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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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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 애제는 전한 성제의 조카이자 원제의 손자로, 기원전 7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1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즉위 초 왕씨 세력을 견제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으나, 외척 부씨와 정씨의 발호, 그리고 총애한 동현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국정을 문란하게 했다. 결국 동현과의 동성애적 관계와 무능함으로 인해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왕망이 섭정하며 전한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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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애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 애제
한 애제 (천훙서우, 17세기)
류흔(劉欣)
시호효애황제(孝哀皇帝) "효성스럽고 애통하다"
출생기원전 25년
사망기원전 1년 8월 15일 (24세)
사망 장소장안
묻힌 곳의릉(義陵)
통치
재위 기간기원전 7년 5월 7일 – 기원전 1년 8월 15일
전임자한 성제
후임자한 평제
연호건평(建平) (기원전 6–3년)
원수(元壽) (기원전 2–1년)
가계
아버지류캉
어머니정희(丁姫)
배우자부황후 (정실)
동현 (애인)
왕조
왕가류(劉)
왕조한나라 (서한)

2. 가족 관계 및 배경

전한 애제는 황후 효애황후 부씨와 소의 동씨를 후궁으로 두었으며, 남첩 동현을 총애했다. 효애황후 부씨는 애제의 할머니 부태후의 사촌 부안(傅晏)의 딸로, 애제 즉위 후 황후로 책봉되었다. 소의 동씨는 동현의 누이이며, 동현은 애제가 사랑하던 미남자였다.[14]

애제의 가족 관계는 그의 성장 배경과 황위 계승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애제는 원제의 아들 정도왕 유강과 정비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친어머니가 아닌 할머니 부씨의 손에서 자랐다.[14] 이는 훗날 애제가 황제가 된 후 부씨와 정씨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애제의 황위 계승에는 할머니 부씨의 역할이 컸다. 부씨는 성제의 황후 조비연과 외척 왕근에게 뇌물을 바쳐 애제를 황태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성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비연과 왕근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애제를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했다.

애제 가계도
관계이름비고
황후효애황후 부씨자진함
후궁소의 동씨동현의 누이
남첩동현소의 동씨의 동생, 애제의 총애를 받음


2. 1. 출생과 성장

전한 애제는 기원전 25년, 당시 황제였던 성제의 형제이자 원제의 아들인 정도왕 유강과 후궁 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14] 그는 아마도 정도국 (오늘날의 산둥성 허쩌시)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애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할머니인 부(원제)에게 양육되었다.[14] 양삭 2년(기원전 23년), 아버지 정도공왕이 사망하면서 3세의 나이로 정도왕 작위를 계승하였다.[15] 그는 성장하면서 문장과 법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15]

원연 4년(기원전 9년), 17세가 된 애제는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 입조하여 성제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이때 성제의 질문에 명확하게 답변하고, 추가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며 『시경』의 내용을 암송하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여[16] 성제의 큰 칭찬을 받았다.[17]

한편, 애제의 할머니 부씨는 손자를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그녀는 성제의 황후 조비연과 표기장군 왕근에게 뇌물을 보냈다. 당시 성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조비연과 왕근은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해 유흠을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성제에게 권했다. 성제 또한 유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원복을 시킨 후 봉국으로 돌려보냈다.

원연 5년(기원전 8년), 18세가 된 유흠은 성제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유흠은 한 번 사양하였으나, 결국 황태자가 되어 수도로 불려왔다. 이후 왕정군의 배려로, 10일에 한 번씩 할머니 부씨와 어머니 정씨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14]

2. 2. 황태자 책봉

기원전 8년, 성제는 여러 핵심 관리들을 소집하여 누가 더 적절한 후계자인지 논의하였다. 다수는 성제가 유강의 아들 유흔에게 기울고 있음을 보고, 상속의 일반적인 규칙인 후계자가 없을 경우 형제의 자녀를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들어 유흔을 추천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성제는 유흔을 '''태자'''로 책봉하였다.[3] 유흔은 겸손함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태자궁에 머무는 것을 거절하며, 성제가 후계자를 낳을 때까지 성제를 섬기기 위해 수도에 왔으며 수도의 정도 사신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다.

