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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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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곰부르자는 19세기 필리핀에서 스페인 식민 당국에 의해 반역 혐의로 처형된 세 명의 로마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 호세 부르고스, 하친토 사모라를 지칭한다. 이들은 1872년 카비테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필리핀 민족주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곰부르자의 처형은 스페인 측의 기록과 필리핀 측의 상반된 시각으로 인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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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부르자
개요
곰부르자 처형 장면
곰부르자 처형 장면
다른 이름고메스, 부르고스, 사모라
순교 날짜1872년 2월 17일
순교 장소바기움바얀 광장, 마닐라, 필리핀
국적필리핀
직업사제
기념일2월 17일
구성원
마리아노 고메스별칭: Don Mariano Gómez de los Ángeles
출생: 1799년 8월 2일, 산타크루스, 마닐라
사망: 1872년 2월 17일 (72세), 바기움바얀 광장, 마닐라
호세 부르고스별칭: Don José Apolonio Burgos y García
출생: 1837년 2월 9일, 비간, 일로코스수르 주
사망: 1872년 2월 17일 (34세), 바기움바얀 광장, 마닐라
하신토 사모라별칭: Don Jacinto Zamora y del Rosario
출생: 1835년 8월 14일, 판다칸, 마닐라
사망: 1872년 2월 17일 (36세), 바기움바얀 광장, 마닐라

2. 배경

리살 공원에 위치한 곰부르자 처형지 기념비


NHCP가 마닐라에 있는 곰부르자 국립 기념비에 세운 역사 표지판


곰부르자(Gomburza)는 19세기 필리핀에서 활동했던 세 명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사모라의 이름을 조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이들은 1872년 카비테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스페인 식민 당국에 의해 날조된 혐의로 가로테 형으로 공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필리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스페인 식민 당국은 곰부르자가 카비테 무기고에서 일하던 필리핀 원주민 노동자들의 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스페인 정부를 전복하려는 비밀 운동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9]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은 그의 저서 『필리핀의 일반 역사』에서 이러한 스페인 식민 당국의 입장을 기술했으나, 이는 편향된 서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0] 당시 총독이었던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 역시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이 누리던 특권 폐지가 반란의 원인이었으며, 자유주의적 언론의 영향과 원주민 사제들의 반(反)스페인 정서가 결합되어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그는 특히 호세 부르고스와 하신토 사모라를 반란의 주동자로 지목하며, 이들이 스페인 통치를 끝내고 새로운 통치자를 세우려 했다고 주장했다.[11] 이스키에르도와 비달은 심지어 삼팔록 지역 축제의 불꽃놀이가 스페인 주둔군 공격을 위한 신호였다고 주장하며 사건을 확대 해석하고, 이를 빌미로 곰부르자를 체포하여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필리핀 학자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는 이러한 스페인 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카비테 반란이 이스키에르도 총독의 특권 폐지 조치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의 단순한 봉기였지만, 이스키에르도가 수사들과 결탁하여 이를 필리핀 전체의 독립 운동으로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필리핀인 교육 개선과 같은 개혁 조치를 방해하고, 식민 통치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타베라는 스페인 정부가 이스키에르도의 보고서만 믿고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3]

