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름 가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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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름은 반(半) 전설적인 덴마크 왕으로, 10세기 초에 서부 덴마크를 다스렸다. 그는 옐링 왕조의 개창자로 여겨지며, 옐링에 있는 룬 문자가 새겨진 석비와 묘실을 통해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고름은 튀라와 결혼하여 덴마크 역사상 처음으로 영역성을 가진 국가를 건설했으며, 아들 하랄 블루투스의 치세에 기독교가 덴마크에 전파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덴마크 군주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그의 일화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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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름 가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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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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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덴마크 국왕 |
재위 | 936년경 – 958/963/964년 |
이전 국왕 | 하르타크누트 (크누트 1세) (반전설적) 또는 그누파 |
다음 국왕 | 하랄 1세 |
배우자 | 튀라 |
자녀 | 하랄 1세 크누트 다나아스트 군힐드, 왕들의 어머니 스트루트-하랄 토케 고름손 |
왕가 | 고름 가문 |
왕조 | 고름 가문 |
아버지 | 하르타크누트 1세 (반전설적) |
어머니 | 알려지지 않음 |
종교 | 노르드 이교 |
출생일 | 900년 이전 |
사망일 | 958/963/964년 |
이름 | |
덴마크어 | Gorm den Gamle |
고대 노르드어 | Gormr gamli |
라틴어 | Gormus Senex |
다른 덴마크어 표기 | Gorm Løge, Gorm den Dvaske |
2. 생애와 통치
고름 왕은 반(半) 전설적인 덴마크 왕 하르다누트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은 하르다누트가 10세기 초에 노르망디에서 덴마크로 와서 권력을 잡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젊은 왕 시그트리그 그누파손을 폐위시키고 서부 덴마크를 다스렸다.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덴마크에는 올라프(오로프, Olof the Brash영어)를 시조로 하여 윌란 반도 남부의 상업지 헤제뷔를 거점으로 일대를 지배했던 "올라프 가문"이 있었다. 이 올라프 가문의 그누파(Gyrd and Gnupa영어)가 934년에 동프랑크 왕 하인리히 1세에게 패배하여 공납 의무와 세례를 받아들였고,[8] 그누파 이후 그의 아들 시그트뤼그(Sigtrygg Gnupasson영어)가 왕위에 오른 것이 사료에 의해 확인되었다.[8]
브레멘의 아담의 『함부르크 주교 사적록』(11세기)에는 "그(시그트뤼그)가 잠시 동안 (덴마크를) 지배한 후, 노르만인의 나라에서 온 스벤의 아들 하르데곤(Hardegonla)이 그에게서 왕국을 빼앗았다"라는 기술이 있으며, 이 하르데곤(하르데크누즈, Harthacnut I of Denmark)을 고름, 또는 고름의 아버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9] "노르만인의 나라(Nortmannia)"가 노르웨이인지 노르망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1]
『함부르크 주교 사적록』에 따르면, 918년부터 936년까지 대주교직에 있던 운니가 고름을 접견하고 포교를 시도했지만 "야만성이 심하여 따르게 할 수 없었다"라는 기술이 있으며,[12] 934년 그누파의 패배와 함께, 936년경에는 외부에서 교섭 대상자로 인식되는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11]
옐링 왕권(고름 가문)의 개창자로 여겨지지만, 그 사적에 대해 언급한 사료는 제한적이고 그 해석도 어려우며[6], 출신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어 밝혀지지 않았다.[7]
옐링 분묘군의 교회에서 고름일 가능성이 있는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그 유골이 원래 있었을 북쪽 분구의 묘실의 지지목의 벌채 연대로부터, 고름의 사망 연도는 958년부터 959년 겨울로 추정된다.[17] 유골의 추정 신장은 173cm, 연령은 30대에서 50대로 사인은 특정되지 않았다.[17]
2. 1. 덴마크 통일 과정
헤임스크링글라는 고름이 그누파로부터 왕국의 일부를 무력으로 빼앗았다고 전하며, 브레멘의 아담은 고름 시대 이전에 왕국이 분할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름은 936년에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운니 대주교를 접대한 기록을 통해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옐링 돌에 따르면 고름의 아들 하랄드 블루투스가 "덴마크 전체를 정복"했으므로, 고름은 옐링을 중심으로 유틀란트만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2. 티라 왕비와의 결혼
