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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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순옹주는 조선 성종과 숙용 심씨의 장녀로, 이름은 옥환이다. 의성위 남치원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남편 남치원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중종 대에 물의를 일으켜 작록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경순옹주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아들 남기가 1546년 정흥종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당하면서 제사가 중단되고, 자손들은 선원록에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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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옹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휘 | 옥환(玉hwan) |
작위 | 조선 성종의 옹주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482년 |
사망일 | 미상 |
가족 관계 | |
부친 | 성종 |
모친 | 숙용 심씨 |
배우자 | 의성위(宜城尉) 남치원(Nam Chi-won) |
자녀 | 1남 1녀 ----남기(Nam Gi) · 이항(Yi Hang)의 처 남씨 |
2. 생애
성종과 후궁 숙용 심씨 사이의 장녀로 태어나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남편 남치원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중종 대에 문제를 일으켜 유배되기도 했다.[1][2] 경순옹주 본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생애는 알기 어렵다. 사망 시기 역시 불분명하나, 아들 남기(南沂)가 1546년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될 당시[3]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4] 아들의 죽음 이후 가문은 몰락하여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도 삭제되었다.[5]
2. 1. 출생과 혼인
1482년(성종 13년) 성종과 후궁 숙용 심씨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옥환'''(玉環)이다.거창부원군 신승선의 외손자이자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의 조카인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남편 남치원은 풍류와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임숭재와 함께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중종 대에 이르러 여러 문제를 일으켰는데, 특히 헌부에서 내보낸 궁녀를 첩으로 삼은 일이 문제가 되었다.[1] 이에 헌부가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자 작위와 녹봉을 박탈당하고 가까운 지역으로 유배되었다.[2] 대신들이 더 강한 처벌을 주장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순옹주 본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들 남기(南沂)가 1546년(명종 1년) 정흥종의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는데[3], 당시 기록에 남기가 경순옹주의 제사를 지내왔다는 내용이 있어 1546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4]
아들 남기가 처형되면서 경순옹주의 제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고, 남기와 그의 자손들은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5]
2. 2. 남편 남치원의 비행
남편인 의성위 남치원(南致元)은 풍류와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임숭재와 더불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중종 대에 이르러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헌부에서 내보낸 궁녀를 첩으로 삼는 사건을 일으켜[1] 큰 물의를 빚었다. 이 일로 헌부가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자, 결국 남치원은 작록을 빼앗기고 가까운 지역으로 유배되었다.[2] 여러 대신들이 남치원을 더욱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3. 아들 남기의 죽음과 가문의 몰락
경순옹주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아들 남기(南沂)가 1546년(명종 1년) 정흥종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에 처해졌는데[3], 당시 남기가 경순옹주의 제사를 지내왔다는 기록이 있어[4] 1546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아들 남기가 참형을 당하면서 경순옹주의 제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또한 남기와 그의 자손들은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비운을 맞았다.[5]
3. 가족 관계
- '''부왕''' : 성종(成宗, 1457 ~ 1494)
- '''생모''' : 숙용 심씨(淑容 沈氏, 1465 ~ 1515)
- * 여동생 : 숙혜옹주 벽환(淑惠翁主 碧環, 1486 ~ 1525)
- * 남동생 : 이성군 관(利城君 慣, 1489 ~ 1552)
- * 남동생 : 영산군 전(寧山君 恮, 1490 ~ 1538)
- 시아버지 : 남경(南憬)
- 시어머니 : 거창 신씨(居昌 愼氏, 1467 ~ ?) - 신승선의 차녀이자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의 언니
- * '''남편''' :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
- ** '''아들''' : 남기(南沂, 1502 ~ 1546)
-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6]
손자 : 남상문(南尙文, 1520 ~ 1602)
손자 : 남상질(南尙質, 1522 ~ ?)[7]
손녀 : 남인복(南仁福, 1529 ~ ?)
손자 : 남상직(南尙直, 1532 ~ ?)
- ** 며느리(측실) : 이름 미상
서손자 : 남상경(南尙敬)
- ** 며느리(측실) : 이름 미상
서손녀 : 남의비(南義非, 1550 ~ ?)
- ** '''딸''' : 의령 남씨(宜寧 南氏)
- ** 사위 : 덕평군 이항(李沆, 1506 ~ 1560)[8]
참조
[1]
실록
헌부에서 방출한 궁녀를 첩으로 삼은 의성위 남치원을 벌주도록 아뢰다
[2]
실록
정광필 등이 남치원의 범죄를 금부에 내려 추국하도록 아뢰니, 윤허하다
[3]
실록
정흥종과 남기를 당현에서 참하고 가산을 몰수하다
[4]
실록
남기가 행하던 경순 옹주에 대한 봉사를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도록 명하다
[5]
실록
종부시 제조가 이유 및 남기의 자손을 《선원록》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다
[6]
기타
태종의 6대손
[7]
기타
최명길의 진외조부
[8]
기타
세종의 12남 밀성군의 증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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