재판 과정 역시 졸속으로 진행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스페인 검찰이 증인에게 뇌물을 통해 곰부르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비판[12]과 함께, 1872년 2월 15일 밤늦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이틀 뒤인 2월 17일 처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12] 처형 당일, 약 4만 명의 필리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 사제는 바굼바얀(현재의 리살 공원)에서 가로테 형으로 처형되었다. 당시 마닐라 대교구의 멜리톤 마르티네스 대주교는 세 사제의 무죄를 믿었기에, 처형 후 마닐라 대성당의 종을 울려 애도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곰부르자의 처형은 '1872년의 공포'로 불리며 필리핀 민중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는 잠재되어 있던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호세 리잘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곰부르자에게 헌정했다. 리잘은 헌정사에서 "교회는 당신들을 폄하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당신에게 씌워진 죄에 의문을 제기했고, 정부는 당신들의 재판을 미스터리와 그림자로 둘러싸 치명적인 순간에 어떤 오류가 있었음을 믿게 만들었으며, 모든 필리핀은 당신들의 기억을 숭배하고 당신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고 쓰며, 스페인 당국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곰부르자를 필리핀 민족의 순교자로 추앙했다. (다만 리잘은 처형 날짜를 1872년 2월 28일로, 사제들의 나이를 각각 89세, 35세, 37세로 잘못 기록했다. 실제 처형일은 2월 17일이며, 당시 고메스는 72세, 부르고스는 35세, 사모라는 36세였다.[8]) 곰부르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후 필리핀 혁명 (1896-1898) 발발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며 필리핀 독립 운동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2. 1. 마리아노 고메스

마리아노 고메스 데 로스 안헬레스는 로마 가톨릭 사제였다.[6] 그는 19세기 필리핀에서 스페인 식민 당국에 의해 반역 혐의로 부당하게 기소된 세 명의 사제 중 한 명이었다. 알레한드로 프란시스코 고메스와 마르티나 쿠스토디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799년 8월 2일 마닐라 산타크루스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필리핀 원주민, 중국, 스페인 혈통이 섞인 '토르나트라스' 출신이었다.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며 마닐라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준비했다. 고메스는 1824년 6월 2일 카비테 바코르의 주임 사제로 임명되었다. 사제로서의 역할 외에도 지역 주민들에게 농업과 가내 수공업 기술을 전수하는 데 힘썼다. 또한 스페인 출신 성직자들의 차별과 억압에 맞서 필리핀 원주민 사제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언론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라 베르다드'La Verdad|라 베르다드es라는 신문 발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872년 카비테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혐의를 받아, 같은 해 2월 17일 다른 두 명의 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바굼바얀(현재의 리살 공원)에서 군사 재판을 통해 가로테 형을 선고받고 순교하였다.

2. 2. 호세 부르고스

호세 아폴로니오 부르고스 이 가르시아는 1837년 2월 9일 일로코스 수르 비간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달 12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일로코스 스페인 민병대의 스페인 소위였던 호세 부르고스와 비간 출신인 플로렌시아 가르시아였다.

그는 십 대 초반에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산토 토마스 대학교로 진학하여 여러 학위를 취득했다.[7]

연도학위수여 기관
1855년철학 학사산토 토마스 대학교
1859년신학 학사산토 토마스 대학교
1862년신학 학사산토 토마스 대학교
1868년신학 박사 및 교회법 박사산토 토마스 대학교


2. 3. 하신토 사모라

하친토 사모라 이 델 로사리오는 1835년 8월 14일 마닐라 판다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베난시오 사모라와 힐라리아 델 로사리오였다. 그는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문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나중에 산토 토마스 대학교로 전학하여 교회법 및 민법 학위를 받았다. 그는 마닐라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기를 꿈꿨다. 사제 직분을 받은 후, 사모라는 마리키나, 파시그, 바탕가스에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고, 1864년 12월 3일 마닐라 대성당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3. 카비테 봉기

1872년 카비테 해군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 및 기존에 누리던 특권(세금 및 강제 노동 면제) 폐지에 반대하여 일으킨 봉기이다.[13]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 사건을 단순한 노동 쟁의가 아닌,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계획적인 반란으로 규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있던 곰부르자(마리아노 고메스,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사모라) 세 신부를 반란의 배후로 지목했다.[11]

사건의 발단과 성격, 그리고 세 신부의 연루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 필리핀 총독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와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 등이 주장한 스페인 측의 입장과 필리핀 학자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 등이 제시한 필리핀 측의 입장이 엇갈린다.[10][11][13] 스페인 측은 반란이 계획적인 음모였으며 세 신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반면, 필리핀 측은 단순한 노동자들의 반란을 식민 당국이 필리핀 내 개혁 움직임을 억압하고 성직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과장하고 이용했다고 반박한다.

