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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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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간은 신라의 관등으로, 32년 유리 이사금 때 17관등 중 제1등으로 제정되었다. 군사 업무, 기밀 정무를 담당하고 왕의 자문 역할을 수행했으며, 가야에서도 관직으로 사용되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는 호족들이 자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각간은 이벌찬, 서불한, 서발한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중국 사서에는 자분한기로 기록되었다.

2. 명칭

각간은 시대와 문헌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이벌찬', '서불한(또는 서발한)', '각간' 등의 명칭이 초기에 쓰였는데, 후기에는 '각간'이라는 용어로만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1]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가야가 "계림(신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각간,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등의 관직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호족들이 스스로를 칭할 때 각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고려 말 학자 이제현은 고려 왕실 족보인 《성원록》을 인용하여 왕건의 외증조부 이름이 '각간(角干) 두은점'임을 《역옹패설》에서 밝히고 있다.

2. 1. 이벌찬(伊伐湌)

삼국사기》에는 노례왕 9년(32년)에 17관등을 정하면서 제1등으로 제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벌찬은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거나 기밀 정무를 맡아 왕의 정치 자문 역할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벌찬' 다음으로 '서불한(또는 서발한)' 또는 '각간'(角干)이라는 명칭이 초기에 많이 쓰였는데, 후기에는 각간(角干)이라는 용어로만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1] 중국의 《양서》, 《남사》, 《북사》, 《수서》, 《당서》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1]

2. 2. 서불한(舒弗邯) / 서발한(舒發翰)

《삼국사기》에는 노례왕 9년(32년)에 처음 17관등을 정하면서 제1등으로 제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벌찬 관등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거나 기밀 정무를 맡아 왕의 정치 자문이 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벌찬' 다음으로 '서불한(또는 서발한)' 또는 '각간'(角干)이라는 이칭이 초기에 많이 쓰였는데, 후기에는 각간(角干)이라는 용어로만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1] 중국의 《양서》, 《남사》, 《북사》, 《수서》, 《당서》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1]

2. 3. 자분한기(子賁旱支)

중국 측 사서인 《양서》, 《남사》, 《북사》, 《수서》, 《당서》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

3. 역사

《삼국사기》에는 노례왕 9년(32년)에 17관등이 처음 제정되면서 제1등 관등으로 각간이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간은 이벌찬 관등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거나 기밀 정무를 맡아 왕의 정치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이벌찬' 다음으로 '서불한(또는 서발한)' 또는 '각간'(角干)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는 '각간'이라는 용어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중국의 《양서》, 《남사》, 《북사》, 《수서》, 《당서》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가야에서도 각간,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등의 관직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호족(豪族)들이 스스로를 각간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고려 왕실의 족보인 《성원록》을 인용하여 왕건의 외증조부 이름이 '각간 두은점'이라고 《역옹패설》에서 밝히고 있다.

3. 1. 초기 (삼국사기 기록)

노례왕 9년(32년)에 17관등이 처음 제정되면서 제1등 관등으로 각간이 설치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벌찬 관등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거나 기밀 정무를 맡아 왕의 정치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벌찬' 다음으로 '서불한(또는 서발한)' 또는 '각간'(角干)이라는 이칭이 초기에 많이 쓰였는데, 후기에는 각간(角干)이라는 용어로만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중국의 《양서》, 《남사》, 《북사》, 《수서》, 《당서》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

3. 2. 가야와 고려에서의 사용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가야에서도 각간,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등의 관직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호족(豪族)들이 스스로를 각간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고려 왕실의 족보인 《성원록》을 인용하여 왕건의 외증조부 이름이 '각간 두은점'이라고 《역옹패설》에서 밝히고 있다.

3. 3. 후기 (각간 용어의 정착)

노례왕 9년(32년)에 17관등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각간은 제1등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각간은 이벌찬과 함께 중앙 및 지방의 군사 업무나 기밀 정무를 담당하며 왕의 정치 자문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이벌찬' 다음으로 '서불한(또는 서발한)' 또는 '각간'(角干)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간'이라는 용어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1] 중국의 《양서》, 《남사》, 《북사》, 《수서》, 《당서》의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1]

