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대도호부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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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 유적이다.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동원경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한 기록이 있으며,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1994년 강릉시청사 신축 과정에서 건물지 및 유물이 발견되어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부터 복원 사업을 통해 전대청 등 주요 건물과 부속 시설이 복원되었다. 현재는 객사, 동헌, 칠사당 등 관청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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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관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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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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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강릉대도호부 관아 |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388 |
지정일 | 1994년 7월 11일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
시대 | 고려시대 |
소유자 | 강릉시 |
면적 | 18,951m² |
2. 역사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강릉에 머물 때 사용했던 관아 건물터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처음 세워졌으며[3], 당시에는 83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고려 시대 건축물 중 드물게 남아있는 객사문(국보 제51호)만이 현존하며, 이 문에는 공민왕이 쓴 '임영관(臨瀛館)' 현판이 걸려 있다.
임영관은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으나, 일제강점기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었다.[3] 1993년 강릉시청 신청사 건립 부지에서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및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터와 유물이 확인되면서 역사적 중요성이 재조명되었다.[3] 이를 계기로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 강릉 임영관지로 지정되었다.[3]
이후 2000년부터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2006년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서헌 등 주요 건물이 복원되었다.[3] 현재 임영관지는 객사문, 칠사당과 더불어 강릉 지역 관아 건축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3]
2. 1. 고려 시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 관리들이 강릉에 파견되었을 때 머물던 관아 건물의 터이다.[3] 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에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으로 삼고 임영관(臨瀛館)을 처음 세웠다고 한다.[3] 창건 당시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3]현재 남아있는 건물 중 객사문(국보 제51호)은 고려 시대 건축물 가운데 드물게 현존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문에는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 강릉시청 신청사 건립 계획에 따라 부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친 관아 건물터 하부 구조와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3] 이를 통해 이곳이 고려 시대부터 중요한 관청 건물 자리였음이 확인되었으며, 관아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3] 임영관 터는 객사문 및 조선 시대 부사가 업무를 보던 칠사당(七事堂)과 더불어 강릉 관청 건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3]
2. 2. 조선 시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조선 시대 기록인 『임영지』 등에 따르면, 임영관은 태조 19년(936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에는 83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객사의 정문인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 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건물 중 하나로,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臨瀛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는 조선 시대에도 지방으로 출장 온 중앙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3] 임영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3]
1993년 강릉시청 신청사 건립 계획에 따라 부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친 관아 성격의 건물터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건물 하부 구조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3] 이 유적은 조선 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그 중요성이 확인되었으며,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000년부터는 전통문화도시 도심관아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지 내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등 4개 동의 건물과 석축, 담장 등의 복원이 추진되어 2006년에 완료되었다.[3] 현재 임영관지는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보았던 칠사당과 함께 강릉 지역 관청 건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2. 3.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일제강점기에 강릉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임영관은 철거되었다.[3]이후 강릉시청사 신축을 위해 수목 채굴과 구 강릉경찰서 지하 구조물 철거 과정에서 임영관 건물지와 조선 시대·고려 시대의 건물 하부 구조,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3] 2000년부터는 전통문화도시 도심관아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지 내 전대청(殿大廳)·중대청(中大廳)·동대청(東大廳)·서헌(西軒)의 4개 동 건물을 비롯한 석축, 담장 등의 복원을 추진하여 2006년에 완료하였다.[3]
임영관지는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살폈던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강릉의 관청 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3. 명칭 변경 과정
강릉 임영관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객사(客舍)인 '임영관'의 유구가 확인되어, 1994년 7월 '강릉임영관지'라는 이름으로 처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5년 9월에는 주변의 관아 터가 추가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객사 건물이 복원되었다. 이에 따라 2011년에는 지정 명칭이 '강릉 임영관'으로 변경되었다.
현재 지정 구역 내에는 객사를 비롯하여 지방관의 집무처였던 동헌(東軒)과 아문의 문루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관청 건물인 칠사당(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호) 등도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강릉 임영관'이라는 명칭은 객사 영역만을 가리키는 한계가 있어 명칭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강릉이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 대부분 기간 동안 '강릉대도호부'로 불렸다는 점과, '관아'라는 용어가 객사, 동헌 등 읍치 공간 전체를 아우른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
다만, 복원된 강릉대도호부 동헌이 실제 동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
4. 주요 건물 및 유구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거나 지방관이 집무하던 관청 건물터이다.[1] 1993년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중요한 관아 건물터 유구가 확인되었으며,[1] 이후 복원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3]
주요 건물 및 유구는 다음과 같다.
