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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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는 8세기부터 시작되어 12세기까지 진행되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함부르크-브레멘 선교단을 시작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각 지역에서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교회의 영향도 받았다. 덴마크에서는 하랄 블루투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노르웨이에서는 올라프 1세가 기독교를 강요하며 기독교화가 이루어졌다. 스웨덴은 안스가르의 선교에도 불구하고 12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고틀란드, 옘틀란드,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개종은 정치적 동기, 물질적 유인, 영적인 이유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8세기까지 사미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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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 | |
---|---|
개요 | |
주제 |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로의 전환 |
배경 | |
시기 | 8세기 ~ 12세기 |
이전 종교 | 북유럽 신화 |
관련 인물 | 앙스가르 올로프 트뤼그바손 올라프 2세 크누트 대왕 아달브레트 |
과정 | |
선교 활동 |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왕족들의 개종이 중요한 역할 |
정치적 영향 | 기독교는 왕권 강화와 국가 통합에 기여 |
문화적 변화 | 전통적인 북유럽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합 |
주요 사건 및 인물 | |
앙스가르의 선교 | 9세기, 덴마크와 스웨덴 지역 선교 활동 |
예링 돌 | 고름 노왕과 하랄 1세가 세운 돌로, 덴마크의 기독교화를 상징 |
올라프 트뤼그바손 | 노르웨이의 기독교화 추진 |
올라프 2세 | 노르웨이의 수호성인, 기독교 확산에 기여 |
크누트 대왕 |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통치하며 기독교 확산 |
결과 및 영향 | |
사회 변화 | 기독교 윤리와 문화가 사회 전반에 확산 |
법률 및 제도 변화 | 기독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법률과 제도 도입 |
건축 및 예술 | 교회 건축과 기독교 예술 발전 |
북유럽 신화의 쇠퇴 | 점차적으로 북유럽 신화 신앙이 사라짐 |
국가별 기독교화 | |
덴마크 | 하랄 1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독교 수용 |
노르웨이 | 올라프 트뤼그바손과 올라프 2세에 의해 기독교화 추진 |
스웨덴 |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기독교 수용 |
아이슬란드 | 1000년경, 알싱에서 기독교 수용 결정 |
기타 | |
관련 용어 | 바이킹 시대 고대 노르드 스칸디나비아사 |
2. 함부르크-브레멘 선교단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는 831년 설립되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다.[100] 845년 호릭 1세가 함부르크를 약탈하면서 대주교구는 브레멘으로 이전되었다.[100]
948년,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는 덴마크 남부에 리베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를 설치하여 선교 활동을 강화했다.[102]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재임 시기부터 교황청이 북유럽에 직접 관여하면서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103] 1103년에서 1104년에는 룬드에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관할하는 대주교구가 설치되면서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다.[103]
윌리브로드와 하랄트에 대한 이야기는 북유럽 신화적 요소를 기독교 이야기에 섞고 있으며, 이는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의 역사'에도 나타난다.
