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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궁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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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르궁린은 토번 출신의 인물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무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명장 집안에서 태어나 무예에 능했고, 토번과 당나라의 전쟁에서 가문의 일원들과 함께 활약했다. 가르 가문이 몰락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번 전쟁, 돌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삭방절도부대사까지 올랐다. 그는 굳센 갑옷과 날카로운 칼날로 용맹한 군대를 이끌며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723년 사망 후 발천군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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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궁린
기본 정보
몽골 제국의 지도
몽골 제국의 지도
한국어 이름논궁인
중국어 이름論弓仁 (Lùn Gōngrén)
티베트어 이름མགར་མང་བུ་རྗེ (mgar mang bu rje)
직책대상
활동 시기7세기
출생지토욕혼
민족선비족
종교불교
가족아버지: 논리염포
아들: 논흠릉
생애
주요 활동토번의 대신
초기 생애토욕혼에서 태어남
토번 합류토욕혼 멸망 후 토번에 투항, 토번의 대신이 됨.
정치적 활동토번의 국론을 결정하는 데 참여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강경론을 주장
가르친링 사후 권력 다툼에서 패배
가계
아버지논리염포
아들논흠릉
기타 정보
주요 공적토번의 국론 결정에 참여,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강경론 주장

2. 성장 배경

가르궁린은 토번의 명장 가르 팅린첸주(가르친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토번의 귕롱첸포(대재상) 중 한 명이었으며,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패배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토번의 찬보(贊普, 왕)였던 티두송(치둑송첸, ཁྲི་ལྡེ་གཙུག་བརྟན།|치데축첸bo)은 가르 팅린첸주의 높은 명성과 권력을 경계하여 698년 그를 죽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르궁린은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군사적 능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토번중국 당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는 전쟁에서의 능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했다. 그는 활쏘기, 검술, 승마 등 무예와 전법에 능숙했으며,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쌓고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토번은 대비천 전투(670년)와 승풍령 전투(678년) 등에서 승리하며 과거 당나라의 영토였던 서역의 안서 4진을 점령하고 있었다. 695년에는 이를 되찾으려는 당나라 왕효걸이 18만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공격했으나, 아버지 가르친링과 가르첸바, 가르다고리 등 가르 일가가 방어에 나서 소라한산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비록 가르첸바는 당나라 대군에 패하기도 했으나, 가르친링의 뛰어난 전술로 왕효걸은 결국 물러났다.

아버지 가르 팅린첸주가 698년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당하자, 가르궁린은 이듬해인 699년 토욕혼 부족 7,000 장(帳)을 이끌고 중국 무주(측천무후 시대의 당나라)로 망명했다. 그는 토욕혼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를 따라 1,400 장이 추가로 당나라에 투항했다. 망명 후 가르궁린은 좌옥검위 장군에 임명되었고, 주천군공에 봉해졌으며 식읍 2,000호를 받았다.

3. 가르 가문의 몰락과 당나라 망명

토번의 찬보(贊普) 치둑송첸(赤德松贊)은 695년 당나라의 왕효걸이 이끄는 18만 대군을 격파한 소라한산 전투 이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르 가문의 커져가는 세력에 위협을 느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가르친링 (가르 팅린첸주)을 비롯한 가르 가문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르 가문과 함께 재상직을 맡았던 퇸미삼보따(吞米桑布扎)의 퇸미 가문 역시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아버지 가르 팅린첸주가 698년에 티두송 (치둑송첸)에게 모살되었다고도 하나[2], 보다 구체적인 기록에 따르면 699년, 토번 내부의 권력 투쟁과 분열을 우려한 가르친링은 동생 가르다고리와 함께 칭하이호 부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아버지 가르친링은 죽기 전, 아들 가르궁린에게 당나라로 망명할 것을 지시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르궁린은 삼촌(가르친링의 동생) 가르첸바 (喝(爾)贊婆)와 함께 토욕혼 부족 7천여 명을 이끌고 699년 당나라(당시 무주)로 망명하여 항복했다. 가르궁린은 토욕혼 부족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를 따라 1천 4백여 명의 토욕혼 부족이 추가로 당나라에 귀순했다. 망명길에 오르면서 가르궁린은 두고 온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담아 다음과 같은 비가(悲歌)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부인은 비록 고개를 넘는다 마는


사랑하는 아들들은 모두 어디있느냐?