고름은 티라와 결혼했는데, 티라의 부모에 대한 정보는 후대 자료에서 엇갈리고 있어 동시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름은 옐링에 있는 거대한 분구 중 하나와 옐링 석비 중 가장 오래된 것을 티라 왕비를 위해 세웠으며, 그녀를 "tanmarkar but"("덴마크의 구원" 또는 "덴마크의 장식")라고 불렀다. 티라는 덴마크 남부 국경과 작센족 사이의 방어벽인 다네비르케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라 왕비의 출신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13] 옐링에는 고름이 티라를 기리기 위해 세운 룬 석비가 옐링 분묘군(세계 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15]
- (룬 문자의 덴마크어 번역)
- : ''(Side A)'' : kurmR : kunukR :
- : : k(ar)þi : kubl : þusi :
- : : a(ft) : þurui : kunu
- : ''(Side B)'' | sina | tanmarkaR | but |
- (한국어 번역)
- : "왕 고름은, 덴마크의 영광인 그 아내 티라를 기념하여 이 비를 세웠다"
최근 연구에서는 "tanmarkaR (덴마크)"를 "데인인의 변방(마르크)"로 해석하여, 티라가 덴마크 동부 호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고름 가문 측에서 "데인인의 변방의 영광"으로 평가했다는 설도 있다.[16] 이처럼 외부에서 온 고름은 튀라와의 결혼으로 권력 기반을 굳건히 하였고, 덴마크 역사상 처음으로 영역성을 가진 국가를 건설했으며,[7] 그 권력 기반은 아들 하랄 치세의 초석이 되었다.[15]
3. 죽음과 유산
고름은 958~959년 겨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연륜연대기를 통해 옐링 북쪽 묘실이 958년에 베어진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아릴드 후이트펠트는 그의 저서 『덴마크 왕국의 연대기』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전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름의 세 아들은 모두 바이킹으로, 매년 여름 덴마크를 떠나 약탈을 했다. 하랄은 형제 크누드가 아일랜드 더블린을 점령하려다 죽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옐링 왕궁으로 돌아왔다. 크누드는 밤에 경기를 구경하다가 비겁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맹세한 탓에 아무도 왕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왕비 티라는 왕궁에 검은 천을 걸고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했다. 고름이 궁에 들어서자 그는 깜짝 놀라 이 애도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티라 왕비는 "주군, 왕에게는 하얀 매 한 마리와 회색 매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얀 매는 멀리 날아가 다른 새들에게 공격을 받아 아름다운 깃털이 뽑히고 이제는 쓸모가 없습니다. 한편, 회색 매는 계속해서 왕의 식탁을 위해 가금류를 잡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름은 즉시 왕비의 은유를 이해하고 "내 아들이 틀림없이 죽었구나. 덴마크 전체가 슬퍼하고 있으니!"라고 외쳤다. 티라는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고름은 크누드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여 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옐링 비석에 기록된 내용, 즉 고름보다 티라 왕비가 먼저 죽었다는 정보와 상반된다. 일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는 고름이 먼저 옐링의 티라 왕비 무덤에 묻혔다가 아들 하랄 블루투스에 의해 옐링의 원래 목조 교회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옐링 최초의 기독교 교회 부지에서 발견된 유골이 고름 왕의 유골이라고 믿어지지만,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고름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의 덴마크인들은 여전히 북유럽 신화의 신들을 숭배했지만, 아들 하랄 블루투스 통치 기간 동안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되었다. 하랄은 고름이 원래 매장되었던 언덕을 기념물로 남겨두었다.
고름은 덴마크 군주의 전통적인 조상으로 여겨진다.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데인인의 사적la에서 고름이 다른 군주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오래 살아서 아들 크누트가 죽었을 때 눈이 멀었다고 주장한다.