2. 1. 초기 선교 활동




덴마크의 초기 선교 활동은 '프리슬란트인의 사도' 윌리브로드가 시작했으며, 그는 당시 덴마크 영토였던 슐레스비히에서 선교를 했다.[95] 그는 온겐두스 왕 재위 기간인 710년과 718년 사이 어느 시기에 프리슬란트 북쪽으로 향했다.[96] 윌리브로드와 동료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온겐두스는 경의를 표했지만 신앙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앙간튀르는 젊은이 30명을 윌리브로드와 함께 프리슬란트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마 윌리브로드는 이들을 가르치고 데인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그의 노력에 이들 중 일부를 동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97]
한 세기 뒤인 823년, 랭스 대주교 에보와 후대에 브레멘 대주교가 된 빌레리히를 포함한 세례를 받은 일부 사람들이 덴마크를 방문했다. 에보는 개종을 목적으로 덴마크를 두 차례 재방문했으나, 기록상에 남은 성공은 없다.[97]
826년에 위틀란트의 왕 하랄트 클락은 덴마크의 또 다른 왕 호릭 1세로 인해 덴마크에서 달아나야 했다. 하랄트는 위틀란트의 땅을 되찾는 도움을 받기 위해 독일의 루트비히 1세 황제에게 찾아갔다. 루트비히 1세는 옛 신들을 포기한다면 프리슬란트의 공작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랄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를 비롯해서 그의 식솔들과 데인인 400명은 잉겔하임암라인에서 세례를 받았다.[98] 하랄트가 위틀란트로 돌아갈 때, 루트비히 황제와 랭스의 에보는 수도사 안스가르에게 하랄트와 동행하고 개종자들의 기독교 신앙이 제대로 퍼져있는 지를 감독하라 맡겼다.[99] 하랄트 클락이 또 다시 호릭 1세에게 덴마크에서 쫓겨나자, 안스가는 덴마크를 떠나 스웨덴인들에게 선교를 집중하기로 하였다.
안스가는 829년에 비르카로 향하여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종 활동은 비르카의 고위 관료이자 그곳 왕의 고문으로 묘사되는 헤리가르의 개종이었다. 831년에 함부르크 대주교구가 설립되었고 스칸디나비아를 개종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100]
호릭 1세가 안스가가 대주교로 있던 함부르크를 845년에 약탈하였다. 그곳에 있던 대주교구는 브레멘으로 이전되었다.[100] 같은 해에 비르카에서 전통 신앙자들의 폭동이 있었고 이 결과로 니타르트의 순교가 벌어졌고 현지의 선교 주교 Gautbert는 달아나야만 했다.[101] 안스가는 그의 첫 방문 때 얻은 기독교 공동체를 재건하러 854년에 비르카로, 860년에 덴마크로 돌아갔다.
덴마크에서 안스가는 당시의 왕인 호릭 2세 (854년에 살해당하고 기독교를 반대했던 호릭 1세가 아님)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는 안스가에 최초의 기독교 채플을 위한 헤데비 내 부지를 마련해주었다. 두 번째 교회는 몇 년 뒤 덴마크 서부 해안에 있는 리베에 세워졌다. 리베는 중요한 교역 도시였고, 이에 따라 덴마크 남부는 948년에 함부르크-리베 대주교 관할의, 리베를 중심으로 한 교구가 세워졌다. 리베의 첫 주교 Leofdag는 같은 해에 리베강을 건너던 중에 살해당했다.[102]
북유럽 지역의 기독계 세계에 대한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우위는 교황청이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임기를 시작으로 직접적으로 북유럽을 관여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103] 이 경향에 있어 중대한 한 발자국은 1103년–04년 룬드에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관리하는 대주교구를 설치한 것이었다.[103]
2. 2. 안스가의 선교
8세기 말부터 북유럽에서 온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자주 습격하여 잉글랜드 등은 그들에 대한 대응에 고심했고, 약탈 행위를 멈추게 하기 위해 바이킹의 기독교 개종을 시도하게 되었다.[41] 878년, 바이킹의 구스룸 (en)이 알프레드 대왕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에 바이킹 거주지를 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 지역의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42]기록상의 덴마크 내 선교 활동은 '프리슬란트인의 사도' 윌리브로드로 시작됐으며, 그는 당시에 덴마크 영토였던 슐레스비히에서 선교를 했었다.[95] 그는 온겐두스 왕 재위 기간인 710년과 718년 사이 어느 시기에 프리슬란트의 북쪽으로 향했다.[96] 윌리브로드와 동료들은 성과를 거의 거두지 못했는데 온겐두스는 경의를 표했으나 신앙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앙간튀르는 젊은이들 30명을 윌리브로드와 함께 프리슬란트로 돌아가는 걸 허락했다. 아마 윌리브로드의 의도는 이들을 가르치고 데인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그의 노력에 이들 중 일부를 동참시키는 것이었다.[97] 한 세기 뒤에 랭스 대주교 에보와 후대에 브레멘 대주교가 된 빌레리히가 세례를 받은 일부 사람들과 함께 823년에 덴마크를 방문했다. 그는 개종 목적으로 덴마크를 두 차례 재방문했으나 기록상에 남은 성공은 없다.[97]