4. 역할

신라의 각간은 정치, 군사,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5. 각간에 임명된 인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역사서에 기록된 각간에 임명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시기이름비고
탈해 이사금 11년(67년)순정(順貞)[1]
탈해 이사금 17년우오(羽烏)이벌찬. 목출도에서 왜적을 막다 전사.
내해 이사금 10년(205년)진충(眞忠)
내해 이사금 12년(207년)석이음(利音)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 겸임.
내해 이사금 25년(220년)충훤(忠萱)이음의 후임으로 이벌찬.
내해 이사금 27년(222년)연진(連珍)충원의 좌천으로 이벌찬, 군사 업무 담당.
조분 이사금 15년(244년)석우로(昔于老)서불한. 군사에 관한 일 겸임.
첨해 이사금 2년(248년)장훤(長萱)서불한.
미추 이사금 2년(263년)양부(良夫)서불한.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 겸임.
유례 이사금 2년(285년)홍권(弘權)서불한. 기밀 정무 담당.
유례 이사금 8년(291년)김말구(金末仇)왕의 정치 자문.
흘해 이사금 36년(345년)강세(康世)
실성왕 2년(403년)미사품(未斯品)서불한. 군무와 국정 담당.[1]
눌지왕 17년(433년)미사흔(未斯欣)사망 후 서불한 추증.[1]
자비왕 (478년)박문량(朴文良)65세에 임명.[2]
소지왕 8년(486년)내숙국정 참여.
소지왕 15년(493년)비지(比智)당시 이벌찬.[3] 딸이 백제 동성왕대가야 이뇌왕의 비가 됨.
잉숙(仍宿)[4]
김무력(金武力)[5]
진흥왕 11년(551년)비태(比台)당시 각찬. 백제와 함께 고구려 공격.
진흥왕 15년(554년)우덕(于德)관산성에서 백제군과 교전.
선덕여왕 6년(637년)사진(思眞)서불한.
김서현(金舒玄)[6]
김유신
태종 무열왕 2년(655년)김인문김인태(金仁泰)라는 이름으로 각찬. 문무왕 4년(664년) 각간.
김개원(金愷元)[7]
문무왕 8년(668년)김천존(金天存)고구려 공격의 귀당총관. 같은 왕 19년(679년) 중시 임명 당시 서불한.
문무왕 8년(668년)문충(文忠)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공격.
문무왕 8년김흠순(金欽純)고구려 공격.
진순(陳純)[8]
죽지(竹旨)
품일(品日)관창의 아버지.
김순원(金順元)[9]
김원진(金元眞)[10]
성덕왕 31년(732년)사공 (思恭)당의 요청에 따라 발해 원정군 장군 임명.
경덕왕 2년(743년)김의충(金義忠)서불한.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아버지.
민장(敏藏)[11]
김원훈(金元訓)[12]
김위정(金魏正)[13]
김장(金將)[14]
김대공(金大恭)[15] 대공의 난 주동.
김경신[16]
김신술(金神述)[17]
김예영(金禮英)[18]
애장왕 원년(800년)김언승
헌덕왕 14년(822년)김충공(金忠恭)김헌창의 난 진압. 딸 정교(貞嬌)가 태자비. 희강왕의 비 문목왕후(文穆王后)의 아버지 충효(忠孝, 또는 중공重恭)와 동일인물.
헌덕왕 15년(823년)원순(元順), 평원(平原)70세로 은퇴, 왕이 궤장(几杖) 하사.
김영공(金永公)[19]
문성왕 19년(857년)김양(金陽)사망 후 서발한 추증.
김인경[20]
진성여왕 2년(888년)김위홍(金魏弘)대구화상과 함께 향가 모음집 《삼대목(三代目)》 편찬.
효공왕 2년(898년)준흥(俊興)상대등 임명 당시 서발한.
김예겸(金乂謙)[21]
김순홍(金順弘)[22]
대존(大尊)[23]
경명왕 3년(919년)김성(金成)각찬.


5. 1. 초기 신라

5. 2. 중고기 신라

5. 3. 통일 신라


  • 성덕왕 31년(732년) 사공(思恭)은 각간으로서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발해 원정을 위한 파병군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1]
  • 경덕왕 2년(743년) 김의충(金義忠)은 서불한이었으며,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아버지이다.
  • 민장(敏藏)[11]
  • 김원훈(金元訓)[12]
  • 김위정(金魏正)[13]
  • 김장(金將)[14]
  • 김대공(金大恭)[15] - 대공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삼국유사》에는 대공의 난 당시 "서울 및 5도의 주와 군에서 96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어지러웠다"고 전하고 있다.
  • 김경신(金敬信)[16]
  • 김신술(金神述)[17]
  • 김예영(金禮英)[18]
  • 김언승(金彦昇) - 애장왕 원년(800년)에 각간이 되었다.
  • 김충공(金忠恭) - 헌덕왕 14년(822년) 각간으로서 김헌창의 난 진압을 맡았으며, 딸 정교(貞嬌)가 태자비가 되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희강왕의 비 문목왕후(文穆王后)의 아버지로 기록된 충효(忠孝, 또는 중공重恭) 각간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 헌덕왕 15년(823년) 원순(元順), 평원(平原)은 나이 일흔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고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 김영공(金永公)[19]
  • 문성왕 19년(857년) 김양(金陽)은 사망하였으며, 서발한으로 추증되었다.
  • 김인경(金仁慶)[20]
  • 진성여왕 2년(888년) 김위홍(金魏弘)은 각간으로서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왕명으로 향가를 모아 수집한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였다.
  • 효공왕 2년(898년) 준흥(俊興)은 상대등으로 임명될 당시 관등이 서발한이었다.
  • 김예겸(金乂謙)[21]
  • 김순홍(金順弘)[22]
  • 대존(大尊)[23]
  • 경명왕 3년(919년) 김성(金成)은 각찬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2] 문서
[3] 서적 삼국사기
[4] 서적 삼국사기
[5] 서적 삼국사기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삼국유사
[8] 서적 삼국사기
[9] 문서
[10] 서적 삼국유사
[11] 서적 삼국유사
[12] 서적 삼국유사
[13] 서적 삼국유사
[14] 문서
[15] 서적 삼국유사
[16] 서적 삼국사기
[17] 문서
[18] 서적 삼국사기
[19] 서적 삼국유사
[20] 서적 삼국사기
[21] 서적 삼국유사
[22] 문서
[23] 서적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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