할머니는 서 계실 수 없을 정도로 늙으셨는데


일세의 영웅인 아버지(가르친링)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가르궁린의 망명으로 토번 내 가르 가문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4. 당나라에서의 활약

토번에서의 정치적 격변 이후 동생 가르첸바와 함께 당나라로 귀순한 가르궁린은 토번의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는 점 때문에 측천무후를 비롯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중용되었다. 그는 당번 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토번 군대를 설득하여 당나라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도 했으며, 돌궐과의 전쟁에서도 활약하며 공을 세웠다.

특히 개원 연간 초기에 돌궐 내부에서 토쿠즈 오구즈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가르궁린은 소수의 병력으로 큰 전과를 올려 그 용맹함을 떨쳤다. 중국 측 기록은 당시 상황을 "적과 아군의 수가 배나 차이 났지만, 공(가르궁린)은 소를 죽여 목책을 만들고 적을 잡아 식량으로 삼았다. 이틀 밤낮을 결전하여 두터운 포위를 뚫고, 군대를 이어 추격하며 천 리를 싸웠다… 삭방의 여러 군대가 그의 싸움을 장하게 여겼다"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 평가받았으며,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엄정한 군율을 유지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707년 삭방군전봉발혁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720년에는 삭방절도부대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4. 1. 측천무후 시기

아버지 가르 팅린첸주는 토번의 대재상(귕롱첸포)이자 대당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명장이었으나, 698년 토번의 왕 티두송으로부터 명성과 권세가 지나치다는 미움을 받아 모살되었다.

699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가르궁린은 동생 가르첸바와 함께 자신들을 따르는 1천여 명의 무리와 토욕혼의 7천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당시 측천무후가 통치하던 무주로 망명하였다. 가르궁린은 토욕혼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의 망명 소식을 듣고 추가로 1,400여 명의 토욕혼 사람들이 에 귀순하기도 했다.

측천무후는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여 크게 환대하였다. 동생 가르첸바에게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귀덕군왕(歸德郡王)의 칭호를 주었고, 가르궁린에게는 좌우림대장군(左羽林大將軍), 안국공(安國公)의 칭호와 함께 식읍 2천 호를 하사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좌옥검위 장군, 주천군공에 봉해졌다고도 한다.) 또한 측천무후는 가르친링, 가르첸바, 가르궁린 세 형제에게 '논(論)'이라는 성씨를 내려주었다.

이후 가르첸바가 사망하자 안서대도호(安西大都護)의 칭호가 추증되었다. (사망 및 추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4. 2. 중종, 현종 시기

아버지 가르 팅린첸주가 토번의 첸포() 티두송에게 698년 모살당하자, 가르궁린은 형 가르첸바와 함께 699년 토욕혼 7천여 명을 이끌고 무주(측천무후 통치기)로 망명했다.[1][2] 당시 당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측천무후는 이들을 환대하여 가르궁린에게 우우림대장군, 안국공(左羽林大將軍, 安國公)의 칭호와 식읍 2천 호를 주고 '논(論)' 씨를 하사했다.[1] 또한 좌옥검위 장군, 주천군공에도 봉해졌다.[2]

가르궁린은 토번의 내부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중용되었다. 그는 당번 전쟁에서 최전선에 나아가 토번군을 설득하여 당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1] 중종 시기인 707년에는 삭방군전봉발혁사(朔方軍前鋒游奕使)에 임명되었고,[1][2] 708년에는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이 되었다.[1][2] 이때 장인원이 북방 방어를 위해 3곳의 수항성(受降城)을 축조하자, 가르궁린은 낙진수(駱駝水)와 초심산(草心山)에 주둔하며 방어를 담당했다.[2]