3. 1. 죽음과 매장
고름은 958년에서 959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옐링 북쪽 분묘에서 발견된 목재의 연륜 연대 측정 결과, 958년에 베어진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고름 왕의 무덤이 958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아릴드 후이트펠트는 그의 저서 『덴마크 왕국의 연대기』에서 고름의 죽음에 대한 전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름의 세 아들은 모두 바이킹으로, 매년 여름 덴마크를 떠나 약탈을 일삼았다. 어느 날, 하랄은 형제 크누드가 아일랜드 더블린 점령 중 비겁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옐링 왕궁으로 돌아왔다. 왕이 맹세한 탓에 아무도 왕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왕비 티라는 왕궁에 검은 천을 걸고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했다. 고름이 궁에 들어서자 그는 깜짝 놀라 이 애도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티라 왕비는 "주군, 왕에게는 하얀 매 한 마리와 회색 매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얀 매는 멀리 날아가 다른 새들에게 공격을 받아 아름다운 깃털이 뽑히고 이제는 쓸모가 없습니다. 한편, 회색 매는 계속해서 왕의 식탁을 위해 가금류를 잡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름은 즉시 왕비의 은유를 이해하고 "내 아들이 틀림없이 죽었구나. 덴마크 전체가 슬퍼하고 있으니!"라고 외쳤다. 티라는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고름은 크누드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여 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옐링 비석에 기록된 고름보다 티라 왕비가 먼저 죽었다는 정보와 상반된다. 일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는 고름이 먼저 옐링의 티라 왕비 무덤에 묻혔다가 아들 하랄 블루투스에 의해 옐링의 원래 목조 교회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옐링 최초의 기독교 교회 부지에서 발견된 유골이 고름 왕의 유골이라고 믿어지지만, 이 이론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옐링 분묘군의 교회에서 고름일 가능성이 있는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그 유골이 원래 있었을 북쪽 분구의 묘실의 지지목의 벌채 연대로부터, 고름의 사망 연도는 958년부터 959년 겨울로 추정된다.[17] 유골의 추정 신장은 173cm이며, 연령은 30대에서 50대로 사인은 특정되지 않았다.[17]
3. 2. 덴마크 왕실과의 관계
고름은 덴마크 군주의 전통적인 조상으로 여겨진다.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자신의 저서 데인인의 사적la에서 고름이 다른 군주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오래 살아서 아들 크누트가 죽었을 때 눈이 멀었다고 주장한다.글뤽스부르크가는 고름의 후손으로, 현재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가이다. 이 가문에서 그리스의 국왕도 배출되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6세 국왕의 어머니인 소피아 왕비는 글뤽스부르크가의 분가인 옛 그리스 왕가 출신이다.
영국의 찰스 3세는 아버지 에든버러 공작 필립이 옛 그리스 왕가 출신(영국으로 귀화하여 마운트배튼을 성으로 삼음)이며,[5] 현조모인 알렉산드라 왕비는 덴마크 왕가 출신이다.
4. 평가
고름 왕은 덴마크 역사상 처음으로 영역성을 가진 국가를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 그의 통치는 덴마크 왕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며,[15] 덴마크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름 왕의 시대는 덴마크가 북유럽 신화의 신들을 믿는 전통 신앙에서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를 통해 기독교로 전환되는 과도기였다. 고름 왕 자신은 전통 신앙을 유지했지만,[12] 그의 아들 하랄드 블루투스 시대에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기독교화되었다.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고름을 강력한 군주로서 덴마크를 통일하고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그의 통치가 중앙 집권화와 사회 통합을 추구하는 현대 정치의 이념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옐링 왕권(고름 가문)의 개창자로 여겨지지만, 그 사적에 대해 언급한 사료는 제한적이고 그 해석도 어려우며[6], 출신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어 밝혀지지 않았다.[7]
5. 일화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데인인의 사적la(12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고름 왕은 어느 날 두 마리의 매를 기르는 꿈을 꾸었는데, 그중 큰 매는 돌아오지 않고 작은 매만 피를 묻힌 채 돌아왔다. 고름 왕은 크누드(애칭 다나아스트)와 하랄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고, 크누드의 죽음을 알리는 자는 죽이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크누드가 잉글랜드 전투에서 사망하자, 튀라 왕비는 검은 옷과 상복으로 고름 왕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렸다.[18][19]