성제는 유흔을 태자로 인정한 것을 정식 입양으로 간주했고, 유흔이 더 이상 강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 되었다고 믿었다. 기원전 8년 12월경[4] 강 공자의 후계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사촌을 새로운 정도왕으로 봉했을 때, 유흔은 자신의 아버지가 계속 조상으로 숭배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정식 감사장을 제출했는데, 이에 성제는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유흔의 할머니 부씨는 손자를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책략을 꾸며, 성제의 황후였던 조비연과 표기장군이었던 왕근에게 뇌물을 보냈다. 조비연과 왕근은 성제에게 자식이 없어 자신들의 입장을 생각하여 유흔을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성제에게 권했다. 성제도 유흠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원복을 시킨 후 나라로 돌려보냈다.

원연 5년(기원전 8년), 유흔이 18세가 되자, 성제는 유흔을 황태자로 세웠다. 유흔은 한 번은 사퇴했지만, 결국은 입태자가 되어 수도로 초빙되었다. 이후 왕정군의 배려로, 10일에 한 번, 할머니 부씨와 어머니 정씨와 면회할 수 있게 되었다.[14]

3. 황제 즉위와 통치

기원전 7년 한 성제가 사망하자, 왕정군(태황태후)과 조비연(황태후)의 후원으로 애제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애제는 아버지 정도공왕 유강을 공황으로 높여 칭했다.

한서』 애제기의 찬에 따르면, 애제는 성제까지의 시대에 권력이 외척에게 옮겨간 상황을 보고 조정에 임해서는 대신을 엄하게 벌하여, 인주의 위엄을 강화하고, 무제·선제를 본받으려 했다.[18] 애제는 황제 즉위 후 두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듯하다.

20세기의 일본 중국사학자인 도진차는 "애제는 법률을 좋아하는 면이 있었다", "애제의 성격은, 원제나 성제보다 선제에 가깝고, (강권으로 다스리는 패도(법가)와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유가)를 잘 구분하여 행하는 통치 방침인) 한나라의 전통적인 통치 방침에 충실한 황제였다고 보아도 좋다"라고 평했다.[18]

성제 시대에 대사마에 임명된 왕망은 애제의 외척인 부씨와 정씨를 피하기 위해 사임을 청했지만, 애제는 이를 철회하라고 하였다.[19] 애제는 승상 공광, 대사공 하무, 좌장군 사단, 위위 부희를 왕정군에게 파견하여 왕망이 정무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전하게 했다. 결국 왕정군은 왕망에게 정무에 참여하게 했다.[19]

애제는 즉위 당시 20세였으며, 왕씨 일족에게 황제의 권한을 위임했던 성제의 관행을 즉시 종식시키고 통치에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고 지출을 대폭 줄였다.[19] 유약했던 원제와 사치스러웠던 성제의 통치 이후, 관리들과 백성들은 마침내 유능한 황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제는 외척 세력과의 갈등, 동현과의 관계, 흉노와의 관계 등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며 결국 평제에게 제위를 넘겨주게 된다.

3. 1. 즉위 초기의 개혁 시도

애제는 즉위 당시 20세였으며, 왕씨 일족에게 황제의 권한을 위임했던 성제의 관행을 즉시 종식시키고 통치에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고 지출을 대폭 줄였다.[19] 유약했던 원제와 사치스러웠던 성제의 통치 이후, 관리들과 백성들은 마침내 유능한 황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7년, 애제의 후원 아래 여러 관리들은 노역을 줄이기 위한 주요 제안을 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분노비 제한 (이전)노비 제한 (제안)
제후원하는 만큼200명
제후와 공주200명100명
기타 귀족과 평민100명 (3년 후 해방)30명



그러나 이 제안이 유출되자, 많은 노비 소유자들이 반발했고, 애제는 제한적인 버전의 제안만 발표하여 50세 이상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데 그쳤다.