결과적으로 이 봉기는 세 신부가 신속하게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1872년 2월 17일 교살형으로 처형되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4] 카비테 봉기와 곰부르자의 처형은 필리핀 민족 의식을 크게 자극하여 이후 필리핀 독립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3. 1. 봉기의 발발



곰부르자의 처형 배경이 된 카비테 반란에 대해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은 그의 저서 『필리핀의 일반 역사』에서 스페인 측의 관점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곰부르자 처형의 이유를 편향되게 서술했다는 점에서 이후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10]

비달의 기록은 당시 필리핀 총독이었던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의 보고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스키에르도는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이 누리던 특권(면세 등)의 폐지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통제되지 않는 언론, 특히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적 성향을 가진 언론이 세속적 왕위 전복과 같은 선동적인 내용을 퍼뜨려 원주민 필리핀인(인디오)들의 반란을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이스키에르도는 반란군에 원주민 성직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이 스페인 수사들에 맞서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를 끝내고 호세 부르고스 신부와 하신토 사모라 신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스페인 측의 설명은 교육받은 지도자, 혼혈인, 아보가딜로(변호사 또는 하급 관리), 마닐라 및 카비테 거주자, 원주민 성직자들이 연루된 계획적인 음모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1872년 6월 20일 삼팔록 지역의 성모 로레토 축제 불꽃놀이가 카비테 반란군에게 스페인 장교를 공격하라는 신호로 오인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수사들에 대한 학살 사건과 함께 곰부르자 체포의 명분으로 사용되었고, 결국 세 신부는 교살형을 선고받았다.[11]

그러나 이들의 신속한 재판과 처형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필리핀 뉴스 에이전시는 스페인 검찰이 증인에게 뇌물을 주어 세 신부에게 불리한 증언(반역 및 반란 혐의)을 하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에드먼드 플라우슈의 기록에 따르면, 1872년 2월 15일 밤, 세 신부는 카비테 해군 조선소 반란 선동 혐의로 스페인 군사 법원에서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날 아침 포트 산티아고에서 판결문이 전달되었고, 1872년 2월 17일에 처형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형 선고 당시 부르고스는 흐느껴 울었고, 사모라는 정신을 잃었으며, 오직 고메스만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12]

처형 당일, 약 4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형장 주변에 모여 세 신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처형된 고메스는 침착하고 위엄있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아버지, 저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땅에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제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신다면,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두 번째로 처형된 사모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사실상 처형 전에 사망했다는 시각도 있다. 마지막으로 처형된 부르고스는 가장 젊었으며,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결백을 외치며 절규했다고 한다. 그의 고해 신부였던 예수회 신부는 "심지어 그리스도도 결백했다"라며 그를 위로했다. 세 신부의 죽음 후, 마닐라 대성당의 종이 슬프게 울렸는데, 이는 그들의 무죄를 믿었던 멜리톤 마르티네스 대주교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반면, 필리핀 학자 트리니다드 에르메네힐도 파르도 데 타베라 박사는 이 사건이 이스키에르도 총독의 특권 폐지 조치에 불만을 품은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의 단순 반란이었다고 주장하며 필리핀 측의 입장을 대변했다. 약 200명의 군인, 노동자, 카비테 주민들이 봉기하여 스페인 장교들을 살해했지만, 이스키에르도 총독과 수사들이 이 사건을 과장하여 스페인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필리핀인을 위한 교육 개혁(예술 및 기술 학교 설립 등)을 지연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이러한 개혁은 수사들의 권력 약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파르도 데 타베라는 이스키에르도가 이 사건을 필리핀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이용했으며, 스페인 정부는 이스키에르도의 보고서만 믿고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필리핀 주권 전복을 위한 대규모 음모로 단정했다고 비판했다.[13]

