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 친링 첸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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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르 친링 첸드로는 티베트 제국의 론첸으로, 7세기 후반 티베트와 당나라 간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는 첸예 돔푸의 뒤를 이어 아자로 파견되었으며, 대비강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 이후 망녠 탁잡과의 갈등, 트리마 뢰의 론첸 임명, 중국과의 협상 실패 등을 겪었다. 699년에는 국왕 트리두 송첸의 쿠데타로 자결했으며, 그의 아들 망포제는 중국으로 도망쳤다. 가르친링은 대비천 전투, 승풍령 전투, 인식가 전투, 소라한산 전투 등에서 당나라 군을 상대로 승리하며 티베트의 세력을 확장했으나, 권력 투쟁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형 가르 첸예 돔푸가 론첸이 된 후, 가르 친링은 토번이 새로 정복한 아자 지역에 파견되어 당나라와의 대비하 전투 등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685년, 형 첸예가 정적인 가르 망녠 탁잡(མགར་མང་ཉེན་སྟག་ཙབbo)과의 싸움에서 사망하자, 가르 친링은 즉시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당시 실권자였던 태후 트리마 뢰에 의해 새로운 론첸으로 임명되어 토번의 군사 및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2. 생애
그는 토번 내에서 매우 높은 명성을 쌓았으나, 이는 점차 성장한 트리두 송첸 국왕에게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국왕은 가르 가문의 강력한 세력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699년, 트리두 송첸은 가르 가문 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고, 가르 친링은 이에 저항하려 했으나 휘하 군대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 가르 가문은 몰락했으며, 아들 망포제(중국 기록상 륜궁런)와 형제 가르 첸바(མགར་བཙན་པbo) 등 살아남은 일족은 당나라로 망명했다.
2. 1. 초기 활동
그의 형 가르 첸예 돔푸가 론첸의 자리를 계승한 후, 가르 친링은 새로 정복한 아자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670년 봄, 티베트 제국은 서부 타림 분지에 남아있는 중국 영토를 공격했다. 이에 중국 장군 설인귀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자로 돌아와 대비하 전투에서 가르 친링이 이끄는 40만 대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티베트 제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685년, 형 가르 첸예 돔푸는 또 다른 대신 가르 망녠 탁잡(མགར་མང་ཉེན་སྟག་ཙབbo)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섬파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가르 친링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가르 망녠 탁잡은 이 사건 이후 종적을 감추었는데, 정황상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티베트의 ''사실상'' 통치자였던 태후 트리마 뢰는 가르 친링을 새로운 론첸으로 임명했다.
중국은 티베트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중국은 티베트가 아자 지역에서 철수하기를 요구했고, 티베트는 중국이 타림 분지에서 철수하기를 요구하면서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가르 친링은 티베트 내에서 매우 높은 명성을 얻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어린 국왕 트리두 송첸은 가르 가문의 구성원들이 독립적인 군벌처럼 세력을 키워 왕의 중앙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699년, 트리두 송첸은 대규모 사냥을 조직하는 척하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가르 가문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가르 친링과 대결했다. 가르 친링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를 따르던 군대가 배신하면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 쿠데타 사건으로 강력했던 가르 가문은 숙청되었다. 가르 친링의 아들 망포제(중국 측 기록에는 륜궁런(論弓仁)으로 알려져 있다)는 형제 중 한 명인 가르 첸바(མགར་བཙན་པbo)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2. 2. 대당 전쟁
형 가르 첸예 돔푸가 론첸으로 재임하던 시기, 가르친링은 토번이 새로 정복한 아자 지역에 파견되었다. 670년 당나라의 설인귀가 이끄는 군대와 대비하 전투를 치르는 등, 타림 분지와 아자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당나라와의 본격적인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685년, 형 첸예가 정적인 가르 망녠 탁잡과의 싸움에서 사망하자, 가르친링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당시 실권자였던 태후 트리마 뢰에 의해 새로운 론첸으로 임명되어 토번의 군사 및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론첸이 된 가르친링은 계속해서 대당 전쟁을 이끌었다. 토번은 아자 지역의 지배권을, 당나라는 타림 분지의 반환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이후 가르친링은 여러 주요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며 토번의 군사적 우위를 확립하고 높은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권력과 가르 가문의 세력은 점차 성장한 트리두 송첸 국왕에게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699년, 트리두 송첸은 사냥을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가르 가문과 그 지지자들을 기습적으로 숙청하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가르친링은 이에 저항하려 했으나 휘하 군대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결하였다.
이 쿠데타로 가르 가문은 몰락했으며, 가르친링의 아들 망포제(중국 기록상 륜궁런)와 또 다른 아들 가르 첸바 등 살아남은 일족은 당나라로 망명했다.
2. 2. 1. 대비천 전투 (670년)
669년 당 고종은 설인귀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번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가르친링은 토번군을 이끌고 칭하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섰다.