즉위 직후, 고창후(高昌侯) 둥훙(董宏)은 애제의 생모 딩지(丁姬)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제안했다.[20] 그러나 왕망(王莽)과 스단(師丹)은 둥훙을 탄핵했고,[21] 애제는 왕망 등에게 양보하여 둥훙을 파면했다. 그러나 푸씨(傅氏)는 격노하여 존호를 요구했다.[22]

결국 애제는 생모 딩지에게 공황후(恭皇后), 생조모 푸씨에게 공황태후(恭皇太后)의 존호를 올리고, 외척인 푸씨 일족과 딩씨 일족을 열후에 봉했다.[23] 20세기 일본 중국사학자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애제는 왕씨 출신의 원태황태후(王政君)에 대항하기 위해, 조모 정도태후(定陶太后, 푸태후)와 모친 딩지에게 존호를 주려 했다"고 분석했다.[23]

미앙궁 연회에서 왕망은 푸태후의 자리를 문제 삼아 푸태후의 분노를 샀다.[19] 둥진츠(東晉次)는 이 사건이 왕씨와 푸씨·딩씨 간의 권력 투쟁이라고 분석했다.[27] 왕망은 사임했지만, 애제는 왕망에게 은총을 내리고 조정을 섬기게 했다.[19]

애제는 좌장군 스단을 대사마에 임명하고,[28] 왕근, 왕순, 공광, 하무에게 하사했다. 애제는 왕씨의 세력을 경계했지만, 즉위 초였기에 왕씨를 우대했다.[29]

스단은 빈부 격차 축소를 위해 사전(私田)과 노비 소유 제한을 건의했고,[30] 공광(孔光)·하무(何武) 등은 한전법을 제안했으나,[31] 실시되지 못했다.[32]

사례교위 해광은 왕근과 왕황의 사치를 상소하여 처벌받게 했고,[29] 애제는 측근이었던 왕거질(王莽의 사촌)과 왕굉을 임명했다.[33]

건평(建平)으로 개원하고 대사령을 내렸으며, 해광은 조비연(趙飛燕)의 과거를 상소하여 조비연의 친족들을 처벌했다.[14]

건평 2년(기원전 5년) 대사공과 주목의 명칭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둥진차는 이를 왕씨의 황제권 회복 시도라고 평가했다.[34]

승상 주박(朱博)은 왕망을 파면하라고 상소했지만, 애제는 왕망을 영지로 보내는 데 그쳤다.[19] 왕인(王仁)도 영지로 보내졌고, 많은 이들이 왕씨를 동정했다.[29] 간대부 양선(楊宣)의 상언에 감격한 애제는 왕읍을 성도후로 봉했다.[29]

애제는 동현을 총애하여 은상을 내렸다. 이 둘은 남색 관계였다고 여겨진다.[33]

해광 등의 추천을 받은 하하량은 적정자의 예언서를 근거로 개원(改元)을 주장했다.[35] 애제는 병 때문에 개원했지만, 병세에 변화가 없자 다시 연호를 되돌리고 하하량 등을 처벌했다.[36] 동진지는 한 왕조의 정당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평가했다.[34]

주박, 조현, 부안은 부고를 제거하려 했으나, 조현이 죄를 인정하여 처벌받았다.[37]

건평 3년 (기원전 4년) 한전법 실시가 다가왔지만, 동현 등이 반대하여 실시되지 못했다.[32]

남교, 북교 의식을 폐지하고, 감천, 분음의 사당을 복구했다. 이는 유가 관료들의 반발을 샀다.[34]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애제가 왕씨 세력 제거와 황제권 회복을 목표로 했다고 분석했다.[38]

손총과 식부궁이 유운을 고발하여 처벌받게 했다.[39]

건평 4년 (기원전 3년) 가뭄이 일어나고 서왕모 유언비어가 돌았다. 동진차는 성제 때부터 재앙이 증가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파탄났다고 지적했다.[40]

동현, 식부궁, 손총을 후로 봉했다.[39] 동진차는 한전제 무효화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41]

봉록이 2,000석과 600석인 관리, 그리고 천하의 남자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친할머니인 태황태후 부씨를 황태태후로 높였다.

공황의 원 북문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장군과 고위 관료에게 병법에 밝은 자를 천거하도록 명했다.

3. 2. 외척 세력과의 갈등

기원전 7년 한 성제가 사망하자, 왕정군(태황태후)과 조비연(황태후)의 후원으로 애제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애제는 아버지 정도공왕 유강을 공황으로 높여 칭했다.

