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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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스페인과 필리핀에서 행정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스페인에서는 레온, 무르시아, 로르카, 카르타헤나의 행정관을 역임했으며, 필리핀 총독으로 임명되어 마닐라의 도시 건설, 중국과의 교역 증진, 일본의 침략 위협에 대응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593년 몰루카 제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선상 반란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총독직 승계를 두고 혼란이 일어났으며,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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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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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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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
출생일 | 1519년 1월 1일 |
출생지 | 베탄소스, 갈리시아, 카스티야 왕관령 |
국적 | 갈리시아인 |
시민권 | 스페인 |
사망일 | 1593년 10월 25일 |
사망지 | 카카, 바탕가스주, 필리핀 제도 총독부 (현재의 바탕가스주 팅로이) |
직책 | |
직함 | 필리핀 총독 겸 총사령관 |
통치자 | 펠리페 2세 |
뉴 스페인 부왕 | 루이스 데 벨라스코, 살리나스 후작 1세 |
임기 시작 | 1590년 6월 1일 |
임기 종료 | 1593년 10월 25일 |
순서 | 제7대 필리핀 총독 겸 총사령관 |
이전 | 산티아고 데 베라 |
이후 | 페드로 데 로하스 |
2. 스페인에서의 행정 경력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비베이로에서 태어났다. 1579년 1월 30일, 레온 행정장관에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육류시장, 분수, 거리 등을 조성하였다.
1589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다스마리냐스를 필리핀 행정장관 및 총독으로 임명하고, 총독직 1년 보수를 1만 카스티야두카도까지 올렸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하였다.
1584년 9월 27일부터 1587년 1월 1일까지는 무르시아, 로르카, 카르타헤나의 시장을 역임했다.
1589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다스마리냐스를 필리핀 행정장관 및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를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하였다. 또한 총독직 1년 보수를 10000ducado로 올렸다.
펠리페 2세는 다스마리냐스에게 마닐라 재판소를 견제할 것과, 식민지 수비를 위해 국왕의 비용으로 400명의 수비군을 창설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필리핀 현지 스페인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589년 12월 8일, 다스마리냐스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으로 임명된 루이스 데 벨라스코와 함께 누에바 에스파냐(오늘날 멕시코)로 향했다. 1590년 3월 1일, 아카풀코를 떠나 같은 해 5월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다스마리냐스 본인은 6월 1일에 도착했다고 기록하였다.)
3. 필리핀 총독 임명 (1589년)
1589년 12월 8일, 다스마리냐스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으로 임명된 루이스 데 벨라스코와 함께 누에바 에스파냐로 향하였다. 1590년 3월 1일 아카풀코를 떠나, 5월(다스마리냐스 본인은 6월 1일이라고 기록)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3. 1. 펠리페 2세의 지시사항
펠리페 2세는 다스마리냐스에게 필리핀 현지 스페인인들이 요구한 마닐라 재판소(Audiencia of Manila, 혹은 마닐라 아우디엔시아)를 견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펠리페 2세는 식민지 수비를 위해 국왕의 비용으로 400명의 수비군을 창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4. 필리핀 총독 재임 (1590년-1593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1590년부터 1593년까지 필리핀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필리핀의 방어와 발전에 힘썼다. 부임 직후 재판소를 견제하고 수비군을 창설하였으며, 여러 토목 사업을 추진했다. 마닐라 시를 둘러싸는 석재 성벽을 쌓아 1593년에 완공하고 산티아고 성채를 재건했다. 또한 석재로 된 마닐라 대성당을 건설하고 시민들에게 석재 주택 건설을 장려했다.
중국과의 교역을 증대시키고 스페인 본국과의 소통을 강화했다. 갤리선(galley) 몇 척을 건조하여 해안 방어에 사용했고, 삼발레스 지역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를 카가얀 군사 원정대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루손섬 일부를 탐험하게 했다. 마닐라에 대포 주조창을 설립하려 했으나 기술 숙련공 부족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부임 첫 해, 다스마리냐스는 재판소의 총책임자와 재판관들을 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위 재판관 페드로 데 로하스는 국왕의 명에 따라 마닐라에 남아 재판 업무를 관장하는 부관 배석 판사로 남았고, 이후 멕시코시티 재판관 및 시장을 겸임하는 알칼데(alcalde)로 임명되어 떠났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앞서 다스마리냐스에게 항복과 조공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고, 히데요시는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1593년 캄보디아 왕은 사신 디에고 벨로소를 보내 우호와 교역을 제안하며 시암의 위협에 대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다스마리냐스는 선물만 보내고 지원 요청에 대한 확답을 미뤘지만, 이는 훗날 스페인이 시암-캄보디아 전쟁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1년 5월 12일, 마닐라의 부호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다스마리냐스의 허가를 받아 민다나오 정복 사업을 추진했다.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비용으로 정복 사업을 진행하는 대신, 정복 지역의 행정장관 임명권을 두 번 얻는 특권을 받았다.