현종 시기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714년, 돌궐의 토쿠즈 오구즈(구성)가 당에 반란을 일으키자, 가르궁린은 군대를 이끌고 고비 사막을 건너 화발부(火拔部) 유다진(幽多眞)의 부락을 항복시켰다.[2] 또한 첩사태(疊思太)가 난을 일으켜 적류간(赤柳澗)에서 싸울 때, 그는 단 500기의 기병으로 수많은 적에게 포위되었으나 침착하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용맹함을 보였다.[2] 개원 연간 초기에는 돌궐 내부에서 토쿠즈 오구즈의 난이 일어나자, 원정에 나서 단 5백 명의 군사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 사서는 "적과 아군의 수가 배나 차이 났지만, 공(가르궁린)은 소를 죽여 목책을 만들고 적을 잡아 식량으로 삼았다. 이틀 밤낮을 결전하여 두터운 포위를 뚫고, 군대를 이어 추격하며 천 리를 싸웠다… 삭방의 여러 군대가 그의 싸움을 장하게 여겼다(眾寡成倍,公殺牛為壘,啖寇為餉。決命再宿,沖潰重圍,連兵躡踵,千里轉戰……朔方諸軍,壯其戰矣)"라고 기록하며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1]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전해지며,[2] 군사 지휘 능력 또한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이 군사를 다스림에 갑옷을 견고히 하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며, 용맹한 자들을 짝지어 힘과 믿음을 가지런히 하고, 상벌과 고락을 나누니, 여섯 필의 말이 손바닥 안과 같고 천 명의 병사가 한마음이 되었다. 오랑캐를 모기나 등에처럼 대하고, 사막에 누워 자기를 잠자리처럼 여기며, 이슬을 맞고 자고 먹기를 거의 20년 동안 하였다(公之理兵也,堅三革,利五刃,偶拳勇,齊力信,罰分甘苦,六轡如手掌,千夫一心,接獯獫猶蚊蚋,臥沙塞如衽席,荐居露食垂二十年)"[1], "비가 그치면 군대를 이루고 얼음이 녹으면 병사를 쉬게 했다(雨畢而成師,冰泮而休卒)", "찬 기운이 살과 뼈에 스며들고 밤서리가 머리카락과 수염에 내렸으나,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지만 공은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寒氣入于肌骨,夜霜出于發鬢,人不堪其勒,公不改其節)"[1]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의 지위는 계속 높아져 717년에는 귀덕주도독사(歸德州都督使), 720년에는 좌효위대장군의 지위로 삭방절도부대사(朔方節度副大使)에 임명되었다.[1][2] 그러나 오랜 전투로 인한 부상과 노고가 쌓여 병을 얻었다.[2] 현종은 직접 의사를 보내 그의 병세를 살피게 할 정도로 그를 아꼈으나,[2] 결국 723년 세상을 떠났다. 사후 발천군왕(撥川郡王)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忠)을 받았다.[2]

그의 손자로는 논유정이 있다.[2]

'''가르궁린 주요 경력'''
연도직위/사건비고
699년토욕혼 7천 명 인솔, 무주 망명부친 가르 팅린첸주 피살 후
699년우우림대장군, 안국공, 좌옥검위 장군, 주천군공측천무후로부터 임명/봉작
707년삭방군전봉발혁사(朔方軍前鋒游奕使)중종 시기
708년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수항성 방어 담당
714년돌궐 토쿠즈 오구즈 반란 진압 참여현종 시기
개원토쿠즈 오구즈 난 진압 (5백 군사로 성과)
717년귀덕주도독사(歸德州都督使)
720년삭방절도부대사(朔方節度副大使)좌효위대장군 겸임
723년사망발천군왕 추증, 시호


5. 죽음

가르궁린은 측천무후, 중종,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쌓인 피로와 힘든 삶으로 인해 큰 병을 얻게 되었다. 특히 여러 전투에서 입은 부상과 계속된 노고로 발진까지 생겼다고 전해진다. 현종은 그의 병세를 걱정하여 직접 의사를 파견해 진찰하게 했고, 특별히 태의(太醫)를 보내 돌보게 하였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개원 11년(723년) 4월 5일, 향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현종은 그의 공을 기려 발천군왕(撥川郡王)으로 추존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안 남교에 묻혔다.

6. 가족 관계

아버지는 토번의 대재상이었던 가르 팅린첸주이다. 아버지 가르 팅린첸주는 대당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명장이었으나, 토번의 왕 티두송에게 698년 모살되었다.

손자로는 논유정이 있었다.

참조

[1] 문서 주로 7세기~846년으로 여겨지나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쯤부터 발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티베트를 통일한 토번은 송첸캄포 때부터이므로 640년경부터라고 여긴다.
[2] 문서 당시 토번은 권력의 중심이 첸포(치둑송첸)로, 가르친링의 군세로 이길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된다면 토번의 중심인 첸포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왕권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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