결론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해군 조선소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및 특권 폐지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나, 세 명의 사제가 연루되었다는 조작된 증언으로 인해 비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세 사제는 신속한 재판 끝에 1872년 2월 17일 교살형을 당했고, 그들의 시신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어 파코 묘지의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4]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이스키에르도가 어떻게 이러한 처형을 승인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스페인 측 자료에서도 찾기 어렵다. 마닐라 대주교 그레고리오 멜리톤 마르티네스는 세 사제가 교회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사제직 박탈을 거부하고, 처형된 사제들을 기리기 위해 모든 교회의 종을 울리도록 명령했다. 이는 훗날 필리핀의 민족 영웅 호세 리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사건 이후 많은 필리핀인들이 용의자로 지목되어 마리아나 제도으로 추방되었다.

3. 2. 곰부르자의 연루



곰부르자의 처형 과정은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이 기록한 『필리핀의 일반 역사』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카비테 반란에 대한 스페인 측의 시각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곰부르자 처형의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0]

당시 필리핀 총독이었던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 역시 비달의 기록을 뒷받침했다. 그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이 누리던 특권(세금 및 강제 노동 면제)의 폐지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페인 언론을 포함한 통제되지 않은 언론이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퍼뜨려 세속적 왕위 전복과 같은 선동적인 내용을 유포했고, 이것이 필리핀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이스키에르도는 반란군 중에 스페인 수사들과 대립하던 원주민 성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언급하며, 이들이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를 끝내고 새로운 ''하리''(왕)를 세우려 했으며, 그 책임자로 호세 부르고스 신부와 하신토 사모라 신부를 지목했다. 이 두 스페인인의 설명은 서로를 보강하며, 교육받은 지도자, 혼혈인, 아보가딜로(변호사), 마닐라 및 카비테 거주자, 그리고 원주민 성직자들이 연루된 계획적인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1872년 1월 20일, 삼팔록 지역에서 열린 성모 로레토 축제의 불꽃놀이가 카비테 사람들에게 스페인 장교를 공격하라는 신호로 오인되어 반란이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사들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는 곰부르자 체포의 명분이 되었다. 결국 세 신부는 재판을 통해 교살형(가로테)을 선고받았다.[11]

그러나 이들의 신속한 재판과 처형 과정에는 여러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필리핀 뉴스 에이전시의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 검찰이 프란시스코 살두아라는 병사에게 뇌물을 주어 세 신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했다는 의혹이 있다.[12] 프랑스 작가 에드먼드 플라우슈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872년 2월 15일 밤늦게 세 신부는 카비테 해군 조선소 반란 선동 혐의로 스페인 군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다음 날 아침 포트 산티아고에서 그들에게 전달되었고, 처형일은 바로 다음 날인 2월 17일로 정해졌다. 선고를 들은 후 부르고스는 흐느껴 울었고, 사모라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으며, 오직 마리아노 고메스만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12]

처형 당일, 약 4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처형 장소 주변에 모여 세 신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처형된 고메스는 침착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죽음을 맞이했으며, "아버지, 저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땅에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제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신다면,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로 처형된 사모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처형되기도 전에 숨을 거둔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처형된 부르고스는 세 신부 중 가장 젊었으며,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결백을 외쳤다. 그의 고해 신부였던 예수회 신부는 "그리스도 또한 무고했다"고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세 신부의 처형 후, 마닐라 대주교 그레고리오 멜리톤 마르티네스는 그들의 무죄를 믿었기에, 마닐라 대성당의 모든 종을 울려 애도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필리핀 학자이자 연구원인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 박사는 이 사건에 대한 필리핀 측의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이 사건이 1872년 1월 20일, 이스키에르도 총독의 명령으로 기존의 특권(세금 및 강제 노동 면제)이 폐지된 것에 불만을 품은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이 일으킨 단순한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라마드리 중사를 포함한 약 200명의 군인, 노동자, 카비테 주민들이 봉기하여 스페인 장교들을 살해했지만, 이스키에르도 총독과 스페인 수사들이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스페인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고, 필리핀인들을 위한 교육 개선(예: 예술 및 기술 학교 설립)과 같은 개혁 조치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수사들의 영향력 약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타베라 박사는 이스키에르도가 이 사건을 이용하여 필리핀인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으며, 스페인 정부는 이스키에르도의 보고서만 믿고 더 이상 진상을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결국 스페인 정부는 이 사건이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주권을 전복시키려는 거대하고 조직적인 음모라고 오판하게 되었다.[13]