1592년 스페인에서 온 주교 살라자르는 부임 후 다스마리냐스와 갈등을 빚었다.
4. 1. 주요 업적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필리핀 총독으로 부임한 후, 마닐라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고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1593년에는 마닐라를 둘러싼 석재 성벽을 완공하고 산티아고 성채(Fort Santiago)를 재건하였다. 또한 석재로 된 마닐라 대성당(cathedral of Manila)을 건설하고 시민들에게도 석재 주택 건설을 장려하여 도시 미관을 개선했다.다스마리냐스는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하고 스페인 본국과의 소통을 강화했다. 해안 방어를 위해 갤리선(galley) 여러 척을 건조하고, 삼발레스(Zambales) 지역의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Luis Pérez Dasmariñas)를 카가얀(Cagayan) 군사 원정대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루손섬(island of Luzón) 일부 지역을 탐험하게 했다. 마닐라에 대포 주조창을 설립하려 했으나, 기술자 부족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592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조선 침략에 앞서 다스마리냐스에게 항복과 조공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히데요시는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복을 요구했지만, 다스마리냐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한편, 1593년 캄보디아 왕은 사신 디에고 벨로소(Diego Belloso)를 보내 우호와 교역을 제안하며 시암(Siam)의 위협에 대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다스마리냐스는 선물만 보내고 지원 요청에 대한 확답을 미뤘지만, 이는 훗날 스페인이 시암-캄보디아 전쟁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1년 5월 12일, 마닐라의 부호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Esteban Rodríguez de Figueroa)는 다스마리냐스의 허가를 받아 민다나오(Mindanao) 정복 사업을 추진했다.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비용으로 정복 사업을 진행하는 대신, 정복 지역의 행정장관 임명권을 두 번 얻는 특권을 받았다.
4. 2. 대외 관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1592년 조선 침략에 앞서 루손에 함선과 군대를 보내 일본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히데요시는 사망할 때까지 항복 요구 서한을 계속 보냈다. 스페인 정복 이전부터 루손은 용병을 제공해 왔는데, 1593년 캄보디아 왕은 포르투갈인 디에고 벨로소(Diego Belloso)를 사신으로 보내 코끼리 2마리를 선물로 주면서 우호 및 교역을 요청하고, 시암(Siam)의 위협에 대응할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다스마리냐스는 캄보디아 왕에게 말 1마리와 에메랄드 등을 선물로 보냈지만 지원 요청에 대한 대답은 보류하였다. 그러나 이는 훗날 시암-캄보디아 전쟁에 스페인인들이 개입하고 원정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1591년 5월 12일, 마닐라의 부호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Esteban Rodríguez de Figueroa)는 민다나오 무슬림 정복에 대한 다스마리냐스의 동의를 얻었다. 정복 사업은 로드리게스의 자비로 수행되었으나, 로드리게스는 정복 지역 행정장관 임명권을 2번 갖는 권한을 얻었다.
4. 3. 갈등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앞서 루손에 함선과 군대를 보내 일본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협박했다. 히데요시는 사망할 때까지 이러한 요구를 담은 서한을 계속 보냈다.[1] 같은 해, 캄보디아 왕은 포르투갈인 디에고 벨로소를 사신으로 보내 코끼리 두 마리를 선물하며 우호와 교역을 제안하고, 시암의 위협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1] 다스마리냐스는 말과 에메랄드 등을 선물로 보냈으나, 지원 요청에 대한 답변은 보류했다. 이는 훗날 스페인의 시암-캄보디아 전쟁 개입 및 원정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1]1591년 5월 12일, 마닐라의 부호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민다나오 무슬림 정복에 대한 다스마리냐스의 동의를 얻었다. 정복은 로드리게스의 자비로 진행되었고, 그 대가로 로드리게스는 정복 지역 행정장관 임명권을 두 번 얻게 되었다.[1]
1592년 스페인에서 온 주교 살라자르는 부임 후 다스마리냐스와 갈등을 빚었다.[1]
5. 몰루카 원정과 사망 (1593년)
1593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몰루카 제도 테르나테의 성채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을 떠났으나, 원정 중 사망하였다.
원정 초반, 다스마리냐스 함대는 강한 역풍을 만나 카카섬에 잠시 정박했다. 이때, 다스마리냐스의 배에서 노를 젓던 중국인 사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새벽 전 경계 시간에 맞춰 경비병과 잠자고 있던 스페인 사람들을 공격하여 대부분 살해했다. 소수의 스페인인들만이 헤엄치거나 배의 부속선을 타고 탈출했다.