한서』 애제기의 찬에 따르면, 애제는 성제까지의 시대에 권력이 외척에게 옮겨간 상황을 보고 조정에 임해서는 대신을 엄하게 벌하여, 인주의 위엄을 강화하고, 무제·선제를 본받으려 했다.[18] 애제는 황제 즉위 후 두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듯하다.

20세기의 일본 중국사학자인 도진차는 "애제는 법률을 좋아하는 면이 있었다", "애제의 성격은, 원제나 성제보다 선제에 가깝고, (강권으로 다스리는 패도(법가)와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유가)를 잘 구분하여 행하는 통치 방침인) 한나라의 전통적인 통치 방침에 충실한 황제였다고 보아도 좋다"라고 평했다.[18]

성제 시대에 대사마에 임명된 왕망은 애제의 외척인 부씨와 정씨를 피하기 위해 사임을 청했지만, 애제는 이를 철회하라고 하였다.[19] 애제는 승상 공광, 대사공 하무, 좌장군 사단, 위위 부희를 왕정군에게 파견하여 왕망이 정무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전하게 했다. 결국 왕정군은 왕망에게 정무에 참여하게 했다.[19]

즉위 직후, 고창후 둥훙은 『춘추』의 '어머니는 자식으로 인해 귀하게 된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애제의 생모 딩지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제안했다.[20] 그러나 왕망과 사단은 둥훙을 탄핵했고,[21] 애제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둥훙을 파면했다. 그러나 부씨는 이에 격노하여 애제에게 존호를 요구했다.[22]

5월, 애제는 황후를 조모의 일족 여성인 푸씨로 간택하고, 생모 딩지에게는 공황후, 생조모 푸씨에게는 공황태후의 존호를 올렸으며, 푸씨 일족과 딩씨 일족을 열후에 봉했다.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애제는 왕씨 출신의 원태황태후(왕정군)에 대항하기 위해, 조모 정도태후(푸태후)와 모친 딩지에게 존호를 주려 했다"고 평가한다.[23] '공(恭)'이라는 글자는 '번국(藩国)'을 의미했으며,[24] 낭중령 렁바오, 황문랑 돤유 등은 이 글자 사용에 반대하고 장안에 공황의 묘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많은 유사들이 찬성했으나, 사단은 "존비의 서열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반대했다.[25] 둥진츠는 이 대립의 배경에 법가적 통치 방침을 지지하는 주보 등의 당여와 유가의 교설을 받드는 사단·왕망 등의 일파 간의 대립이 있었다고 분석한다.[26]

미앙궁 연회에서 내자령이 푸태후의 자리를 태황태후 왕정군 옆에 두자, 왕망은 "정도태후는 번첩인데, 무엇으로 지존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라며 내자령을 책망하고 푸태후의 자리를 옮기게 했다. 푸태후는 격노하여 연회에 불참하고 왕망을 원망했다.[19] 둥진츠는 왕망과 사단이 푸씨와 딩씨의 존호 봉상에 반대한 배경에는 왕씨와 푸씨의 궁정 서열, 정치적 권위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한다.[27]

왕망은 다시 사임을 요청했고, 애제는 금 500근과 마차를 하사하며 왕망을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10일에 한 번씩 사자를 보내고, 황우취 350호를 더해주고, 특진, 급사중으로 임명하여 매달 1일과 15일에 뵙게 하는 등 특별 대우를 했다.[19] 애제는 좌장군 사단을 왕망 대신 대사마에 임명했다.[28]

6월, 애제는 즉위 공신인 취양후 왕근에게 2천 호, 태복 안양후 왕순에게 500호, 승상 공광과 대사공 하무에게 각각 천 호를 하사했다. 애제는 왕씨의 교만함을 알고 있었지만, 즉위 초기였기에 왕씨를 우대했다.[29]

황태후 부씨는 '정도'라는 수식어가 붙은 칭호에 불만을 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공광, 사단 등 핵심 관리들을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부희는 부 황태후의 행동에 반대하여 변경으로 좌천되었다.