소위 1872년 카비테 반란은 해군 조선소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과 특권 폐지에 항의하여 일으킨 봉기였으나, 이 사건에 세 신부를 연루시키려는 증언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세 신부는 매우 신속하게 재판에 회부되어 1872년 2월 17일 교살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어 파코 묘지의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4] 특히, 스페인의 기록에는 자유주의자인 이스키에르도가 어떻게 이러한 처형을 승인하도록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마닐라 대주교인 그레고리오 멜리톤 마르티네스(성 에세키엘 모레노 이 디아스를 서품한 대주교)는 사제들이 어떠한 교회법도 어기지 않았기에 이들의 사제직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모든 교회의 종을 울려 처형된 사제들을 기리도록 명령했고, 이는 이들의 처형을 목격한 미래의 필리핀 영웅 호세 리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사의 여파로 수많은 용의자가 나왔고, 대부분 마리아나 제도으로 추방되었다.

4. 처형과 그 이후



곰부르자의 처형은 필리핀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많은 논란 속에서도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특히 호세 리잘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세 신부에게 헌정하며 스페인 식민 통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리잘은 헌정사에서 이들의 희생을 기렸으나, 기록에는 처형 날짜(1872년 2월 17일이 정확)와 신부들의 나이(고메스 72세, 부르고스 35세, 사모라 36세)에 대한 약간의 오류가 있다.[8]

세 신부는 카비테 반란을 조종했다는 누명을 쓰고 반역죄와 선동죄로 기소되었다. 스페인 군사 법정은 이들이 스페인 정부 전복 음모에 가담했으며, 스페인 성직자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했다.[9] 결국 1872년 2월 17일, 마닐라 외곽 바굼바얀(현 리잘 공원)에서 교살 방식으로 공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1872년의 공포'로 알려지며 필리핀 민중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훗날 필리핀 혁명(1896-1898) 발발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9]

처형 후 세 신부의 시신은 국가의 적으로 취급되어 파코 묘지의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혔다.[4] 당시 마닐라 대주교 그레고리오 멜리톤 마르티네스는 이들의 사제직 박탈을 거부하고, 처형을 애도하며 모든 교회의 종을 울리도록 지시했다. 이는 처형을 목격한 호세 리잘을 비롯한 많은 필리핀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편, 사건의 여파로 다수의 필리핀인이 마리아나 제도 등지로 추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4. 1. 불공정한 재판



곰부르자의 처형 배경과 재판 과정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은 카비테 반란에 대한 스페인 측의 시각을 중심으로 서술했으나, 그의 기록은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10] 당시 필리핀 총독이었던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 역시 비달과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의 특권 폐지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며,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언론 보도가 필리핀 원주민(인디오)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조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스키에르도는 원주민 성직자들이 스페인 수사들에 맞서 반란을 주도했으며, 호세 부르고스 신부와 하신토 사모라 신부를 책임자로 지목하며 이들이 스페인 통치를 끝내고 새로운 통치자(''하리'')를 세우려 했다고 보고했다. 이 두 스페인인의 설명은 서로를 뒷받침하며, 교육받은 지도자, 혼혈인, 변호사 보조원(''아보가딜로''), 마닐라카비테 거주자, 원주민 성직자들이 연루된 계획적인 음모가 있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또한, 1872년 1월 20일 삼팔록 지역 축제의 불꽃놀이가 반란의 신호로 오용되어 스페인 장교들을 공격하고 주둔군을 몰아내려 했다고 주장했으며, 수사들에 대한 대량 학살 시도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곰부르자 세 신부의 체포와 재판의 근거가 되었고, 결국 그들은 교살형(가로테)을 선고받았다.[11]