- '''임영관(客舍)''':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건물이다. 현재는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강릉 임영관 삼문이 남아 있으며, 전대청, 중대청 등 주요 건물들이 복원되었다.[1][3]
- '''동헌(東軒)''': 지방관이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현재 복원되어 있다.[1] 다만, 복원된 건물의 정확한 모습에 대해서는 일부 이견이 존재한다.[2]
- '''칠사당(七事堂)''': 조선 시대 부사(府使)가 행정 업무를 보던 건물로,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1][3]
- '''기타 유구''': 객사, 동헌 외에도 아문의 누각인 운루 등이 함께 복원되어 있다.[1]
이 유적은 처음 '강릉임영관지'라는 명칭으로 사적에 지정되었으나, 이후 객사 건물 복원과 주변 관아지 추가 지정 등을 거쳐 '강릉 임영관'으로 변경되었다. 최종적으로는 객사뿐 아니라 동헌 등 관아 전체 영역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1] 이곳의 유구들은 강릉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고려 및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3]
4. 1. 임영관 (객사)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왔을 때 머물던 건물의 터이다.조선 시대의 기록인 『임영지』(臨瀛誌)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처음 세웠다고 한다.[3] 당시 건물은 83칸에 달하는 규모였으나, 현재는 객사 정문인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이 객사문은 고려 시대 건축물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며,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臨瀛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창건 당시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고,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강릉 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3]
1993년, 강릉시청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친 관아 성격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이는 관아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조선 시대 및 고려 시대의 건물 하부 구조와 함께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3]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4년 7월 11일, '강릉임영관지(江陵臨瀛館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1][3]
2000년부터 전통문화도시 도심 관아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 복원이 추진되었다.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등 4개 동의 건물을 비롯하여 석축과 담장 등이 복원되어 2006년에 완료되었다.[3] 2005년 9월에는 주변의 관아지가 사적 구역에 추가로 지정되었고, 객사 건물이 복원되면서 2011년에는 지정 명칭이 '강릉 임영관(江陵 臨瀛館)'으로 변경되었다.[1]
현재 지정 구역 내에는 복원된 객사 건물을 비롯하여 지방관의 집무처였던 동헌(東軒)과 아문의 누각 등이 함께 복원되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호)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임영관(객사) 외에도 동헌 등 여러 관아 시설이 포함되면서, 객사 영역만을 지칭하는 '강릉 임영관'이라는 명칭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강릉이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강릉대도호부'로 불렸다는 점과 '관아'가 객사, 동헌 등 읍치 공간 전체를 아우른다는 점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1]
임영관은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보던 칠사당과 더불어 강릉의 옛 관청 건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3] 다만, 현재 복원된 동헌 건물이 실제 동헌의 모습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2]
4. 2. 동헌
현재 지정구역 내에는 객사를 비롯하여 지방관의 집무처인 동헌(東軒)과 아문의 운루 등이 복원되어 있다.[1]다만, 복원된 동헌이 실제 동헌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
4. 3. 칠사당
강릉대도호부 관아 내에 자리 잡고 있는 관청 건물 중 하나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1] 과거 부사(府使)가 실제 업무를 처리하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3] 칠사당은 임영관의 객사문과 함께 당시 강릉 관청 건물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4. 4. 기타 유구
현재 지정구역 내에는 객사, 동헌 외에도 아문의 운루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관청 건물인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등이 자리하고 있다.[1]4. 5. 복원된 동헌의 진위 여부
다만, 복원된 강릉대도호부 관아의 동헌이 실제 동헌이었는지에 대해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5. 의의 및 활용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인 『임영지』와 "강릉부 읍지"(江陵府 邑誌)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창건 당시에는 83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으며 정확한 초기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다. 현재는 객사의 정문인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이 객사문은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축물 중 하나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臨瀛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본래의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에 강릉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철거되었다.[3] 이후 1993년, 강릉시청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계획에 따라 부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던 중, 구 강릉경찰서 지하 구조물 철거 과정에서 임영관 건물터를 비롯한 조선시대 및 고려시대의 건물 하부 구조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3] 이를 통해 이곳이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시기 동안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자리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 '강릉 임영관지'로 지정되었다.[3]
임영관지는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과 함께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살폈던 칠사당과 함께 강릉의 관청 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정부는 2000년부터 전통문화도시 도심관아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지 내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등 4개 동의 건물과 석축, 담장 등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2006년에 완료하였다.[3]
참조
[1]
간행물
강릉 임영관 지정명칭 변경 고시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8397호
2014-11-27
[2]
웹인용
"<기사> 바로잡아야 할 것 <1> 어 강릉에 '동헌'이 둘이네"
https://www.kado.net[...]
2019-10-02
[3]
문서
현지 '강릉 임영관지' 안내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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