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승
1. 개요
공승은 신도 사람으로, 태부 진옹생에게 사사받았으며 동향인 공사와 함께 양공으로 불린 인물이다. 학문에 밝아 수재로 천거되어 현령을 지냈고, 간대부와 광록대부를 거쳐 우부풍을 역임했다. 왕망 정권에서 사우좨주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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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8년 출생 -
가이우스 마이케나스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측근으로 권력 장악에 기여하고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등 시인들을 후원한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예술 후원가이며, 그의 이름은 예술 후원자를 뜻하는 메세나의 어원이 되었다. -
전한의 유학자 -
육가
육가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유방의 천하통일에 기여하고 혜제와 여태후 시대에 은퇴 후에도 활약했으며, 문제 시대에는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공헌했고, 『신어』를 통해 무위 사상을 유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한의 유학자 -
유흠
유흠은 전한 말기부터 신나라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로서, 왕망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왕망을 전복하려다 실패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고문경 위작 의혹에도 휩싸였다. -
전한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정치인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2. 생애
신도태부 진옹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동향인 공사와 친구였으며, 둘 다 명성을 떨쳐 양공(兩龔)이라고 불렸다.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에 밝아 군리(郡吏)가 되었으나, 공사는 벼슬하지 않았다.
수재로 추천되어 중천령(重泉令)을 지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후 대사공 하무와 집금오 염숭의 추천을 받았고, 애제 또한 정도왕 시절부터 그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대부(諫大夫)로 삼았다. 공승은 애제에게 공사·영수·후가를 추천하였는데, 공사·후가는 간대부에 임명되었고, 영수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건평 4년(기원전 3년), 광록대부였던 공승은 우부풍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원래 관직으로 되돌려졌다.
2.1. 왕망과의 관계
공승은 동향인 공사와 친구였으며, 둘 다 명성을 떨쳐 '양공'(兩龔)이라고 불렸다. 공승은 학문을 좋아하고 경전에 밝아 군리(郡吏)가 되었으나, 공사는 벼슬하지 않았다.
원시 2년(2년), 태중대부 병한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망은 둘에게 많은 재화를 주었고, 아들들을 낭(郞)으로 임명하였다.
신나라 시건국 3년(11년), 왕망은 공승을 사우좨주(師友祭酒)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공승은 이에 응하지 않고 식사를 거절하여, 14일 만에 굶어 죽었다.
3. 평가
공승은 신도 태부 진옹생에게서 배웠다. 동향인 공사와 친구였으며, 둘 다 명성을 떨쳐 '양공'(兩龔)이라고 일컬어졌다. 공승은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에 밝았다.
수재로 천거되어 중천령(重泉令)을 지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후 대사공 하무와 집금오 염숭의 천거를 받았다. 애제 또한 정도왕 시절부터 공승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대부(諫大夫)로 삼았다. 공승은 애제에게 공사·영수(甯壽)·후가(侯嘉)를 천거하였는데, 공사와 후가는 간대부에 임명되었고, 영수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건평 4년(기원전 3년), 광록대부였던 공승은 우부풍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원래 관직으로 되돌려졌다.
원시 2년(2년), 태중대부 병한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망은 둘에게 많은 재화를 주었고, 아들들을 낭(郞)으로 임명하였다.
신나라 시건국 3년(11년), 왕망은 공승을 사우좨주(師友祭酒)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공승은 이에 응하지 않고 식사를 거절하여, 14일 만에 굶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