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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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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총은 신라 시대의 학자이다. 승려 원효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를 어머니로 두었으며, 어려서부터 경사와 유학에 능통했다. 이두와 구결 문자를 집대성하여 한문으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신문왕 때 국학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강수와 함께 구경을 강론했다. 성덕왕 때 홍유후에 봉해졌고, 저서로는 〈계화왕〉이 전해진다. 사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신라 2현 중 한 명으로 숭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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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설총
한자 표기薛聰
로마자 표기Seol Chong
시대신라
빙월당(氷月堂)
총지(聰智)
출생일655년
사망일미상
국적신라
직업학자
종교불교
아버지원효
어머니요석공주
배우자단초 유씨
친척숙부 설을신
묘소전홍유후설총묘
시호홍유후(弘儒侯)
서훈문묘 동무 배향
서악서원 제향
웹사이트설총
초상화
주요 저작
저작《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

2. 생애

설총의 묘


설총은 신라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장가로, 아버지는 승려 원효대사, 어머니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이다. 본명은 설사(薛思)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에 능통했다.

그는 고대 한국어한자로 표기하는 방식인 이두구결을 집대성하여 유학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1] 신문왕에게 꽃을 의인화하여 교훈을 전하는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신문왕 때 국학에서 활동하며 강수와 함께 후학을 지도했고, 한림 등의 관직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719년에는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사후 고려 시대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고 서악서원에 모셔지는 등[2] 후대에 이르기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일본의 문자 발달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아버지는 불교 승려인 원효대사이며, 어머니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이다. 본명은 설사(薛思)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서(經書)와 역사서(史書)에 통달했고, 유교한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승려(사문, 沙門)가 되어 불교 서적을 깊이 공부했으나, 이후 환속(還俗)하여 유교로 자신의 학문 방향을 바꾸었다. 신라 신문왕 때 국학(國學)이 세워져 오경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설총은 국학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했다. 746년(경덕왕 5년) 무렵에는 박사로서 강수와 함께 구경(九經)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설총은 고대 한국어한자로 표기하기 위한 체계인 이두구결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향찰을 집대성하고, 육경(六經)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구결)을 개발하여 한문을 한국어식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유학 연구를 보다 쉽고 빠르게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으며,[1] 후세 일본어의 만엽가나와 오코토텐(ヲコト点)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강수와 함께 구경(九經)을 구결(口訣)을 사용하여 풀이하고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성덕왕 때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홍유후(弘儒侯)에 봉해졌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 한림(翰林)과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문왕 시기 국학 설립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719년(성덕왕 18년)에는 나마(奈麻)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기도 했다.

설총의 작품으로는 꽃을 의인화하여 당시 왕의 부족함을 풍자한 화왕계(花王戒, 또는 계화왕 戒花王)가 전해진다. 그는 이 글을 신문왕에게 직접 올려 왕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반성하도록 촉구했다.

아들로는 설중업(薛仲業)이 있다.

2. 2. 학문적 업적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유학과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초기에는 불교 서적을 탐독했으나 후에 유교로 전향하였다. 신문왕 때 국학(國學)이 개설되자 그곳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했고, 746년(경덕왕 5년) 무렵에는 박사로서 강수와 함께 구경(九經)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설총의 가장 큰 업적은 고대 한국어한문으로 표기하기 위한 문자 체계인 이두구결을 정리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그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향찰을 집대성하고, 《육경》(六經)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개발하여 한문을 한국어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를 통해 유학 연구의 발전을 촉진했다.[1] 또한 강수와 함께 9경(九經)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 풀이하여 강론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성덕왕 때 홍유후(弘儒侯)에 봉해졌다.