기원전 6년, 부씨는 애제의 사촌 중산왕 유기자의 할머니 풍원 황태자비가 애제와 자신을 저주했다는 거짓 이유로 풍씨 가문을 공격했다. 환관 사립을 통해 풍원 황태자비의 친척들을 고문하여 17명의 풍씨 가문 구성원이 사망했다. 이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어 관리와 백성들은 애제에게 실망했다.

기원전 5년, 애제는 아버지의 존호에서 '정도'를 제거하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각각 제태태후, 제태후라는 칭호를 내렸다. 수도에는 4명의 황태후가 각각 예산을 받게 되었다. 그해 7월 9일, 정태후가 사망했다.[5]

궁중 암투 외에도, 애제는 좋은 제안을 승인하고도 실행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관리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পরে 입장을 바꾸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유능한 관리들을 승진시켰다가 불쾌하게 여기면 강등시키는 일도 잦았다.

3. 3. 동현(董賢)과의 관계와 국정 문란

기원전 4년경, 애제는 동현이라는 미남을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가들은 그들이 동성애 관계였을 것이라고 널리 믿고 있다.[2] 당시 중국 남성들은 여러 번의 성관계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동성애는 이와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6] 애제는 물론, 모두 결혼한 황제들의 긴 계보에서 나왔으며, 그들의 공식 역사에는 남성 동반자가 기록되어 있다.[7]

애제는 동현에게 조정이 경악할 정도로 많은 영예를 부여했다.[2] 동현과 그의 아내는 궁으로 이사했고, 동현의 누이는 황후가 되었다.[8] 동현의 아버지는 관내후(關內侯)로 임명되었다.[9] 애제는 또한 동현을 위해 황궁만큼 호화로운 저택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동현에 대한 이러한 영예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엄벌에 처해졌다.[10]

기원전 3년, 재상 왕가(王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애제는 동현을 고안후(高安侯)로 봉했다. 이듬해 재상은 애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동현에게 부여된 영예를 억제할 것을 촉구했다. 이 보고서는 동현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신중하게 작성되었다. 이 보고서는 동현이 문제가 가장 총애했던 애인 등통(鄧通)과 같은 운명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등통은 문제의 후계자에 의해 재산이 몰수된 후 굶어 죽었고, 또는 무제의 총애를 받은 한언(韓嫣)은 황태후 왕지에 의해 황제의 양식을 부적절하게 취했다고 비난받은 후 처형되었다.

기원전 2년, 왕가가 동현의 영지 확장에 반대하자,[11] 애제는 그를 허위로 죄를 씌워 단식으로 자결하게 했다. 기원전 1년 1월 1일, 동현은 22세(동아시아식 계산)의 나이로 무관의 지휘관이 되었고 사실상 행정부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가 되었다. 또한 동현 가문의 여러 구성원들이 중요한 조정 관리가 되었으며, 기원전 2년 2월에 태황태후 부씨가 사망한 후 부씨와 정씨를 대체했다.

기원전 4년 이 무렵, (3년을 유예 기간으로 했던) "한전법"의 실시가 다가왔지만, 고위직에 있던 부씨, 정씨 일족, 동현이 반대했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잠시 실시를 연기했지만, 결국에는 실시되지 않았다.[32]

기원전 3년 봄, 대가뭄이 일어났다. 관동 백성들 사이에 "서왕모가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 군과 국을 돌며 서쪽으로 전해져 장안에까지 들렸다. 백성들은 모여 서왕모를 제사 지내고, 혹은 불을 들고 지붕에 올라 북을 치며 소리치며 서로 두려워했다.

동진차는 "재앙은 원제 때부터 서서히 증가하여, 성제 때에 들어서 관동이나 관중에서의 홍수 기사가 두드러진다", "실제로, 성제 때부터 애제 때에 걸쳐 지방 정치의 황폐, 백성들의 생활 파탄이 많은 논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서' 포선전에 따르면, 포선은 (중략), 이와 같은 현실을 초래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중앙, 지방의 관리들의 행태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40]

3월, 동평왕 유운을 고발한 공적이 있던 시중, 부마도위 동현을 고안후에, 광록대부가 된 식부궁을 의릉후에, 남양태수가 된 손총을 방양후에 봉한다. 각각 식읍은 천 호였다.[39]

