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릉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애왕릉은 신라 제55대 경애왕을 모신 흙으로 둥글게 쌓은 형태의 무덤이다. 남산 북서쪽 구릉 끝, 기린내 동쪽 강가에 위치하며, 밑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이다. 경애왕은 927년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위치와 일치하지 않아 논쟁이 있다.

경애왕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경주 경애왕릉
로마자 표기Gyeongju Gyeongaewangneung
종류사적
지정 번호222
지정일1971년 4월 28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73-1번지
시대통일신라
면적2,273m2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경주시의 사적 - 불국사
    불국사는 김대성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중창을 시작하여 신라시대에 완공된 경주시 토함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석가탑과 다보탑 등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복원을 거쳐 현재에 이르러 신라 불교 건축의 정수이자 한국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경주시의 사적 - 대릉원
    신라시대 고분군인 대릉원은 경주 황남동 일대에 위치하며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의 고분이 있고, 특히 천마총에서는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다.
  • 경주시의 무덤 - 경주 김유신묘
    경주 김유신묘는 삼국 통일에 기여한 김유신을 기리는 묘로, 넓은 부지와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호석 등을 갖추고 있지만, 묘의 주인공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 경주시의 무덤 - 선덕여왕릉
    위키백과 문서의 "개요" 섹션 내용이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요약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 신라의 왕릉 - 문무왕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국왕으로 삼국 통일을 완수하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불교 장려 등의 정책을 통해 신라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군주이다.
  • 신라의 왕릉 - 통일신라
    통일신라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부터 고려에 병합된 935년까지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하며 왕권 강화와 불교 문화 번성, 해상 무역 장악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 9세기 이후 쇠퇴하여 후삼국 시대를 거쳐 멸망한 시대를 말한다.

2. 위치 및 특징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위치하며, 남산의 북서쪽 구릉 끝자락이자 인천(隣川, 기린내)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으로, 밑 둘레는 43m, 지름은 12m, 높이는 4.2m이다. 외형적으로는 일반적인 무덤과 큰 차이가 없어 별다른 특징은 없으며, 다른 신라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고 빈약한 편이다. 아직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경애왕릉으로 비정된 위치는 해목령과는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일성왕릉을 실제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3. 역사적 기록과 논쟁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년~927년)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경애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자리 잡고 있어, 기록상의 해목령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위치 불일치 때문에,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현재의 일성왕릉을 실제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경애왕릉으로 비정된 무덤은 외형상 일반 무덤과 큰 차이가 없으며, 다른 신라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고 소박한 편이다. 아직까지 정식 발굴 조사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

4. 현지 안내문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 927)을 모신 곳이다. 밑 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南山)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다. 인천(隣川: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