826년에, 위틀란트의 왕 하랄트 클락은 덴마크의 또 다른 왕 호릭 1세로 인해 덴마크에서 달아나야만 했다. 하랄트는 위틀란트의 땅을 되찾는 도움을 받기 위해 독일의 루트비히 1세 황제에게 찾아갔다. 루트비히 1세는 옛 신들을 포기한다면 프리슬란트의 공작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랄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비롯해서 그의 식솔들과 데인인 400명은 잉겔하임암라인에서 세례를 받았다.[98] 하랄트가 위틀란트로 돌아갈 때, 루트비히 황제와 랭스의 에보는 수도사 안스가에게 하랄트와 동행하고 개종자들의 기독교 신앙이 제대로 퍼져있는 지를 감독하라 맡겼다.[99] 하랄트 클락이 또 다시 호릭 1세에게 덴마크에서 쫓겨나자, 안스가는 덴마크를 떠나 스웨덴인들에게 선교를 집중하기로 하였다. 안스가는 829년에 비르카로 향하여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종 활동은 비르카의 고위 관료이자 그곳 왕의 고문으로 묘사되는 헤리가르의 개종이었다. 831년에 함부르크 대주교구가 설립되었고 스칸디나비아를 개종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100]
호릭 1세가 안스가가 대주교로 있던 함부르크를 845년에 약탈하였다. 그곳에 있던 대주교구는 브레멘으로 이전되었다.[100] 같은 해에 비르카에서 전통 신앙자들의 폭동이 있었고 이 결과로 니타르트의 순교가 벌어졌고 현지의 선교 주교 Gautbert는 달아나야만 했다.[101] 안스가는 그의 첫 방문 때 얻은 기독교 공동체를 재건하러 854년에 비르카로, 860년에 덴마크로 돌아갔다. 덴마크에서 그는 당시의 왕인 호릭 2세 (854년에 살해당하고 기독교를 반대했던 호릭 1세가 아님)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는 안스가에 최초의 기독교 채플을 위한 헤데비 내 부지를 마련해주었다. 두 번째 교회는 몇 년 뒤 덴마크 서부 해안에 있는 리베에 세워졌다. 리베는 중요한 교역 도시로, 이에 따라 덴마크 남부는 948년에 함부르크-리베 대주교 관할의, 리베를 중심으로 한 교구가 세워졌다. 리베의 첫 주교 Leofdag는 같은 해에 리베강을 건너던 중에 살해당했다.[102]
2. 3.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쇠퇴
북유럽 지역의 기독교 세계에 대한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영향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재임 시기부터 교황청이 북유럽에 직접 관여하면서 점차 약화되었다.[103]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계기는 1103년에서 1104년에 걸쳐 룬드에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관할하는 대주교구가 설치된 것이었다.[103]3. 스칸디나비아 국가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는 지역별, 국가별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 덴마크: 8세기 초 프리지아의 사도 윌리브로르드가 슐레스비히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8][9] 9세기 랭스의 에보 대주교가 덴마크를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었지만, 역시 큰 성공은 없었다.[10] 하랄 킬라크 왕은 경건왕 루이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안스가르가 덴마크 선교를 이어갔지만, 호리크 1세에 의해 추방되었다.[11][12] 이후 호리크 2세의 신뢰를 얻어 헤데비와 리베에 교회를 세웠다.[15] 1103-04년 룬드에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위한 대주교구가 설립되면서 덴마크는 기독교화의 중심지가 되었다.[16]
- 노르웨이: 10세기 선량왕 호콘이 잉글랜드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1][62] 하랄 회색털 왕은 기독교도였지만, 적극적인 전도는 하지 않았다.[63] 호콘 시구르손은 이교를 부활시켰으나,[64] 올라프 트뤼그바손이 강제적인 방법으로 기독교화를 추진했다.[65] 스볼데르 해전 이후 이교 신앙이 잠시 회복되었지만,[68] 올라프 2세 치세에 기독교가 확고해졌다.[70] 니다로스는 성 올라프의 순례지가 되었다.[72]
- 스웨덴: 9세기 안스가르가 비르카에 교회를 세웠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49][43] 올로프 셰트코눙은 최초의 기독교도 왕이었지만,[62] 이교 신앙과 공존했다. 1080년대 블로트-스벤과 잉에 1세의 갈등은 종교적 대립을 보여준다. 12세기에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기독교화되었지만, 스몰란드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이교 신앙이 남아있었다.
