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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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서악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년) 경주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이후 설총, 최치원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전학후묘 배치를 따른다. 주요 건물로는 시습당, 영귀루 등이 있으며, 김유신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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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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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정보 | |
서원 이름 | 서악서원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
제향 인물 | 김유신, 설총, 최치원 |
건립 연대 | 명종(明宗) 16년(1561년) |
사액 연대 | 조선 인조 1년(1623년) |
다른 이름 | 서악정사 |
건물 배치 | 전학후묘(前學後廟) |
제향일 | 2월, 8월 중정(中丁) |
문화재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경상북도 |
유형 | 기념물 |
이름 | 서악서원 |
번호 | 19 |
지정일 | 1975년 12월 30일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
시대 | 조선시대 |
좌표 | 35°49′35″N 129°11′19″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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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2. 연혁
1561년 (조선 명종 16년) 서악정사 건립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고, 1623년 (인조 1년)에 서악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
2. 1. 조선 시대
1561년(명종 16년)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이 김유신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처음 세웠다. 이정은 경주의 옛 신라 때 묘역들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했다. 특히 통일 사업에 큰 공훈이 있는 태종 무열왕과 각간 김유신에 대해서는 무덤을 수리하는 것뿐 아니라 이들을 받드는 사당을 세우고자, 자신의 스승인 이퇴계에게 자문을 구했다.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까지 세울 필요는 없으며 각간(김유신)에 대해서만 사당을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퇴계의 의견을 따라 이정은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精舍)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았다.[1]이후 경주 유생들에 의해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의 위패도 합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이정은 다시 이퇴계와 의논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이퇴계가 '서악정사'라는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1]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600년(선조 33년)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옛 터에 초사를 다시 지어 전란을 피해 보존된 위패를 모셨다. 1602년에 부윤 이시언(李時彦)이 처음으로 사당 중건을 시작하였고, 1610년(광해군 2년) 강당과 동재(진수재) · 서재(성경재),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새로 지었다. 1623년(인조 1년) 경주의 유학자였던 진사 최동언(崔東彥) 등이 부윤 여우길(呂祐吉)을 통해 조정에 사액(賜額)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1]
1646년에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廟制)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1882년(고종 19년), 1892년(고종 29년), 1894년(고종 31년)에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
2. 2.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고종 10년(1873년), 고종 19년(1882년), 고종 29년(1892년), 고종 31년(1894년)에 걸쳐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3. 서악서원의 김유신
조선 시대 야담집 《천예록》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을 때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김유신은 설총, 최치원과 함께 서악서원에 모셔졌다.
어떤 서생은 김유신이 유학자로서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며 그의 위패를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유신이 꿈에 나타나 자신이 삼국통일에 기여한 충(忠)과 부모님께 효도한 효(孝)를 강조하며 서생을 꾸짖었다. 이후 서생은 병을 앓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
3. 1. 김유신 위패 봉안 논쟁
조선 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김유신,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가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먼저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의 제사에서 뺀 다음에 조정의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얼마 뒤,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서생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히고, 사방에 무기와 갑옷을 갖춘 병사들이 벌여 선 가운데, 김유신이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것이 효인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 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1]
3. 2. 김유신 현몽 설화
조선 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김유신,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먼저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의 제사에서 뺀 다음에 조정의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얼마 뒤,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서생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히고, 사방에 무기와 갑옷을 갖춘 병사들이 벌여 선 가운데, 김유신이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통일의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것이 효인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 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
4. 건축 및 배치
경주 서악서원은 앞쪽에 강학 공간, 뒤쪽에 사당을 배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정문인 영귀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이 있고, 시습당 좌우로 진수재(進修齋)와 성경재(誠敬齋)가 있다. 시습당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4. 1. 전학후묘 배치
서악서원은 앞쪽에 강학 공간을 두고 뒤쪽에 사당을 배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정문 역할을 하는 영귀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이 있고, 시습당을 중심으로 왼편에 진수재(進修齋), 오른편에 성경재(誠敬齋)가 위치한다. 시습당 뒤편 가장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시습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이며, 영귀루는 앞면 5칸,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4. 2. 주요 건물
경주 서악서원의 주요 건물로는 외삼문(도동문), 영귀루, 동재(절차헌), 서재(조설헌), 시습당, 내삼문, 사우 등이 있다.- 외삼문(도동문): 현재 현판 글씨는 서원 사액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 영귀루: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 판벽을 설치하고, 트인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과거에는 영귀루가 누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앞쪽에 외삼문(평삼문)인 도동문이 있다. 옆에는 서원을 처음 건립한 부윤 이정의 비가 세워져 있다.
- 동재(절차헌):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당인 시습당에서 영귀루 쪽을 바라볼 때, 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 서재(조설헌): 동재와 대칭되는 평면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시습당: 강당 건물이다. '시습'이라는 이름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첫 구절인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呼)"에서 따온 것이다. 전퇴를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 3칸은 우물마루이고, 양쪽은 각 1칸짜리 온돌방이다. 왼쪽 방에는 진수재, 오른쪽 방에는 성경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청에는 다섯 개의 현액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만력 경술(1610년) 가을 문소후인 김득질 찬
- 상지 10년 계유(1873년) 가을 8월 상한 부윤 이만운 찬
- 숭정 지원후5 임오(1882년) 6월 하완 여강 이능정 기록
- 상지 29년 임진(1892년) 12월 일 부윤인 원장 민영수 찬
- 1923년 이후 추정, 입추절 하완 통사랑 권지능문완부정자 월성 최현필 기록
위 현액들의 기록을 통해 서악서원의 중수 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 내삼문: 사우로 통하는 문으로, 평삼문 맞배지붕 건물이다.
- 사우(祠宇):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중 하나인 제향을 위한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퇴는 없다.
5. 유물
서악서원에는 현판, 기록물, 비석 등 다양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서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5. 1. 현판 및 기록
시습당에는 서원의 학칙을 기록한 《원규》와 백록동규, 《국기(國忌)》, 《서악서원중수기 완의(完議)》, 《서악서원상량문》(1610년) 등의 기판이 걸려있다. 영귀루에는 《서악서원내해중건기》, 《영귀루중건기 및 중수기》 등이 남아 있다.[1]5. 2. 비석
서원 내에는 비석 1기가 있다. 이 비석은 서원을 처음 건립한 경주부윤 이정(李楨)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6. 현대적 의의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출력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Seoak Seowon
http://eguide.gj.go.[...]
2011-07-22
[2]
웹사이트
서악서원 西岳書院
http://100.nate.com/[...]
201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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