소동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려던 다스마리냐스는 선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중국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비서 후안 데 쿠에야르와 프란치스코회 신부 몬티야는 선실 안에 머물러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반란군에 의해 풀려났다.
반란을 일으킨 중국인들은 갤리선을 타고 중국으로 향하려 했으나, 코친차이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코친차이나 왕은 배에 있던 대포와 귀중품을 몰수했고, 반란군은 흩어졌다. 이후 몇몇 반란군은 말라카에서 체포되어 마닐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1]
5. 1. 원정 준비
1593년, 다스마리냐스는 몰루카 제도 테르나테(Terrenate)의 성채를 함락하고자 마닐라에서 원정대를 조직하였다. 1582년과 1584년 두 차례에 걸친 스페인 원정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한 상태였다. 다스마리냐스는 몰래 원정 계획을 세웠고,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숨겨왔다. 그는 직접 원정대를 통솔하려 하였다. 출항 전, 그는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를 함대 일부와 함께 먼저 핀타도스 주(the province of Pintados)로 보냈다.다스마리냐스는 디에고 론키요(Diego Ronquillo)에게 마닐라 및 필리핀제도 군사 업무를 위임하였고, 일반 행정 업무는 페드로 데 로하스(Pedro de Rojas)에게 위임하였다. 아들이 출발한 후, 그는 마닐라에 잠시 머물러서 준비를 하고 노젓는 자리에 설치한 벤치만 28개나 되는 자신의 대장선(La Capitana) 갤리를 무장시켰다. 그는 금액을 제공하고 중국인들을 노젓는 사공으로 고용하였다. 안토니오 데 모르가(Antonio de Morga)는 사공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이들을 사슬을 채우지도 않았고 무기 소지도 눈감아 주었다고 전한다.
스페인인 40명이 이 대장선 갤리에 탔고, 약간의 프리깃함(frigate, fragata)과 작은 배들이 갤리를 호위하였다. 이 배들에도 인원들이 타고 있었다. 함대 전체는 갤리, 갤리엇(galliot), 프리깃, 비레이(virey), 보트 등 총 200척의 선박으로 구성되었고, 900명 이상의 스페인인들이 원정에 참여하였다. 1593년 10월, 다스마리냐스는 카비테(Cavite)에서 핀타도스(Pintados)로 출발하여 핀타도스에 있는 아들 루이스 페레스의 함대와 합류하고 나서 몰루카제도로 가려 하였다.
5. 2. 선상 반란과 죽음
첫 항해 이튿날, 다스마리냐스 함대는 마닐라에서 24레구아(league) 떨어진 카카섬(island of Caca)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강한 역풍으로 인하여 푼타 델 아주프레(Punta del Azufre)라는 곶을 도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다스마리냐스는 닻을 내려 하룻밤을 정박하고 다음 날 돌기로 결정했다.그동안 중국인 사공들은 3일 동안 갤리선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날 밤 새벽 전, 이들은 수비병과 자고 있던 스페인인들 대부분을 살해하였고, 소수만이 수영으로 혹은 갤리의 부속선을 타고 탈출하였다. 소동을 듣고 다스마리냐스는 닻이 풀려 해저를 긁고 있고 사람들이 노를 젓고 있다고 생각하여,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선장실을 나왔다. 그러자 문 밖에서 기다리던 중국인들에게 살해되었다. 비서 후안 데 쿠에야르(Juan de Cuellar)와 프란치스코회(Francisco) 신부 몬티야(Montilla)만이 배 안에 있으면서 살아남았다. 중국인들은 이들을 해안에 풀어주었다. 이후 중국인들은 나포한 갤리선을 타고 중국으로 향했으나 교지(Cochinchina)로 가게 되었고, 교지 왕은 대포 2문과 보석, 금전 등을 몰수하였다. 중국인들은 다른 곳으로 흩어졌고 갤리선은 방치되었다. 몇몇은 후에 말라카(Malacca)에서 체포되어 마닐라로 보내져 그곳에서 처형되었다.[1]
6. 총독직 승계 혼란
다스마리냐스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왕명에 따라 자신이 사망하면 임시 후임자를 선택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다스마리냐스는 이 왕명을 여러 스페인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를 보는 사람이 곧 후임자임을 암시해주었다. 특히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와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가 지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몰루카 원정을 떠나 있었고, 총독 사망 후엔 지휘권을 승계받으려 마닐라로 급히 귀환했다.[1]
그동안 마닐라 시민과 군인은 페드로 데 로하스를 행정장관 및 총독으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귀환과 함께 사망한 총독의 유지가 발견되면서,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신임 총독이 되었다.[1]
참조
[1]
문서
Some sources say October 19 or October 23
[2]
서적
The Dasmriñases, Early Governors of the Spanish Philippines
Routledge
2016
[3]
웹사이트
https://www.gen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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