thumb (달비)]]
3. 1. 덴마크
덴마크의 기독교화는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9세기부터 1060년대까지 바이킹 약탈에 참여하면서 덴마크인들은 기독교인들과 접촉했다. 부족 사회였던 덴마크에서 지역 족장들은 자신의 씨족과 친족들을 위해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태도를 결정했다. 바이킹 약탈을 통해 기독교인 노예나 미래의 아내를 데려오면서 많은 평범한 덴마크인들이 처음으로 기독교인들과 가까이 접촉하게 되었다.덴마크의 족장들과 왕들이 노르망디, 잉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에 관여하면서 기독교 신민들에게 온화한 태도를 취했다. 왕이나 족장의 개종은 동맹을 굳건히 하거나 강력한 기독교 이웃 국가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로 보이기도 했다. 강력한 족장(야를)이나 왕의 개종 이후 그들의 백성들 사이에서 대규모 개종이 일어난 사례도 있었다. 매우 드물게는 왕이나 유력자들 앞에서 기독교 성인들이 일으킨 시련 재판 기적을 통해 개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덴마크인들이 돌이나 나무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월한 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우상을 파괴하지 않았다. 비보르, 레이레, 룬드, 오덴세에 있는 대규모 종교 지역들은 덴마크의 대규모 집회 장소(landsting)이기도 했다. 종교 장소들은 보통 신성한 샘, 너도밤나무 숲, 멀리 떨어진 구릉 정상 등에 위치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장소들에 채플을 짓는 것을 요청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장소의 종교적 중요성은 채플 자체로 옮겨갔다.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덴마크인들은 두 신앙 체계를 혼합했다. 땅의 정령들(landvætter)을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가정들은 기독교 이전 시대처럼 공물을 두었다. 신성한 샘(kilder)은 지역 성인과 같이 축성되었고 종교 생활은 예전처럼 계속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지 근처에 교회를 짓거나 교회 건축을 위해 성림의 나무를 사용하기도 했다. 토르의 망치 표시는 십자가에 쉽게 흡수되었다.
