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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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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록훈은 전한 시대에 낭중령을 개칭하여 설치된 관직으로, 황제의 측근에서 궁궐 수비와 경호를 담당했다. 전한 무제 때 기문과 우림이 추가되었고, 대부, 낭, 알자 등의 속관을 거느렸다. 후한 시대에도 광록훈은 유지되었으며, 오관중랑장, 좌중랑장, 우중랑장, 호분중랑장, 우림중랑장 등 다양한 부서로 구성되었다. 삼국 시대와 서진 시대에도 광록훈은 존재했다.

2. 전한

전한진나라의 낭중령을 계승하여 설치하였다. 무제태초 1년(기원전 104년)에 낭중령을 광록훈으로 개칭하였다.[1] 광록훈은 구경 중 하나로, 궁궐 옆문(액문) 수비를 담당했던 낭중령에서 유래했다.[1] 속관으로는 진나라 시대의 대부, 낭, 알자에 기문, 우림이 추가되었다.[1]

2. 1. 조직 구성

전한 무제 태초 1년(기원전 104년) 낭중령을 광록훈으로 개칭했다.[1] 부하 직원으로는 진나라 때의 대부, 낭, 알령에 기문, 우림을 더하였다.[1]

직책역할세부 직책 및 기타
대부(大夫)조정에서의 정책 건의 등을 관할태중대부, 간대부, 중대부가 있었으며, 정원은 따로 없고 많을 때는 수십 명이 있었다.
낭(郞)궁궐 문의 수위를 관할하고, 황제 순행 때는 거기(車騎)에 탔다.의랑, 중랑, 시랑, 낭중이 있었으며, 정원은 따로 없고 많게는 천여 명이 있었다.
알령(謁者)영빈(迎賓) 등을 관할정원은 70명이었다.
기문(期門)무제건원 3년(기원전 138년)에 설치한 호위병 총괄.정원은 따로 없으며, 많게는 천여 명이 있었다. 위상은 낭과 동격이었다. 평제 원시 1년(기원후 1년)에 호분랑(虎賁郞)으로 개칭되었다.
우림(羽林)무제태초 1년에 설치. 기문보다 하위이며 황제 경호 담당.처음에는 건장영기(建章營騎)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우림기로 개칭되었다. 종군했다가 전사한 자의 자손을 우림으로 양성해 5종류의 무기를 훈련시켰는데 이를 우림고아(羽林孤兒)라고 불렀다.


3. 신

사중이라고 하였다.

4. 후한

후한에서도 광록훈(光祿勳)이 설치되었다. 녹봉은 중 이천 석이었고, 승(丞) 1명(비 천 석)을 두었다. 낭관은 궁중을 수비하고 황제가 순행할 때는 수레와 기병에 동승했으며, 대부와 의랑은 고문과 응대를 관장하고 비상시가 아닐 때는 조령의 사자가 되었다.[1]

4. 1. 조직 구성

후한 때 광록훈의 부하 직원들은 다음과 같다. 낭관은 궁중을 관리하며 황제가 순행할 때 차에 탑승했고, 대부와 의랑은 고문(顧問)과 응대를 담당했다.[1]

직책세부 직책
오관중랑장오관중랑 - 오관시랑 - 오관낭중
좌중랑장중랑 - 시랑 - 낭중
우중랑장중랑 - 시랑 - 낭중
호분중랑장좌우복사 각 1인, 좌우폐장 각 1인, 호분중랑 - 호분시랑 - 호분낭중 - 절종호분
우림중랑장우림랑
우림좌감우림좌감승
우림우감우림우감승
봉차도위
부마도위
기도위
광록대부
태중대부
중산대부
동의대부
의랑
알자복사상시알자 - 급사알자, 관알자



이는 삼국 시대서진에서도 유지되었다.[1]

5. 삼국시대 및 서진

삼국 시대의 각국과 서진에서도 광록훈이 계속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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