동진차는 "마침 한전제 실시 예정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애제가 동현에게 규정을 대폭 초과한 토지를 하사한 것은, 한전제의 무효화를 말해주고 있으며, (동현에게 토지 하사를 간했던) 왕가의 말인 '균전지제'는 이 한전제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1]

기원전 2년 애제는 조모인 부씨를 원제의 위릉에 합장하고, 원제의 정식 황후는 아니었지만, "효원부황후"라는 존호를 시호로 올렸다[47]。 3월, 애제는 황태후 부씨의 유조를 핑계 삼아, 동현에게 2천 호를 더해주라는 조서를 내렸고,[39] 애제의 동현에 대한 총애를 싫어했던 승상 왕가는 실언으로 투옥된 후 옥사했고, 대사마 표기장군 정명 (애제의 생모인 정희의 오빠)도 파면되었다.[39]

애제는 동현을 대사마 위장군에 임명했다. 애제는 동현에게 칙서를 내렸다. "짐은 천명을 받아 제왕의 자리에 올랐고, 옛것을 생각하여 너를 삼공에 세워 한나라를 보좌하게 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군을 이끌고 통솔하라. 적과 싸워 멀리 있는 자를 안정시키고,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잡아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라.[49] 천하의 무리들은 짐의 제약을 받들어 장군을 명으로 여기고, 병력을 위력으로 알 것이다. 어찌 삼가고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48]

애제는 기린전에서 주연을 베풀 때 동공, 동현 부자 등 친족도 연회에 참석했으며, 시중 및 중상시인 왕거질, 왕홍 형제도 참석했다. 이때 만취한 애제는 동현에게 웃으며 "나는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을 본받으려고 하는데, 어떻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본 왕홍은 "천하는 고황제(유방)의 것이며, 폐하(애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는 종묘를 계승하셨고, 자손에게 영원히 이어져야 합니다. 통치의 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자가 망국의 희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애제를 간했다. 애제는 묵묵부답하며 불쾌해했고, 좌우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왕홍은 연회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연회에 불리지 못했다.[48]

5월, 삼공의 관직 분담을 바로잡았다. 대사마 위장군 동현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승상 공광을 대사도로 임명하고, 어사대부 팽선을 대사공으로 임명하여 장평후에 봉했다.

애제는 죽음에 임하여 황제 새(璽)와 수(綬)를 동현에게 맡겼지만, 왕홍이 태황태후 왕정군에게 동현으로부터 황제 새와 수를 빼앗을 것을 청하고, 그 허락을 얻어 칼을 차고 동현에게서 새와 수를 빼앗아 태황태후에게 건네주었다.[52]

동현은 대사마에서 파면되었고, 동현과 그의 아내는 그날 자결했다.[48]

"단수(斷袖)"는 남색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는 동현(董賢)과 함께 잠자리에 든 애제(哀帝)가, 애제의 옷소매 위에서 잠든 동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옷소매를 잘라 일어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애제는 동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매를 잘랐다

3. 4. 흉노와의 관계

이 해, 흉노의 오주류약제선우는 상소를 올려 다음 해에 입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42] 이때, 애제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떤 자가 "흉노는 황하 상류에서 와서 사람을 해쳤습니다. 황룡 연간(선제 시대)·경녕 연간(원제 시대)부터 흉노 선우가 중국에 왔을 때는 대규모 장례가 치러졌습니다"라고 상언했다.[43] 이를 들은 애제는 오주류약제선우의 내조를 꺼리고, 공경들도 비용 부담을 꺼렸기 때문에 내조 허가를 보류했다.[44]

오주류약제선우의 사신은 귀환하려 했지만, 바로 직전에 황문랑 양웅이 상소를 올려, 과거 한나라가 흉노에게 복속되기까지의 많은 희생, 그리고 한나라와 흉노의 우호 관계를 통한 백성의 안전에 이익이 있음을 설파하며 "선우가 상소를 올려 내조를 청하는데, 국가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한나라와 흉노를 불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마음을 써 변방의 백성을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미연에 방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45] 양웅의 간언을 들은 애제는 생각을 고쳐, 흉노의 사신을 불러들이고, 더 나아가 선우에게 답서를 내려 내조를 허락했다.[46]