덴마크에는 지역 주교들에 의해 시성되거나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되는 여러 성인들이 있다. 비보르에는 성 콀트, 오르후스에는 성 닐스 (성 니콜라스), 오덴세에는 성 크누드 (Sanct Knud)가 있다. 가누토 라바드, 안스가, 벤쉬셀의 성 퇴게르, 성 빌헬름, 리베의 성 Leofdag 등도 덴마크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생전에 졸음왕이라고 알려진 고름 가믈리 왕은 덴마크 전역의 최초의 왕이었다. 그 이전의 왕들은 데인족 전체에 영향력이 없는 지역 왕들이었다. 덴마크는 아이더강에 이르는 위틀란트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셸란섬, 퓐섬, 랑엘란섬 등의 본토 섬들, 인근의 작은 섬들, 스코넬란드로 구성되었다. 고름은 '강인한 이교도'라 말해지지만, 왕비 티라의 영향력은 기독교인들이 어려움 없이 사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옐링에 있는 고름과 티라의 고분에는 은잔을 포함하여 전통 신앙과 기독교 도상이 혼합된 유물이 있다.[104] 고름과 티라의 아들 하랄드 블라톤 왕은 옐링의 룬석에 "데인족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다"라고 자랑했다. 하랄드 블라톤은 쿠름순 디스크의 명각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디스크 뒷면의 팔각형 솟아난 부분 중심부에는 하랄드 블라톤이 기독교도임을 암시하는 십자가가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덴마크 왕은 하랄 클락이며, 경건왕 루트비히의 지원을 받기 위해 망명 기간에 세례를 받았다.[105] 림베르트는 그가 선교사들과 동행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106] Sanmark는 그가 실제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지 않으며 덴마크 개종에 대한 그의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본다.[105]
기독교는 하랄드 블라톤의 세례 후에야 덴마크에서 강한 영향력을 얻었다.[105] 초기에 하랄드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민중 접촉을 허가했음에도 전통신앙주의자였다. 960년경, 블라톤은 기독교로 개종했으며,[105] 프리슬란트 수도사 포포(Poppo)가 불로 뜨겁게 데운 철 덩어리를 상처 없이 손으로 쥐었다고 전해진다. 하랄드의 딸 군힐드와 아들 스베인 튜구스케그도 세례를 받았다. 독일 역사가들은 하랄드가 스베인 튜구스케그의 대부인 오토 1세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의 개종 결과 중 하나는 덴마크 왕들이 옐링의 왕궁을 버리고 로스킬레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스베인은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옐링에 돌을 세우는 데 과도한 시간과 돈을 쓰던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랄드 왕이 여행자에게 무거운 화물을 옮긴 것을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여행객은 "저는 스베인이 당신한테서 덴마크 전부를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이시여.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무거운지 판단해보십시오."[107]라고 답했다. 하랄드는 길에 놓여있는 돌을 내버려두었고, 스베인이 왕국 전체를 차지하는 데 거의 성공한 것을 깨달았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985년에 하랄드는 화살 때문에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그의 유해는 로스킬레의 통나무 교회에 묻혔고, 로스킬레 대성당의 기둥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베인 튜구스케그는 신성 로마 제국한테서 덴마크 내 교회 지배권을 장악하려 했고, 독일 역사가들에게 비방을 당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타락했고, 잉글랜드 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스베인은 룬드의 대성당에 토지를 내려주었다. 그의 군대는 애설레드가 일으킨 성 브릭시오 축일의 학살 이후 잉글랜드 침공 때 기독교 교회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스베인이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왕이 된 뒤에는 교회를 향해 온화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했다.
11세기 초쯤, 크누드 4세 집권기에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고 말해진다. 성 가누토라고 알려진 크누드 4세는 귀족들과 농민들이 십일조를 강요한 것에 반란을 일으킨 후 1086년에 성 알반스 교회 내부에서 살해당했다. 1188년 성 가누토의 시성은 덴마크 내 기독교의 승리를 나타낸다. 성 가누토의 유해가 오덴세 대성당으로 옮겨졌을 때, 3일간 단식에 들어갔다.