그의 저술로는 꽃을 의인화하여 당시 왕의 부족함을 풍자하고 깨우침을 주려 했던 〈화왕계〉(花王戒) 1편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그는 이 글을 신문왕에게 직접 올려 왕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성덕왕 18년인 719년에는 나마(奈麻)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설총은 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년) 1월에는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문묘(文廟)의 동무(東廡)에 최치원과 함께 신라 시대의 뛰어난 두 학자라는 의미의 '신라2현'으로 모셔졌으며,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에도 제향되었다.[2] 그가 정립한 이두와 구결은 후세 일본어의 만엽가나와 오코토점(ヲコト点)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2. 3. 관직 활동 및 저술

초기에 사문(沙門)에 들어가 불교 서적을 탐독했으나 뒤에 환속하여 유학(儒敎)으로 개종하였다. 신문왕 때 국학(國學)이 개설되어 오경(五經)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자, 그는 국학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했다. 당시 신라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았으며, 한림(翰林)과 같은 직책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문왕 때 국학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746년(경덕왕 5년) 무렵에는 박사(博士)로서 강수와 함께 구경(九經)을 구결(口訣)로 풀이하여 강론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설총은 고대 한국어한문으로 표현하는 문자 체계인 이두(吏讀)와 구결(口訣) 문자를 정리하고 체계화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그때까지 존재하던 향찰(鄕札)을 집대성하고, 《육경》(六經)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개발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연구를 보다 쉽고 빠르게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1] 이러한 그의 업적은 후세 일본어의 만엽가나와 오코토점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성덕왕 18년인 719년에는 나마(奈麻)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화왕계〉(花王戒)라고도 불리는 〈계화왕〉(戒花王) 1편이 전해진다. 이 작품은 꽃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이야기를 전개한 한문 단편으로, 당시 왕의 도덕적이지 못한 점을 풍자한 글이다. 그는 이 글을 신문왕에게 직접 지어 올려, 왕의 잘못된 행동을 경계하고 스스로 반성할 것을 촉구하며 도덕 규범 준수를 강조했다.

성덕왕 때에는 그의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아 홍유후(弘儒侯)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년)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 2현(新羅二賢)이라 하여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2]

2. 4. 사후

설총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존경을 받았다.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는 나라에서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또한,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의 동쪽 별채(동무, 東廡)에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2현(新羅二賢)'으로 모셔졌으며, 경주에 있는 서악서원(西嶽書院)에서도 제사를 지내며 기리고 있다.[2] 이처럼 설총은 후대에도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유학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3. 이두와 구결

중국한자에 한국식 음운을 달아 새로운 문자인 이두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두와 유사한 표기 방식이 진평왕 때의 서동요진흥왕 순수비 등에서도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설총이 이두를 완전히 창작했다기보다는 기존에 사용되던 방식을 집대성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또한, 유교 경전을 신라어(한국어)로 읽는 방법인 '토'(吐), 즉 구결(口訣)과 신라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방법인 이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에 일본어의 표기법인 만엽가나와 오코토점(ヲコト点) 등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4. 가족 관계

신라 시대의 고승으로 알려진 원효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궁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4. 1. 선대


  • 조부 : 설담날
  • 조모 : 포회 조씨
  • 아버지 : 원효(元曉, 617년 ~ 686년) - 신라의 고승, 설담날의 아들이며 설원랑의 증손이다.
  • 외조부 : 태종무열왕 - 신라 제29대 왕
  • 외조모 : 영창부인
  • 어머니 : 요석궁공주(瑤石宮公主, ? ~ ?) - 태종무열왕과 영창부인의 딸
  • 이부남매 : 신목왕후

4. 2. 부인과 후손


  • 부인 : 단초 유씨(丹草庾氏)[3]
  • 부인 : 광주 노씨
  • * 아들 : 설홍린(薛洪鱗)
  • * 아들 : 설명린(薛命鱗)
  • * 아들 : 설호린(薛好鱗)

5. 평가

신라 시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으로, 한림에 임명되었다. 유교 경전을 신라어(한국어)로 읽는 방법인 '토'와 신라어를 한자로 표현하는 방법인 이두를 고안(혹은 체계화)한 인물로 여겨진다. 이는 후대에 영향을 미쳐 일본어의 만엽가나와 오코토점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후세에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존경받아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합사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도덕 규범 준수를 강조한 「화왕계」(원문에서는 봉왕서(화왕계)로 표기)가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2] 웹인용 설총(薛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8-04-11
[3] 간행물 경주설씨족보, 계림설씨등관록(鷄林薛氏登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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