이 해, 오주류약제선우가 입조하기 위해 출발하지 못하고 병에 걸렸다. 또한 사신을 보내어 내년에 입조할 것을 요청했다. 고사에 따르면 선우가 입조할 때는 그 수행자는 왕 이하 종자에 이르기까지 200여 명이었다. 선우는 또한 상서를 올려 "천자의 신령스러움을 입어 백성이 번성합니다. 따르는 자 500명을 데리고 입조하여 천자의 융성한 덕을 밝히게 해주십시오."라고 청원했다. 애제는 선우의 이 소원을 모두 허락했다.

원수 2년(기원전 1년) 정월, 흉노의 오주류약제선우가 입조했다. 애제는 선우가 온 방향이 태세(목성)에 해당했기 때문에 염승하려 하여, 선우를 상림원의 포도궁에 묵게 했다. 애제는 선우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지만, 선우는 그 사정을 알고 있었다. 애제는 하평 연간에 흉노에게 하사한 것과 동일한 물품을 하사하고, 의복 370벌, 비단 3만 필, 솜 3만 근을 선우에게 더 하사했다.

애제는 이를 환영하여 연회를 열었고, 여러 신하들도 함께했다. 대곤미는 (대사마인) 동현이 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 통역에게 질문하자, 애제는 통역을 통해 "대사마(동현)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기에 젊은 나이에도 이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대곤미는 일어나 배례하며 한나라 조정이 훌륭한 신하를 얻은 것을 축하했다.

2월, 모든 의례가 끝나자 오주류약제선우는 귀국하게 되었고, 중랑장 한황에게 선우를 전송하게 했다. 선우에게 변방으로 나가 우회하여 귀국하게 했기 때문에, 한황은 식량이 부족해 선우에게 식량을 받았고, 기일을 어겨 50여 일간 돌아오지 못했다.

3. 5. 죽음과 평가

애제는 기원전 1년에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소 앓아왔던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임종 직전 애제는 동현에게 황위를 물려주라고 명령했지만, 이 명령은 조정 신하들에게 무시되었다.[12]

태황태후는 재빨리 옥새를 장악하고 동현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 왕망을 섭정으로 복귀시켰다. 동현과 그의 아내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애제의 뒤를 이어 평제가 황위에 올랐지만, 이는 왕망이 9년 후 황위를 찬탈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애제가 그의 할머니의 영향과 동현에 대한 애정으로 권력을 남용한 것은 백성과 관리들로 하여금 왕씨의 복귀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애제는 주연을 베풀 때 동현에게 "나는 에게 선양한 것을 본받으려고 하는데, 어떻소?"라고 말하며 황위를 물려줄 의향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홍은 "천하는 고황제(유방)의 것이며, 폐하(애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하며 반대했다.[48]

기원전 1년 6월 27일, 애제는 미앙궁에서 25세로 사망했다. 후계자는 없었다. 애제는 죽기 전 황제의 옥새를 동현에게 맡겼지만, 왕홍이 왕정군에게 요청하여 동현에게서 옥새를 빼앗아 왕정군에게 건네주었다.[52] 동현은 대사마에서 파면되었고, 동현과 그의 아내는 그날 자결했다.[48] 왕정군은 왕망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정치의 실권은 왕씨가 다시 장악하게 되었으며, 평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한다.[53] 9월에 애제는 의릉에 장례되었다.

애제의 시대는 궁실과 부고의 재산이 많았고, 민중의 부는 문제와 경제 시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천하의 호구는 융성했다고 전해진다.[32]

동진차는 "애제의 정치는 그 때마다 신하의 주상대로 재가하여 주체성이 없어 보이는 점도 있지만, 반고가 애제기의 '찬'에서 '성제의 치세에는 정권이 황실을 떠나 외척의 손에 넘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본 애제는, 그 때문에 조정에 임해서는 종종 대신을 처벌하고, 무제와 선제를 본보기로 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애제의 통치 방침은, 원후(왕정군)를 비롯한 왕씨 일족에게 매우 좋지 않은, 더 나아가 일족의 멸망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라고 평했다.[54]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일종의 종말 사상이 한(漢) 왕조의 재수명을 요구하는 주장의 배경이 되었다. 잇따른 재해와 이변이 어떤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애제는 외척인 왕씨를 배제하고 황제 권력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총애하여 정치를 위임한 동현의 무능으로 인해 정국은 혼란을 겪었다"라고 평했다.[55]