덴마크 국왕이 덴마크 국교회의 명목상 수장이 되면서 덴마크가 루터교 국가가 되던 1536년부터 국왕과 귀족들 그리고 교회들 간의 분쟁 (''Folkekirke'')이 덴마크 역사에서 많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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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선교 활동 기록은 프리지아의 사도 윌리브로르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당시 덴마크의 일부였던 슐레스비히에서 설교했다.[8] 그는 프리지아에서 옹게두스 왕의 통치 기간인 710년에서 718년 사이에 북쪽으로 이동했다.[9] 윌리브로르드와 그의 동료들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왕은 존경심을 표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앙간티르는 30명의 젊은이들이 윌리브로르드와 함께 프리지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10] 한 세기 후 랭스의 에보 대주교는 823년 덴마크 방문 동안 몇몇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선교를 위해 두 번 덴마크로 돌아왔지만 성공했다는 기록은 없다.[10]
826년, 윌란트의 왕 하랄 킬라크는 덴마크의 다른 왕인 호리크 1세에 의해 덴마크에서 쫓겨났다. 하랄은 윌란트의 땅을 되찾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독일의 루이 1세 황제에게 갔다. 루이 1세는 하랄이 옛 신들을 포기하면 그를 프리시아 공작으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하랄은 동의했고, 그의 가족과 그와 함께한 400명의 덴마크인들은 라인강 잉겔하임에서 세례를 받았다.[11] 하랄이 윌란트로 돌아왔을 때, 루이 황제와 랭스의 에보는 수도사 안스가르에게 하랄과 함께 가서 개종자들 사이에서 기독교를 감독하도록 임명했다.[12] 하랄 킬라크가 호리크 1세에 의해 다시 덴마크에서 쫓겨나자, 안스가르는 덴마크를 떠나 스웨덴에 집중했다. 안스가르는 829년 비르카로 가서 그곳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831년 함부르크 대교구가 설립되어 스칸디나비아 선교의 책임을 맡았다.[13]
호리크 1세는 845년 안스가르가 대주교가 된 함부르크를 약탈했다. 대교구의 자리는 브레멘으로 옮겨졌다.[13] 같은 해 비르카에서 이교도 반란이 일어나 니트하르트가 순교하고 거주하던 선교사 가우트베르트 주교가 도망치는 결과를 낳았다.[14] 안스가르는 854년 비르카로 돌아왔고 860년 덴마크로 돌아와 첫 방문의 일부 성과를 재건했다. 덴마크에서 그는 당시 왕인 호리크 2세 (854년에 살해되어 기독교에 반대했던 호리크 1세가 아님)의 신뢰를 얻어 첫 기독교 예배당을 위해 헤데비 (후에 슐레스비히로 대체될 프로토 타운)에 땅을 받았다. 몇 년 후 덴마크 서해안의 리베에 두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리베는 중요한 무역 도시였고, 그 결과 남부 덴마크는 948년에 리베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가 되었고, 함부르크-브레멘 대교구의 일부가 되었으며, 초대 주교인 성 레오프다그는 그 해 리베 강을 건너다 살해당했다.[15]
북부의 교회 생활에 대한 함부르크-브레멘 대교구의 지배력은 교황 그레고리 7세의 교황직부터 교황청이 직접 북부에 더 많이 관여하면서 점차 쇠퇴했다.[16] 이 방향의 중요한 단계는 1103-04년에 룬드에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위한 대주교구를 설립한 것이었다.[16]
3. 2. 노르웨이
선량왕 호콘이 10세기에 잉글랜드에서 성장하여 노르웨이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최초의 기록된 시도를 했다.[61][62] 그러나 그의 노력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호콘의 이복 형인 〈피의 도끼 에이리크〉는 노르웨이를 떠나 브리튼 제도로 가서 앵글로색슨의 교회에서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에이리크의 아들 하랄 회색털 왕 (재위 961년 - 976년)도 기독교도였지만 노르웨이의 왕이 된 후 이교 사원을 파괴한 적은 있었지만 기독교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63]하랄 회색털 왕의 뒤를 이은 이는 강력한 이교도인 호콘 시구르손 야를 (재위 971년 - 995년)이었다. 그는 신전을 재건함으로써 이교를 부활시켰다. 덴마크의 하랄 1세가 975년경 호콘에게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려 했을 때, 호콘은 덴마크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깨뜨렸다. 덴마크의 침략군은 986년 히외링가보그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호콘은 기독교를 버렸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이교도로 돌아섰으며, 거주하는 기독교도들도 노르웨이를 떠났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이교 신앙은 회복되었다.[64]
995년, 올라프 트뤼그바손은 노르웨이의 왕 올라프 1세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된 올라프 1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국가를 기독교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올라프 1세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일된 권력의 확립을 목표로 했지만, 기독교를 왕권의 토대로 삼았다. 이교도의 신전을 파괴하고 이교도의 저항자를 고문하거나 살해하면서, 올라프 1세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노르웨이의 모든 지역을 기독교화하는 데 성공했다.[65] 올라프 1세의 영향력은 서방의 북유럽인 정착지로 확대되었다. 왕의 사가는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아이슬란드 그리고 그린란드는 기독교화된 것이 올라프 1세의 공적이라고 한다.
