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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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풍은 전한 시대와 신나라 시대의 인물로, 왕망을 보좌하며 벼슬을 지냈다. 경조도위, 좌장군, 사공 등을 역임했으며, 신나라 건국 후에는 광신공에 봉해졌다. 아들 견심이 효평황후를 아내로 삼아야 한다는 부명을 올린 일로 인해 왕망의 미움을 사 자결했다.

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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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견풍은 전한 경조도위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원년(1년)에는 좌장군 겸 소부(少傅)가 되어 태부 왕망, 태사 공광, 태보 왕순과 함께 사보(四保)로 불렸다. 같은 해 2월 광양에 봉해졌고, 이듬해에는 대사공이 되었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아(太阿)·우불(右拂)을 겸임하고 유자 영을 보좌하였다. 시건국 원년(9년), 건국 후 광신공(廣新公)에 봉해지고 경시장군(更始將軍)에 임명되어 손건, 왕흥(王興), 왕성(王盛)과 함께 사장(四將)이 되었다. 그러나 견풍은 왕망의 측근들이 부명(符命)을 바쳐 출세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아들 견심이 황황실주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부명을 올리자 왕망의 분노를 사 자결하였다.

2.1. 전한 시기 활동

견풍은 경조도위를 시작으로 수형도위, 사수, 좌조중랑장을 거쳐 원수 2년(기원전 1년)에는 광록훈에 임명되었다.

원시 연간에 견풍은 왕망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왕우여관 사건, 적의의 반란을 처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2.1.1. 주요 관직 역임

경조도위, 수형도위, 사수, 좌조중랑장(左曹中郞將), 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원년(1년), 좌장군으로 전임되고 소부(少傅)를 겸임하여, 태부 왕망, 태사 공광, 태보 왕순과 함께 사보(四保)가 되었다. 종묘를 안정시킨 공적으로 같은 해 2월에 광양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사공이 되었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아(太阿)·우불(右拂)을 겸임하고 유자 영을 보좌하였다.

2.1.2. 왕망의 측근으로 부상

원시 원년(1년), 견풍은 좌장군으로 전임되고 소부(少傅)를 겸임하여, 태부 왕망, 태사(太師) 공광, 태보(太保) 왕순과 함께 사보(四保)가 되었다. 종묘를 안정시킨 공적으로 같은 해 2월에 광양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사공이 되었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 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다. 견풍은 왕망의 의중에 맞추어 정적 하무, 포선, 팽위(彭偉), 두공자(杜公子) 등 명사·호족 수백 명을 끌어들여 죽였다.

거섭 원년(6년) 3월, 견풍은 태아(太阿)·우불(右拂)을 겸임하고 유자 영을 보좌하였다. 이듬해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왕순과 함께 궁궐을 순찰하여 왕망을 호위하였다.

2.2. 신나라 건국과 몰락

시건국 원년(9년), 왕망은 신(新)을 건국함과 동시에 견풍을 광신공(廣新公)에 봉하고 경시장군(更始將軍)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견풍은 손건, 왕흥(王興), 왕성(王盛)과 함께 사장(四將)의 반열에 올랐으나, 떡 장수 출신인 왕성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견풍과 그의 아들 모덕후(茂徳侯) 견심(甄尋)은 이에 불만을 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시건국 2년(10년), 견심이 지어 올린 부명(符命)에 따라 견풍은 우백(右伯)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견풍이 우백에 정식으로 취임하기 직전, 견심이 또 다른 부명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왕망의 딸)가 견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왕망은 견심을 체포하려 했고, 견심은 도주, 견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평가

견풍은 경조도위, 수형도위, 사수, 좌조중랑장(左曹中郞將), 광록훈을 역임하였다.

원시 원년(1년), 좌장군으로 전임되고 소부(少傅)를 겸임하여 태부 왕망, 태사(太師) 공광, 태보(太保) 왕순과 함께 사보(四保)가 되었다. 종묘를 안정시킨 공적으로 같은 해 2월에 광양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사공이 되었다.

원시 3년(3년), 왕망의 아들 왕우가 오장, 여관과 함께 평제의 외가를 장안에 불러들이려다가 발각되었다. 견풍은 왕망의 의중에 맞추어 정적 하무, 포선, 팽위(彭偉), 두공자(杜公子) 등 명사·호족 수백 명을 끌어들여 죽였다.

거섭 원년(6년) 3월, 태아(太阿)·우불(右拂)을 겸임하고 유자 영을 보좌하였다. 이듬해에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왕순과 함께 궁궐을 순찰하여 왕망을 호위하였다.

3.1. 부정적 평가

견풍은 왕망을 오랫동안 보좌하였으나, 왕망이 섭정을 시작하고 제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측근들에게 밀려났다. 이에 불만을 품었고, 왕망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시건국 원년(9년), 신나라 건국 후 견풍은 광신공(廣新公)에 봉해지고 경시장군(更始將軍)에 임명되었다. 왕흥·손건·왕성(王盛)과 함께 사장(四將)의 일원이 되었으나, 왕성은 떡장수 출신으로 신분이 미천하여 견풍과 아들 견심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이듬해 견심이 주공·소공의 고사를 본받아 평안을 좌백(左伯)에, 견풍을 우백(右伯)에 임명해야 한다는 내용의 부명을 바치자 왕망은 이를 따랐다. 그러나 견풍이 취임하기 직전, 견심이 또 다른 부명을 바쳤는데, 그 내용은 옛 한나라 평제의 황후 황황실주가 견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온갖 부명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왕망은 대신들이 자신을 원망한다고 여겨 위엄을 보이고자 하였는데, 부명의 내용에 크게 분노하여 견심을 체포하려 하였다. 견심은 달아났고, 견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 가계

견풍(扃豊중국어)은 전한 말기 ~ 신나라의 관료로, 자는 자하(子夏)이며 우부풍 평릉현(平陵縣) 사람이다. 견존의 아들이다. 아버지 견존의 뒤를 이어 광양후(廣陽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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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풍의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견존
본인견풍
아들견구(扃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