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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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는 비텐베르크 대학교, 헬름슈테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였다. 그의 주요 저서인 《아이네시데무스》는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의 '원소 철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비판을 담고 있다. 슐체는 괴팅겐에서 제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에 집중할 것을 조언했고, 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슐체는 1833년 괴팅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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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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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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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 |
출생 | 1761년 8월 23일 |
출생지 | 헬드룬겐, 독일 |
사망 | 1833년 1월 14일 (71세) |
사망지 | 괴팅겐, 독일 |
모교 | 비텐베르크 대학교 |
소속 기관 | 비텐베르크 대학교 헬름슈테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
철학적 배경 | |
학파/전통 | 독일 관념론 독일 회의주의 |
주요 관심사 | 인식론 |
영향 | 데이비드 흄 임마누엘 칸트 |
영향을 준 인물 |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주요 아이디어 | 흄의 귀납에 대한 회의주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반증되지 않았다. |
2. 생애
슐체는 비텐베르크 대학교, 헬름슈테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였다.[1]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는 아이네시데무스(1792)였으며, 이는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의 ''원소 철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반박이었다. 괴팅겐에서 그는 제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이 조언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1810년과 1811년 겨울 학기에 쇼펜하우어는 슐체 밑에서 심리학과 형이상학을 모두 공부했다.[2] 슐체는 1833년 1월 14일 괴팅겐에서 사망했다.[1]
2. 1. 교육 및 교수 활동
슐체는 비텐베르크 대학교, 헬름슈테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1] 그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제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쇼펜하우어는 1810년과 1811년 겨울 학기에 슐체에게서 심리학과 형이상학을 배웠다.[2]2. 2. 《아이네시데무스》 저술
슐체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는 아이네시데무스(1792)였으며, 이는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의 ''원소 철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반박이었다.[1]2. 3. 쇼펜하우어와의 관계
괴팅겐 대학교에서 슐체는 그의 제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플라톤과 칸트 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것을 권유했다.[2] 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 사상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쇼펜하우어는 1810년과 1811년 겨울 학기에 슐체에게서 심리학과 형이상학을 배웠다.[2]2. 4. 사망
슐체는 1833년 1월 14일 괴팅겐에서 생을 마감했다.[1]3. 철학 사상
슐체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비판하며, 인과관계의 원리가 우리의 인식 기원과 방법에 대한 모든 철학적 논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3]
그는 인과관계 원리를 사고 규칙으로 받아들이면, "우리 표상의 근거이자 원인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대신 "이해(understanding)가 표상들을 경험으로 모으기 위해 미리 결정된 기능에 따라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3. 1. 칸트 비판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는 인과관계의 원리가 우리의 인식 기원과 방법에 대한 모든 철학적 논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3]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주장과 그로부터 도출된 결론은 공허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과율의 원리를 사고 규칙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실제로 우리 표상의 근거이자 원인인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표상들을 하나의 경험으로 모으기 위해, 이해가 그 활동의 미리 결정된 기능에 따라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3]3. 2. 회의주의
슐체는 인과관계의 원리를 우리의 사고 규칙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실제로 우리의 표상(representation)의 근거이자 원인인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대신, "이러한 표상들을 하나의 경험으로 모으기 위해, 이해가 그 활동의 미리 결정된 기능에 따라 이러한 표상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경험 안에서 표상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에 대한 이해의 기능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4. 어록
인과관계의 원리가 우리의 인식 기원의 근원이나 방법에 대한 모든 철학적 논의를 훼손한다는 것이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주장과 그로부터 도출된 모든 결론은 공허한 미묘함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원리의 결정을 우리의 사고 규칙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표상의 근거이자 원인인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결코 질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표상들을 하나의 경험으로 모으기 위해, 이해가 그 활동의 미리 결정된 기능에 따라 이러한 표상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3]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cmillan
1972
[2]
서적
Manuscript Remains
Berg
1988
[3]
서적
Between Kant and Hegel
Hackett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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