1000년 스볼데르 해전에서 올라프가 패배한 후, 라데 야를의 통치 하에 노르웨이에서 이교 신앙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호콘 시구르손의 아들 에이리크 호콘손과 스베인 호콘손은 야를의 칭호를 얻은 후 곧 기독교도가 되었지만,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이교를 배제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68] 올라프 2세의 1015년부터 1028년에 걸친 치세에서 기독교는 확고해졌다. 올라프 2세는 이교도의 신전을 파괴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교회의 성직자 조직에서 왕의 지위를 최상위에 두었다. 이 때문에 이교 신앙의 사제였기 때문에 민회나 분쟁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호족들의 반발을 샀다. 호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올라프 2세를 공격했고,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그를 쓰러뜨렸다.[70] 하지만 올라프 2세는 죽은 후에도 그의 유해가 훼손되지 않는 기적 등으로 성인이 되었다.[71] 노르웨이의 니다로스(현재의 트론헤임)는 스칸디나비아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순례자가 찾아오는 로마나 예루살렘에 비견되는 성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 올라프의 업적을 이야기했는데, 그것들은 12세기에 니다로스 대교구의 에이스타인 에일렌손에 의해 『파시오 올라비』라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의 번역본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먼 곳에서도 발견되어 성 올라프 신앙의 확산 방식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되고 있다.[72] 교회와 왕권은 함께 힘을 더해갔다. 교회는 기독교를 침투시키기 위해 왕권의 지원을 받았고, 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교리를 퍼뜨렸으며, 왕은 교회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교회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마침내 사람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집단으로 뭉치게 되었다.[73]
3. 3. 스웨덴
스웨덴의 기독교화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830년 안스가르가 비르카에 교회를 세웠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49][43] 1세기 후 함부르크 대주교 운니의 선교도 실패했다. 10세기에는 잉글랜드 선교사들이 베스테르예틀란드에 진출했다.최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9세기 예탈란드에 이미 기독교인이 있었으며, 기독교는 남서쪽에서 북쪽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24]
990년대에 왕위에 오른 올로프 셰트코눙은 스웨덴 최초의 기독교도 왕이었다.[62] 그는 웁살라의 이교 신앙 지지자들과 상호 관용 협정을 맺었다. 11세기 말까지 기독교와 이교는 공존했다. 올로프는 우플란드에서 기독교를 강요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000년경 후사비 근처 스카라에 주교 관할구를 설치했다.[26][27] 1060년대 스텐킬 왕에 의해 시그투나에 또 다른 주교 관할구가 설치되었고,[28] 1134년에서 1140년 사이에 감라웁살라로 이전되었다.[28] 1164년 웁살라에 스웨덴 대교구가 설치되었다.[28][29]
1080년대 블로트-스벤과 잉에 1세 간의 갈등은 기독교도와 이교도 사이의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왕 잉에는 웁살라의 전통 이교 제사를 중단하려 했고, 이는 반발을 일으켜 잉에는 망명해야 했다. 블로트-스벤은 제사 유지를 조건으로 왕이 되었으나, 3년 후 잉에가 돌아와 그를 살해했다. ''헤르보르의 사가''는 잉에가 스웨덴의 기독교화를 완료했다고 전하지만, ''헤임스크링글라''는 잉에가 에리크 오르셀을 제거해야 했다고 한다.[30]
