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고려도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려도인은 고구려와 중국 불교의 관계를 보여주는 인물로, 정확한 정보는 부족하나 관련 기록을 통해 그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 불교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둔의 서신을 통해 그 이전부터 중국 불교와의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해동고승전』은 고려도인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고려도인을 중국 동진의 승려 법심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구려의 승려 - 보덕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연개소문의 억불 정책에 반발하여 백제로 망명하여 열반종을 포교했으며, 하룻밤 만에 거처를 옮겼다는 비래방장 설화로 알려져 있다.
  • 고구려의 승려 - 혜자
    혜자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로서 일본 아스카 시대 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621년 쇼토쿠 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 해 죽음을 예언하고 실제로 사망했다.
  • 4세기 한국 사람 - 장수왕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즉위 후 연호를 사용하고 광개토대왕릉비 등을 건립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추진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다가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세기 한국 사람 - 전지왕
    전지왕은 백제의 제18대 국왕으로, 아신왕의 장남이었으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내분을 겪고 왜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여 해씨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 강화에 힘썼으며 왜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고려도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고려도인
한자高麗道人
히라가나こうらいどうじん
로마자 표기Kōrai Dōjin
인물 정보
직업승려
국적고려
활동 시기미상
기타 정보목촌선생문집에 언급됨
관련 인물담시
참고 문헌
참고 자료木村宣彰 (1980-05-30).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pp. 39-40.

2. 고구려 불교의 전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부견이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가져온 것을 고구려 불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 그러나 『고승전』,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고구려와 중국 불교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해동고승전』은 고려도인에 대해 「석망명」이라는 항목을 두고 있지만, 인물과 사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고 전한다. 다만, 지둔이 중국에서 존경받았고 그의 교우는 훌륭한 인물들이었으며, 외국의 선비(고려도인)라면 그 이름은 사라져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런 서신(지둔이 망명의 고려도인에게 보낸)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고려도인을 칭찬하고 있다.[1]

삼국유사』는 『해동고승전』 「석망명」을 언급하며, "순도 다음으로 법심, 의연, 담엄 등이 서로 계승하여 교화를 일으켰으나, 옛 기록에 문헌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승전을 참조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1] 일연은 「망명」의 고려도인을 중국동진의 승려 법심(축도잠)으로 비정하고 있다.[1]

2. 1. 소수림왕 대의 불교 전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 경문을 가져왔다.[1] 2년 뒤 아도가 왔고, 이듬해 성문사, 이불란사가 창건된 것을 고구려 불교의 시작으로 본다.[1]

그러나 동진의 승려 축도잠(법심)의 고덕을 칭찬하는, 지둔이 고려도인에게 보낸 「여고려도인서」가 『고승전』 권4 축도잠(법심)전에 인용되어 있다.[1] 지둔은 태화 원년(366년)에 사망했으므로, 「여고려도인서」를 보낸 시기는 그 이전이다.[1] 따라서 순도가 고구려에 왔다고 전해지는 소수림왕 2년보다 6년 전이며, 순도·아도의 고구려 교화 이전에 고구려와 중국 불교와의 접촉을 보여준다는 주장이 있다.[1]

2. 2. 『고승전』과 「여고려도인서」

고승전』 권4 축도잠(법심)전에 인용된 「여고려도인서」에는 동진의 승려 축도잠의 고덕을 칭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둔은 태화 원년(366년)에 사망했으므로, 지둔이 고려도인에게 서신을 보낸 시기는 그 이전이다. 따라서 순도고구려에 왔다고 전해지는 소수림왕 2년(372년)보다 6년 앞서며, 순도·아도의 고구려 교화 이전에 고구려와 중국 불교가 접촉했음을 보여준다는 주장이 있다.[1]

이와 관련하여,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는 고구려의 불교 수용이 단순한 외래 종교의 전파가 아닌, 고구려의 주체적인 대외 관계와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

3. 사료 분석

고구려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가져왔고, 2년 뒤 아도가 와서 성문사이불란사가 창건된 것을 고구려 불교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고승전』 권4 축도잠(법심)전에 인용된 지둔이 고려도인에게 보낸 「여고려도인서」는 동진 승려 축도잠의 고덕을 칭찬하고 있다. 지둔은 태화 원년(366년)에 사망했으므로, 「여고려도인서」를 보낸 시기는 그 이전이며, 이는 순도가 고구려에 온 소수림왕 2년보다 6년 전이다. 따라서 순도·아도의 고구려 교화 이전에 고구려와 중국 불교의 접촉을 보여준다는 주장이 있다.[1]

3. 1.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은 고려도인에 대해 「석망명」이라는 항목을 두고 있지만, 인물과 사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해동고승전』은 지둔이 중국에서 존경받았고 그의 교우는 훌륭한 인물들이었으며, 하물며 외국의 선비라면 그 이름은 사라져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런 (지둔이 망명의 고려도인에게 보낸) 서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고려도인을 칭찬하고 있다.[1]

3. 2.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3 흥법편은 『해동고승전』 「석망명」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순도공의 다음으로, 법심, 의연, 담엄 등의 흐름이 있어 서로 계승하여 교화를 일으켰다. 옛 기록에는 문헌이 없어 지금은 감히 편차하지 못한다. 자세한 내용은 승전을 참조하라."[1] 일연은 「망명」의 고려도인을 중국 동진의 승려 법심(축도잠)으로 비정하였다.[1]

참조

[1]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2]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