그러나 재판 과정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세 신부에 대한 재판과 처형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필리핀 뉴스 에이전시의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 검찰은 증인에게 뇌물을 주어 세 신부에게 반역 및 선동 혐의에 대해 불리하게 증언하도록 유도했다는 주장이 있다.[12] 에드먼드 플라우슈의 기록에 따르면, 1872년 2월 15일 밤늦게 세 신부는 카비테 해군 조선소 반란 선동 혐의로 스페인 군사 법원에서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의 판결은 다음 날 아침 포트 산티아고에서 신부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바로 다음 날인 2월 17일에 처형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선고를 들은 후 부르고스 신부는 흐느껴 울었고, 사모라 신부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으며, 오직 고메스 신부만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12]

한편, 필리핀 학자이자 연구원인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 박사는 스페인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필리핀 측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 사건이 1872년 1월 20일 이스키에르도 총독의 명령에 따른 특권 폐지에 불만을 품은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의 단순한 반란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라마드리 중사를 포함한 약 200명의 군인, 노동자, 카비테 주민들이 스페인 장교들을 살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키에르도 총독과 수사들이 이 사건을 필리핀 민족을 위한 개혁(예: 예술 및 기술 학교 설립)을 막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했다는 것이다. 타베라 박사는 이스키에르도 총독이 필리핀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했으며, 스페인 정부는 총독의 보고서만 믿고 더 이상 조사하지 않은 채 이 사건을 스페인 주권을 전복하려는 거대한 음모로 오인했다고 지적했다.[13]

1872년 2월 17일, 처형 당일에는 약 4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모여 세 신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처형된 고메스 신부는 침착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아버지, 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땅에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제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신다면,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로 처형된 사모라 신부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처형되기도 전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처형된 부르고스 신부는 세 명 중 가장 젊었으며,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결백을 외치며 절규했다고 한다. 그의 고해 신부였던 예수회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무고했다"는 말로 그를 위로했다. 세 신부의 처형 후, 마닐라 대성당의 종이 슬프게 울렸는데, 이는 그들의 무죄를 믿었던 멜리톤 마르티네스 대주교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4. 2. 처형과 영향



곰부르자의 처형은 필리핀 역사에 깊이 각인된 사건으로, 많은 논란을 남겼다.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들에게 카비테 반란을 조종했다는 거짓 혐의를 씌워 반역죄와 선동죄로 기소했다.[9] 스페인 군사 법정은 곰부르자가 스페인 정부를 전복하려는 비밀 운동의 일부이며 스페인 성직자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9]

스페인 측 기록은 당시 총독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와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의 특권 폐지가 반란의 원인이었으며, 곰부르자가 민주적, 공화주의적 사상을 퍼뜨려 원주민 필리핀인(인디오)의 반란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특히 부르고스와 사모라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고 몰아갔다.[11] 비달의 기록은 스페인 중심적 시각으로 사건을 기술하여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10]

반면, 필리핀 학자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는 이 사건이 이스키에르도 총독의 특권 폐지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의 단순한 반란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스키에르도 총독과 수사들이 필리핀 사회 개혁을 막고 식민 통치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스페인 정부는 이스키에르도의 보고서만을 신뢰하고 더 이상의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13]

재판 과정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스페인 검찰이 증인에게 뇌물을 주어 곰부르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2] 결국 세 신부는 1872년 2월 15일 밤, 카비테 반란 선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살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날 아침 포트 산티아고에서 판결이 전달되었고, 2월 17일 처형이 집행될 것이 통보되었다. 선고 당시 부르고스는 흐느껴 울었고, 사모라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으며, 고메스만이 침착함을 유지했다고 전해진다.[12]

1872년 2월 17일, 마닐라 외곽의 바굼바얀(현 리잘 공원)에서 약 4만 명의 필리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이 집행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된 고메스는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정신을 잃은 사모라가 두 번째로, 마지막으로 고통 속에 결백을 외친 부르고스가 처형되었다.[12] 세 신부의 시신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어 파코 묘지의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4]