670년, 가르친링은 대비천에서 벌어진 전투(대비천 전투)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설인귀를 비롯한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가르친링은 포로로 잡힌 당나라 장수들을 훈계한 뒤 돌려보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설인귀는 본국으로 돌아간 후 책임을 지고 한때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대비천에서의 패배는 서역 지역에서 당나라의 위상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가르친링은 이 기세를 이용하여 670년 당나라의 통제하에 있던 서역으로 진격했다. 그 결과, 카라샤르(焉耆), 쿠차(龜玆), 호탄(于闐), 카슈가르(疏勒) 등 안서도호부에 속했던 주요 4개 도시(안서사진, 安西四鎭)가 토번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서역 지역은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아자 지역을 포함한 타림 분지 서부 지역에 대한 토번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2. 2. 2. 승풍령 전투 (678년)
678년, 당나라는 날로 강성해지는 토번을 견제하기 위해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을 제군대총관(諸軍大總管)으로 삼고 공부상서(工部尚書) 유심례(劉審禮)와 함께 18만 대군을 동원하여 토번을 침공했다. 가르친링은 칭하이호(청해호) 부근의 승풍령(承風嶺)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유심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던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 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가르친링은 이경현을 포함한 일부 당나라 군대를 놓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풍령에서의 대승리로 인해 오늘날의 칭하이성 지역은 토번의 영토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전투는 승풍령 전투로 알려져 있다.
2. 2. 3. 인식가 전투 (689년)
689년, 당나라의 무측천은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자 문창우상 위대가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안서대도호 염온고를 부총관으로 삼아 약 10만 명의 병력을 주어 토번이 점령하고 있던 안서사진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맞서 토번의 가르친링은 군대를 이끌고 인식가 강(寅識迦 江)으로 이동하여 당나라 군대와 대치했다.
겨울이 되어 추위가 심해지자 당나라 군대는 인식가 강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폭설까지 내리자, 가르친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을 건너 당나라 군대를 기습했다. 당나라 군대는 추위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강의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가르친링의 대대적인 공세에 결국 크게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폭설을 만나 많은 병사가 얼어 죽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패배 소식에 무측천은 크게 분노하여 총사령관이었던 위대가를 수주(현재 광서 계평현 남쪽)로 유배 보내고, 부총관 염온고는 참수형에 처했다.
2. 2. 4. 소라한산 전투 (696년)
695년 가르친링(論欽陵)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의 임조를 공격하여 당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왕효걸을 다시 파견하여 토번을 공격하게 하였다. 가르친링은 군대를 모았으나, 이전에 동생 가르다고리가 패배한 영향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3만에서 5만 정도에 불과했다.
695년 7월,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토번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무측천은 696년 1월 누사덕에게 군대를 증원하여 왕효걸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696년 3월, 마침내 양군은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왕효걸과 조인사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와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소라한산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이후 토번에 보낸 국서에서 토번을 '서쪽 정부'라고 칭할 정도로 위상이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가르친링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2. 3. 권력 투쟁과 죽음
아버지 가르통첸과 형 가르 첸예 돔푸의 뒤를 이어 토번의 권력 중심에 섰던 가르친링은 토번 제국의 팽창에 크게 기여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형 가르 첸예 돔푸는 론첸(토번의 최고 재상) 자리를 계승했으나, 685년 다른 대신 가르 망녠 탁잡과의 권력 다툼 끝에 섬파 강가에서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가르친링은 즉시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후 가르 망녠 탁잡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실상 토번의 통치자였던 태후 트리마 뢰는 가르친링을 새로운 론첸으로 임명했다.
가르친링의 권력은 676년 34대 쩬뽀(토번 군주의 호칭) 망송망첸이 사망하고, 당시 6살에 불과했던 치둑송첸을 왕위에 세우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치둑송첸이 성장하자, 그는 강력한 가르 가문의 세력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699년, 치둑송첸은 대규모 사냥을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가르 가문 세력과 지지자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가르친링과 대치했다. 가르친링은 저항하려 했으나, 그를 따르던 군대가 왕에게 돌아서면서 결국 청해호 근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토번의 안정을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가르 가문은 몰락했으며,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첸바와 아들 가르궁린(중국 기록에는 륜궁런(論弓仁)으로 알려짐)은 당나라로 망명하여 항복했다. 다른 형제들인 가르타구와 가르브론의 행적은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치둑송첸의 숙청 과정에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물 | 관계 | 최후 |
---|---|---|
가르통첸 | 아버지 | (이전 시대 활동) |
가르 첸예 돔푸 | 형 | 685년, 권력 다툼 중 사망 |
가르친링 | 본인 | 699년, 치둑송첸의 숙청 과정에서 자결 |
가르첸바 | 동생 | 699년 이후, 당나라 망명 |
가르타구 | 동생 | 불명 (숙청 추정) |
가르브론 | 동생 | 불명 (숙청 추정) |
가르궁린 (륜궁런) | 아들 | 699년 이후, 당나라 망명 |
가르 가문의 인물 중에서는 가르니살(論彌薩)이 살아남았다. 그는 외교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치두쏭찬의 총애를 받은 덕분으로 여겨진다. 가르친링이 죽은 후, 당과 토번의 관계는 다시 당나라가 우위를 점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가르친링의 아들인 가르궁린은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토번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명장으로 활약했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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