4. 연호


참조

[1] 서적 Emperor Ai's biography in Book of Han
[2] 서적 Passions of the Cut Sleev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3] 서적 Vol.30 of Zizhi Tongjian
[4] 서적 11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Sui'he era, per vol.30 of Zizhi Tongjian
[5] 서적 gengshen day of the 6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Jian'ping era, per vol.34 of Zizhi Tongjian
[6] 웹사이트 Passions of the Cut Sleev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7] 간행물 Encyclopaedia of Homosexuality New York 1990
[8] 웹사이트 Passions of the Cut Sleev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Passions of the Cut Sleev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13] 서적 『漢書』哀帝紀
[14] 서적 『漢書』外戚伝下
[15] 서적 『漢書』哀帝本紀:年三歳嗣立為王,長好文辭法律。
[16] 서적 『漢書』哀帝本紀:元延四年入朝,盡從傅・相・中尉。時成帝少弟中山孝王亦來朝,獨從傅。上怪之,以問定陶王,對曰:「令,諸侯王朝,得從其國二千石。傅・相・中尉皆國二千石,故盡從之。」上令誦詩,通習,能説。
[17] 서적 『漢書』哀帝本紀:成帝由此以為不能,而賢定陶王,數稱其材。
[18]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19] 서적 『漢書』王莽伝上
[20] 서적 『漢書』王莽伝上:時哀帝祖母定陶傅太后・母丁姫在,高昌侯董宏上書言:「春秋之義,母以子貴,丁姫宜上尊號。」
[21] 서적 『漢書』王莽伝上:莽與師丹共劾宏誤朝不道,語在『丹傳』。
[22] 서적 『漢書』巻86 何武王嘉師丹伝:上新立,謙讓,納用莽・丹言,免宏為庶人。傅太后大怒。要上欲必稱尊號,上於是追尊定陶共王為共皇,尊傅太后為共皇太后,丁后為共皇后。
[23] 서적 『王莽―改革者の孤独』
[24] 웹사이트 王莽 :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白帝社 2003-11-04
[25] 서적 『漢書』師丹伝
[26]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27]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28] 서적 『漢書』王商史丹伝
[29] 서적 『漢書』元后伝
[30] 서적 『漢書』巻24上 食貨志上:師丹輔政,建言:(後略)。
[31] 서적 『漢書』巻24上 食貨志上:諸侯王・列侯皆得名田國中。列侯在長安,公主名田縣道,及關内侯・吏民名田皆毋過三十頃。諸侯王奴婢二百人,列侯・公主百人,關内侯・吏民三十人。期盡三年,犯者没入官。
[32] 서적 『漢書』食貨志上
[33] 서적 『漢書』佞幸伝
[34]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35] 서적 『漢書』巻75 眭両夏侯京翼李伝:漢暦中衰,當更受命。(中略)宜急改元易號,乃得延年益壽,皇子生,災異息矣。(後略)
[36] 서적 漢書
[37] 서적 漢書 s:zh:漢書/卷083
[38] 서적 王莽―改革者の孤独
[39] 서적 漢書 s:zh:漢書/卷011, s:zh:漢[...]
[40]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41]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42] 서적 漢書 s:zh:漢書/卷094下
[43] 서적 漢書
[44] 서적 漢書
[45] 서적 漢書
[46] 서적 漢書
[47] 서적 漢書 s:zh:漢書/卷097
[48] 서적 漢書 s:zh:漢書/卷093
[49] 서적 論語
[50] 서적 漢書 哀帝紀
[51] 서적 漢書 s:zh:漢書/卷011, s:zh:漢[...]
[52] 서적 後漢書
[53] 서적 漢書 s:zh:漢書/卷012
[54] 서적 王莽 儒家の理想に憑かれた男
[55] 서적 王莽―改革者の孤独
[56] 문서 여나라
[57] 문서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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