마닐라 대주교 그레고리오 멜리톤 마르티네스는 곰부르자가 어떠한 교회법도 어기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사제직 박탈을 거부했다. 그는 처형된 사제들을 기리기 위해 모든 교회의 종을 울리도록 명령했고, 이는 당시 처형을 목격한 젊은 호세 리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리잘은 훗날 자신의 두 번째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곰부르자에게 헌정하며 스페인 통치와 부패한 엘리트 계층을 비판했다. 다만 리잘의 기록에는 처형 날짜(1872년 2월 17일이 정확)와 사제들의 나이(처형 당시 고메스 72세, 부르고스 35세, 사모라 36세)에 일부 오류가 있다.[8]

곰부르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1872년의 공포'로 불리며 필리핀 민중의 분노를 촉발했고, 19세기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이어진 필리핀 혁명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9] 사건 이후 많은 필리핀인 용의자들이 마리아나 제도 등으로 추방되었다.

4. 3. 유해 발굴

파코 공원에 있는 곰부르자 묘


1978년, 파코 공원 묘지에서 마닐라 시립 기술 사무소에 의해 세 신부의 유해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14] 이후 유해가 발견된 같은 장소에 세 신부를 기리는 묘가 세워졌다.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곰부르자 신부들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적 평가는 당시 필리핀을 지배했던 스페인 측과 필리핀 민족주의 측의 시각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은 그의 저서 『필리핀의 일반 역사』에서 카비테 반란에 대한 스페인 중심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곰부르자의 처형 이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0] 당시 필리핀 총독이었던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 역시 비달의 기록을 뒷받침했다. 그는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이 누리던 특권이 폐지되자 "혁명"이 일어났으며, 자유주의적 언론과 원주민 성직자들이 반란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스키에르도는 호세 부르고스 신부와 하신토 사모라 신부가 스페인 통치를 끝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다고 지목하며, 이들이 반란의 책임자라고 주장했다. 또한, 삼팔록 지역 축제의 불꽃놀이가 반란군에게 스페인 장교를 공격하라는 신호로 오인하게끔 계획되었다는 등, 사건을 조직적인 음모로 묘사하며 곰부르자의 처형을 정당화하려 했다.[11]

반면, 필리핀의 학자이자 연구원인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 박사는 필리핀 측의 입장을 대변하며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이 사건이 이스키에르도 총독의 명령에 따른 특권 폐지에 불만을 품은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의 단순한 반란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타베라에 따르면, 이스키에르도 총독과 스페인 수사들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스페인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고, 필리핀 민중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다. 이는 필리핀인을 위한 예술 및 기술 학교 설립과 같은 개혁 조치를 막으려는 의도였는데, 이러한 개혁은 수사들의 권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베라는 스페인 정부가 이스키에르도의 보고서에만 의존하여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려 하지 않았으며, 이 사건을 필리핀 주권을 해체하려는 거대한 음모로 오인했다고 비판했다.[13]

이처럼 곰부르자 처형에 대한 상반된 역사적 평가는 사건의 진실과 당시 스페인 식민 통치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5. 1. 필리핀 독립운동의 기폭제



곰부르자의 처형은 필리핀 역사상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이며, 19세기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필리핀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호세 리잘이 자신의 두 번째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곰부르자 신부들에게 헌정하면서 스페인 통치에 대한 저항 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 리잘은 소설 헌사에서 곰부르자가 순교자임을 강조하며 스페인 정부의 재판 과정과 이들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리잘의 기록에는 일부 오류가 있는데, 처형일은 리잘이 언급한 1872년 2월 28일이 아닌 1872년 2월 17일이었고, 처형 당시 신부들의 나이도 고메스 72세, 부르고스 35세, 사모라 36세로 리잘의 기록과 차이가 있었다.[8]

