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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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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룡운은 1942년 북한에서 태어난 축구 선수로, 포워드 포지션에서 로동자체육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6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40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훈련을 받았다. 월드컵 본선에서 소련과의 경기에 출전했으나 부상으로 이후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북한 대표팀은 이탈리아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8강에 진출했다. 그는 1966년 월드컵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체육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02년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당시에는 사망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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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룡운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인 정보
이름강룡운
로마자 표기Gang Yong-un
출생일1942년 4월 25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한국
사망일2002년 이전
포지션공격수
클럽 경력
소속 클럽로동자체육단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대표 출전 횟수39+

2. 선수 경력

강룡운은 1942년 4월 25일,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다.[2] 포워드 선수였으며, 로동자체육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2] 선수 시절, 그의 키는 167cm로 알려져 있다.[2]

1957년, 196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재조직되었다.[3] 1962년경, 강룡운은 25만 명 이상으로 알려진 북한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 4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국가대표팀 후보로 고려되었다.[4][5] 40명의 선수들은 대령이자 감독인 명례현의 지휘 아래 군 장교로 입대하여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 이후 4년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3][4] 강룡운과 다른 선수들은 매일 오전 6시에 시작하여 하루 두 번 훈련을 받았으며, 미혼, 금연, 금주, (마지막 6개월 동안) 오후 10시 취침 등 다른 제약도 받았다.[4]

1965년 초, 북한 리그는 월드컵 출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중단되었다.[4] 강룡운과 나머지 선수들은 북베트남,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와의 국제 경기를 통해 경험을 쌓았다.[5] 그 해 GANEFO에 참가하여 결승전에서 중국을 3-1로 이기면서 무패를 기록했다.[5] 1965년 후반, 그들은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유일한 예선 통과 팀이 되었다.[6]

강룡운은 결국 월드컵 팀의 22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7][8] 월드컵 당시, 그는 ''이브닝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국가대표팀에서 38번 출전했다.[4]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팀은 4조에 속해 소련, 칠레, 이탈리아와 함께 잉글랜드 미들즈브러의 에어섬 파크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9]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예상되었던 팀은 첫 경기에서 소련에게 3-0으로 패했고, 칠레와 1-1로 비겼다.[9] 강룡운은 소련과의 경기에서 90분 동안 모두 출전했지만 다리 부상을 입어 이후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10][11] 칠레와의 경기 후, 팀은 다음 라운드 진출 팀을 결정하기 위해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던 이탈리아와 경기를 치렀다.[12] 엄청난 이변으로, 북한은 박두익의 골로 1-0으로 승리했다.[9][12] 팀은 결국 8강전에서 포르투갈에게 5-3으로 패했다.[9] 강룡운은 월드컵에서 한 경기에 출전하여 90분을 소화했다.[7]

2. 1. 초기 경력

강룡운은 1942년 4월 25일,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다.[2] 포워드 선수였으며, 로동자체육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2] 선수 시절, 그의 키는 167cm로 알려져 있다.[2]

2. 2. 국가대표 경력

1962년경, 강룡운은 25만 명 이상으로 알려진 북한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 4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후보로 고려되었다.[4][5] 40명의 선수들은 대령이자 감독인 명례현의 지휘 아래 군 장교로 입대하여 이후 4년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3][4] 강룡운과 다른 선수들은 매일 오전 6시에 시작하여 하루 두 번 훈련을 받았으며, 미혼, 금연, 금주, (마지막 6개월 동안) 오후 10시 취침 등 다른 제약도 받았다.[4]

1965년 초, 북한 리그는 1966년 FIFA 월드컵 출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중단되었다.[4] 강룡운과 나머지 선수들은 북베트남,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와의 국제 경기를 통해 경험을 쌓았다.[5] 그 해 GANEFO에 참가하여 결승전에서 중국을 3-1로 이기면서 무패를 기록했다.[5] 1965년 후반, 그들은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유일한 예선 통과 팀이 되었다.[6]

==== 1966년 FIFA 월드컵 ====

강룡운은 1966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7][8] 당시 국가대표팀에서 38경기 출전 기록을 보유했다.[4] 4조 조별 리그 1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90분 풀타임을 소화했으나,[10] 다리 부상으로 이후 경기에 불참했다.[1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를 상대로 박두익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8강에 진출했다.[9][12] 8강전에서 포르투갈에 5-3으로 패했다.[9] 강룡운은 이 월드컵에서 한 경기에 출전하여 90분을 소화했다.[7]

2. 2. 1. 1966년 FIFA 월드컵

강룡운은 1966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7][8] 당시 국가대표팀에서 38경기 출전 기록을 보유했다.[4] 4조 조별 리그 1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90분 풀타임을 소화했으나,[10] 다리 부상으로 이후 경기에 불참했다.[1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를 상대로 박두익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8강에 진출했다.[9][12] 8강전에서 포르투갈에 5-3으로 패했다.[9] 강룡운은 이 월드컵에서 한 경기에 출전하여 90분을 소화했다.[7]

3. 은퇴 이후

강룡운은 1966년 FIFA 월드컵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체육인 칭호를 수여받았다.[13] 월드컵 이후, 북한 대표팀이 이탈리아와의 승리를 술집에서 자축하다가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2002년 인터뷰에서 여러 선수들이 이를 부인했다.[14][15] 2002년 다큐멘터리 영화 ''그들이 알던 세상'' 제작 당시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13][16]

참조

[1] 웹사이트 World Cup 1966 national squads http://www.linguaspo[...] 2018-10-26
[2] 웹사이트 Ryong-Woon Kang (Player) https://www.national[...]
[3] 뉴스 England are hosts to the elite https://www.newspape[...] 1966-01-06
[4] 뉴스 No squad better prepared than North Korea https://www.newspape[...] 1966-05-21
[5] 뉴스 Wizard dribbler with strong shot https://www.newspape[...] 1966-06-23
[6] 뉴스 Han Bong Jin–he dribbles like Garrincha, shoots like Charlton https://www.newspape[...] 1966-07-08
[7] 웹사이트 Kang Ryong-woon Stats https://fbref.com/en[...]
[8] 뉴스 Meet The Twenty-Two Football Wizards From Pyongyang https://www.newspape[...] 1966-05-08
[9] 웹사이트 When Middlesbrough hosted the 1966 World Cup Koreans http://news.bbc.co.u[...] BBC 2010-06-15
[10] 웹사이트 Kang Ryoung-woon 1966 Match Logs https://fbref.com/en[...]
[11] 뉴스 Chile Aim To Put Korea In Cold https://www.newspape[...] 1966-07-15
[12] 뉴스 North Korea in town to relive game of their lives https://www.theguard[...] 2002-10-18
[13] 뉴스 수용소에서 만난 축구영웅 https://www.chosun.c[...] 2001-03-04
[14] 뉴스 Korea boys of '66 are alive and kicking https://www.independ[...] 2001-11-12
[15] 뉴스 1966 World Cup Upstarts Absent but Not Forgotten https://www.latimes.[...] 2002-06-22
[16] 뉴스 북한 월드컵 8강주역들 영국 방문 http://nk.chosun.com[...] 200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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