11세기 동안 이교와 기독교가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 전환에 대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31] 그러나 고대 이교 의식은 법적 절차에서 중요했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면 새로 기독교화된 스웨덴인들이 이교를 지지하며 반발했을 것이다.[31] 망누스 3세의 베스테르예틀란드 침공 때 잉에는 레이당 병력 3,600명을 소집해 노르웨이군을 몰아냈다.[32]
스웨덴은 12세기에 공식적으로 기독교화되었지만, 시구르 1세는 12세기 초 스몰란드를 상대로 십자군을 일으켜 현지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
스톡홀름 근처 로뵌섬의 매장지 발굴 결과, 실제 기독교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최소 150~200년이 걸렸음을 보여준다.[33]
3. 4. 고틀란드, 옘틀란드,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기타 지역
고틀란드에는 구탈라겐으로 알려진 고틀란드어 법전이 1220년대부터 1595년까지 공식적으로 쓰였다. 실제로는 1645년까지 쓰였다. 이 법전은 블로트 행위가 벌금으로 처벌받을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121]옘틀란드 중심부의 프뢰쇤섬에 서있는, 세상에서 가장 북단에 있는 룬석인 프뢰쇠 룬석에서, 아우스트마르(Austmaðr)라는 사내가 룬석이 세워진 1030년-1050년쯤에 이 지역을 기독교화시켰다고 한다.[85] 아우스트마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 지역 팅그인 얌타모트의 로그마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고학 발견물을 통해 판단한 바, 기독교는 11세기 동안 핀란드에서 발판을 마련했다. 핀란드에서의 기독교화는 스웨덴으로부터의 지배 진행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1155년 또는 1157년에 스웨덴 왕 에리크가 십자군을 명분으로 핀란드 남서부에 침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웁살라 주교 성 헨리크가 핀란드 사람들의 세례를 맡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서 암살되었다.[87] 가톨릭 교회는 12세기의 스웨덴 영향력 증가와 13세기의 비르예르 얄의 핀란드 십자군을 통해 강화되었다. 핀란드는 그때부터 19세기까지 스웨덴의 영토였다.
파파르로 알려진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9세기에 노르드인들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기 앞서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한다.[75]
올라프 1세가 아이슬란드인들을 불모로 잡은 뒤로, 10세기 아이슬란드에서는 기독교 세력과 이교 세력 간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폭력을 동반한 충돌들은 이들 간의 이교 측 지도자인 소르게이르 리오스베트닝가고디가 중재를 하며 서기 1000년 알팅그에서의 결정으로 막아졌다. 하루 내내 그리고 하룻밤 동안에 중재를 한 그는 아이슬란드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하고 동시에 개인의 전통 신앙 숭배는 계속해서 용인하기로 택했다.[76][77]
4. 개종의 동기
스칸디나비아에서 일부 개종은 정치적, 물질적 이득을 위해, 또 다른 일부는 영적 이유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프랑크 귀족들이 세례 선물로 주는 값비싼 세례용 의복을 탐내는 경우가 있었다.[123] 덴마크의 하랄 블라톤 왕은 독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기독교를 통해 통치에 도움을 받고자 개종했다. 선교 주교들은 글을 쓸 수 있었고, 독일과 잉글랜드에서 왕실 업무 경험이 있어 귀중한 조언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123] 또한, 이교 왕들은 기독교의 부에 매혹되어 개종하기도 했다.[124]
5. 최후의 이교도
1721년, 새로운 덴마크-노르웨이 식민지가 그린란드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토착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는 이웃 국가들에서 개종이 이루어진 뒤에도 오랜 기간 토착 종교를 유지했던 사미인들을 개종시키려는 활동들이 있었다.[125] 일부 사미인들은 18세기까지 개종하지 않았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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