이들은 카비테 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반역죄와 선동죄를 뒤집어쓰고 마닐라의 바굼바얀(현 리잘 공원)에서 교살 방식으로 공개 처형되었다.[8][9] 스페인 군사 법원은 이들이 스페인 정부 전복을 꾀하는 비밀 운동의 일부이며 스페인 성직자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9] 이 사건은 '1872년의 공포'로 불리며, 훗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이어진 필리핀 혁명의 중요한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곰부르자 처형의 배경에 대해서는 스페인 측과 필리핀 측의 시각이 엇갈린다. 스페인 역사가 호세 몬테로 이 비달과 당시 총독 라파엘 이스키에르도 이 구티에레스는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이 누리던 특권이 폐지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 곰부르자를 포함한 원주민 성직자들이 이를 부추겨 스페인 통치를 끝내고 호세 부르고스와 하신토 사모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다고 기록했다.[10][11] 이들은 반란군이 불꽃놀이를 신호 삼아 스페인 장교들을 공격하고 수사들을 살해하려 했다는 등, 사건을 계획적인 음모로 묘사하며 곰부르자의 처형을 정당화했다.[11]

반면, 필리핀 학자 트리니다드 파르도 데 타베라는 이 사건이 단순히 특권 폐지에 불만을 품은 카비테 무기고 노동자들의 소규모 반란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스키에르도 총독과 스페인 수사들이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필리핀 민중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필리핀인의 교육 개선을 위한 학교 설립 등 개혁 조치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수사들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베라는 스페인 정부가 이스키에르도의 보고서만 믿고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3]

처형 과정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스페인 검찰이 증인에게 뇌물을 주어 곰부르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했다는 주장[12]과 함께, 매우 신속하게 재판이 진행되어 1872년 2월 15일 유죄 판결 후 불과 이틀 뒤인 17일에 처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2] 처형 당일 약 4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이를 지켜보았으며[12], 세 신부의 죽음은 필리핀 민중에게 깊은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당시 마닐라 대주교 멜리톤 마르티네스는 이들의 무죄를 믿었기에, 처형 후 마닐라 대성당의 종을 울리도록 지시하여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참조

[1] 뉴스 MaJoHa for GomBurZa https://www.manilati[...] 2022-08-31
[2] 웹사이트 The GOMBURZA were executed February 17, 1872 https://kahimyang.co[...] 2012-02-16
[3] 웹사이트 Nacionalista Party History https://web.archive.[...] 2007-07-30
[4] 웹사이트 The Secularization Issue and the Execution of Gomburza https://web.archive.[...] 2007-07-30
[5] 웹사이트 Padre Jose Ma. Burgos http://www.msc.edu.p[...] 2007-07-30
[6] 서적 HISTORY OF THE PHILIPPINES. GREENWOOD
[7] 웹사이트 Father Jose Burgos was born in Vigan, Ilocos Sur February 9, 1837 https://kahimyang.co[...] 2012-02-08
[8] 서적 The Life and Works of RIZAL C & E Publishing, Inc.
[9] 웹사이트 The martyrdom of GomBurZa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https://web.archive.[...] 2019-12-03
[10] 웹사이트 The Cavite Mutiny Position Paper Politics https://www.scribd.c[...] 2019-12-04
[11] 웹사이트 The Two Faces of the 1872 Cavite Mutiny http://nhcp.gov.ph/t[...] 2012-09-05
[12] 웹사이트 The martyrdom of GomBurZa https://web.archive.[...] 2019-12-03
[13] 웹사이트 The Two Faces of the 1872 Cavite Mutiny https://web.archive.[...] 2019-12-03
[14] 웹사이트 GOMBURZA. Reluctant martyrs started it all http://www.msc.edu.p[...] 2007-07-30
[15] 웹인용 Nationalista Party History https://web.archive.[...] 2007-07-30
[16] 웹인용 The Secularization Issue and the Execution of Gomburza http://www.manilacat[...] 2007-07-30
[17] 웹인용 Padre Jose Ma. Burgos http://www.msc.edu.p[...] 200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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