갈았는데,
서릿발 칼날 시험해 본 적 없네.
오늘 쥐고 그대를 보여주니,
억울한 일 겪는 이 있는가.
"검객"의 첫 줄은 종종 길고 힘든 노력을 언급하는 격언으로 사용된다.[6]
참조
[1]
웹사이트
Renditions Magazine
https://web.archive.[...]
[2]
서적
The Chinese Knight Errant
Routledge and Kegan Paul
1967
[3]
웹사이트
MEMORIAL RESOLUTION
https://web.archive.[...]
2007-06-09
[4]
문서
Extremely sharp.
[5]
웹사이트
Swordsman 剑客
https://medium.com/@[...]
2020
[6]
서적
Fighting on the Cultural Front: U.S.-China Relations in the Cold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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