5. 1. 두 마리의 매 꿈
고름 왕은 어느 날 두 마리의 매를 기르는 꿈을 꾸었다. 매들은 고름 왕의 팔에서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지만, 그중 큰 매는 돌아오지 않고 작은 매만 날개에 피를 묻힌 채 돌아왔다.[18] 고름 왕과 튀라 왕비는 크누드(애칭 다나아스트(=「데인인의 사랑」))와 하랄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고름 왕은 크누드를 더 사랑했다. 그는 매의 꿈을 불길하게 여겨 "크누드의 죽음을 알리는 자는 죽이겠다"고 맹세했다.시간이 흘러 크누드는 잉글랜드에서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튀라 왕비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다. 튀라 왕비는 큰 방 벽에 검은 옷을 걸고, 시종들에게도 검은 옷을 입혀 고름 왕을 기다렸다. 고름 왕이 방에 들어오자 튀라 왕비는 고름 왕의 겉옷을 벗기고, 상복 겉옷을 고름 왕의 어깨에 걸쳤다. 고름 왕은 "나에게 크누드의 죽음을 알리는 자가 너냐?"라고 물었지만 튀라 왕비는 "그것을 말한 것은 당신이지, 제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18][19]
5. 2. 크누드의 죽음과 티라 왕비의 지혜
시간이 흘러 크누드는 잉글랜드에서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티라 왕비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다.[18][19] 티라는 큰 방 벽에 검은 옷을 걸고, 시종들에게도 검은 옷을 입혀 고름을 기다렸다. 고름이 방에 들어오자 티라는 고름의 겉옷을 벗기고, 상복의 겉옷을 고름의 어깨에 걸쳤다. 고름은 "나에게 크누드의 죽음을 알리는 자가 너냐?"라고 물었지만 티라는 "그것을 말한 것은 당신이지, 제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18][19]아릴드 후이트펠트는 그의 저서 『덴마크 왕국의 연대기』에서 이와 관련된 전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티라 왕비는 왕궁에 검은 천을 걸고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했다. 고름이 궁에 들어서자 그는 깜짝 놀라 이 애도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티라 왕비는 "주군, 왕에게는 하얀 매 한 마리와 회색 매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얀 매는 멀리 날아가 다른 새들에게 공격을 받아 아름다운 깃털이 뽑히고 이제는 쓸모가 없습니다. 한편, 회색 매는 계속해서 왕의 식탁을 위해 가금류를 잡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름은 즉시 왕비의 비유를 이해하고 "내 아들이 틀림없이 죽었구나. 덴마크 전체가 슬퍼하고 있으니!"라고 외쳤다. 티라는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고름은 크누드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여 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Lund, N. (2020), p. 147
[2]
Youtube
Om slaget vid Fyrisvallarna
https://www.youtube.[...]
2020-10-25
[3]
서적
[[サクソ・グラマティクス]]の記述による表現。[[谷口幸男]]訳『[[デンマーク人の事績]]』(東海大学出版会、1993年)第9の書11節421頁 [[#小澤2004|小澤 (2004)]],p.10
[4]
웹사이트
THE HISTORY OF THE DANISH MONARCHY
http://kongehuset.dk[...]
デンマーク王室公式サイト(英語)
2014-11-20
[5]
간행물
『週刊ダイアモンド 2016 9/17 36号』
ダイヤモンド社
[6]
서적
[[#小澤2004|小澤 (2004)]],p.1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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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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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小澤2012|小澤 (2012)]], p.172
[10]
서적
[[#adam|『History of the Archbishops of Hamburg-Breme』]], p.44
[11]
서적
[[#小澤2004|小澤 (2004)]],p.5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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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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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웹사이트
デンマーク人の事績
http://wayback-01.kb[...]
デンマーク王立図書館
2014-11-21
[1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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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小澤2004|小澤 (2004)]],p.5, p.14
[17]
서적
[[#小澤2004|小澤 (2004)]],p.8
[18]
서적
[[#ヘルムス|ヘルムス『歴史教科書』]], pp.63-64
[19]
문서
『Gesta Danorum(デーン人の事績)』9巻
https://en.wikisourc[...]
[20]
웹인용
The Royal Lineage - The Danish Monarchy
https://web.archive.[...]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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