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한
1. 개요
견한은 전한 시대와 신나라 시대의 관리로, 왕망의 측근이었다. 시중, 봉거도위, 광록훈 등을 역임했으며, 종묘를 보전한 공로로 승양후에 봉해졌다. 왕망의 아들 왕우가 평제의 외가를 장안으로 불러들이려 한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처형했으며, 김흠이 김일제의 공적을 기리며 조상들을 종묘에 모시려 하자 이를 불경죄로 규탄하기도 했다. 이후 태보 겸 후승, 대장군을 거쳐 신나라 건국 후 대사마가 되었으며, 승신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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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 견씨 -
문소황후
문소황후는 후한 말기 조위의 인물로 조비의 황후이자 조예의 생모이며, 원희와 혼인했으나 조비의 아내가 되어 총애를 받았지만 소외되어 자결했고, 사후 조예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으며, 뛰어난 미모와 덕행, 조식과의 로맨스 설화로도 유명하다. -
중산 견씨 -
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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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우장군 -
장안세
장안세는 전한 시대 장탕의 임자로 관직에 올라 무제, 소제, 선제를 섬기며 곽광의 신임을 받아 부평후에 봉해지고 사후 경이라는 시호를 받은 관료이다. -
전한의 우장군 -
마궁 (전한)
마궁은 전한 말기 관료로, 《엄씨춘추》를 익혀 여러 관직을 거쳐 광록훈, 우장군, 대사도 등을 역임했으며, 부태후 시호 결정에 참여했다가 왕망 집권 후 사죄하고 물러났으며, 신나라 건국 후에는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가 사망하여, 그의 생애는 기술 발전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
신나라의 공작 -
손건 (신)
손건은 전한과 신나라 시대에 활동하며 서역도호로서 오손의 비원치를 죽이고 적의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신나라 건국 후 성신공에 봉해져 흉노를 공격하다 천봉 2년에 사망했다. -
신나라의 공작 -
견풍
견풍은 전한 시대 여러 관직을 거쳐 왕망의 측근으로 부상하여 신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나, 혼란 속에서 몰락해 자결한 인물로, 왕망의 개혁을 옹호했으나 측근 정치로 신나라 몰락을 가속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시중봉거도위·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2년(2년)에 우장군을 겸하였고, 종묘를 보전한 공로로 같은해 3월에 승양후(承陽侯)에 봉해졌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견한은 모의에 연루된 자들을 죽였다. 같은해에 경조윤 김흠이 자신의 증조부 김일제의 공적을 찬미하며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를 종묘에 세울 것을 상주하자, 견한은 이를 불경죄로 규탄하였다. 김흠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견한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로로 식읍 1,000호를 더 받았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보 겸 후승(後丞)이 되어 유자 영을 보필하였다. 이듬해 9월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대장군을 겸하여 패상(霸上)에 주둔하였고, 반란에 호응하여 괴리(槐里)에서 봉기한 조명(趙明)·곽홍(霍鴻)을 왕안·왕읍과 함께 진압하였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건국되었다. 견한은 승신공(承新公)에 봉해지고 대사마가 되었으며, 3년 후 죽었다.
2.1. 전한 시기 활동
시중봉거도위·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2년(2년)에 우장군을 겸하였고, 종묘를 보전한 공로로 같은해 3월에 증양후(承陽侯)에 봉해졌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견한은 모의에 연루된 자들을 죽였다. 같은해에 경조윤 김흠이 자신의 증조부 김일제의 공적을 찬미하며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를 종묘에 세울 것을 상주하자, 견한은 이를 불경죄로 규탄하였다. 김흠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견한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로로 식읍 1,000호를 더 받았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보 겸 후승(後丞)이 되어 유자 영을 보필하였다. 이듬해 9월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대장군을 겸하여 패상(霸上)에 주둔하였고, 반란에 호응하여 괴리(槐里)에서 봉기한 조명(趙明)·곽홍(霍鴻)을 왕안·왕읍과 함께 진압하였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건국되자 견한은 승신공(承新公)에 봉해지고 대사마가 되었으며, 3년 후 죽었다.
2.2. 신나라 시기 활동
시중봉거도위·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2년(2년)에 우장군을 겸하였고, 종묘를 보전한 공로로 같은해 3월에 증양후(承陽侯)에 봉해졌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견한은 모의에 연루된 자들을 죽였다. 같은해에 경조윤 김흠이 자신의 증조부 김일제의 공적을 찬미하며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를 종묘에 세울 것을 상주하자, 견한은 이를 불경죄로 규탄하였다. 김흠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견한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로로 식읍 1,000호를 더 받았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보(太保) 겸 후승(後丞)이 되어 유자 영을 보필하였다. 이듬해 9월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대장군을 겸하여 패상(霸上)에 주둔하였고, 반란에 호응하여 괴리(槐里)에서 봉기한 조명(趙明)·곽홍(霍鴻)을 왕안·왕읍과 함께 진압하였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건국되었다. 견한은 승신공(承新公)에 봉해지고 대사마가 되었으며, 3년 후 죽었다.
왕망의 복심·막료 중 한 명이다. 동성인 견풍과 함께 왕망에게 다양한 헌책을 하여 신의 창건에 공헌한 정치가이다.
원시 원년 (1년), 시중 겸 봉거도위에서 광록훈으로 옮겨졌다.
3. 평가
3.1. 비판적 시각
4. 관직
견한은 전한 시대와 신나라 시대의 관리이다. 시중봉거도위·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2년(2년)에 우장군을 겸하였고, 종묘를 보전한 공로로 같은해 3월에 증양후(承陽侯)에 봉해졌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견한은 모의에 연루된 자들을 죽였다. 같은해에 경조윤 김흠이 자신의 증조부 김일제의 공적을 찬미하며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를 종묘에 세울 것을 상주하자, 견한은 이를 불경죄로 규탄하였다. 김흠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견한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로로 식읍 1,000호를 더 받았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보(太保) 겸 후승(後丞)이 되어 유자 영을 보필하였다. 이듬해 9월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대장군을 겸하여 패상(霸上)에 주둔하였고, 반란에 호응하여 괴리(槐里)에서 봉기한 조명(趙明)·곽홍(霍鴻)을 왕안·왕읍과 함께 진압하였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건국되었다. 견한은 승신공(承新公)에 봉해지고 대사마가 되었으며, 3년 후 죽었다.
5. 작위
견한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시중봉거도위·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2년(2년)에 우장군을 겸하였고, 종묘를 보전한 공로로 증양후(承陽侯)에 봉해졌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견한은 모의에 연루된 자들을 죽였다. 같은해에 경조윤 김흠이 자신의 증조부 김일제의 공적을 찬미하며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를 종묘에 세울 것을 상주하자, 견한은 이를 불경죄로 규탄하였다. 김흠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견한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로로 식읍 1,000호를 더 받았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보(太保) 겸 후승(後丞)이 되어 유자 영을 보필하였다. 이듬해 9월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대장군을 겸하여 패상(霸上)에 주둔하였고, 반란에 호응하여 괴리(槐里)에서 봉기한 조명(趙明)·곽홍(霍鴻)을 왕안·왕읍과 함께 진압하였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가 건국되자 견한은 승신공(承新公)에 봉해지고 대사마가 되었으며, 3년 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