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리베리오
1. 개요
교황 리베리오는 4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아리우스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유배를 당하고, 로마로 돌아온 후에도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아리우스 신조에 서명하고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했다고 비판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받으며,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리베리오 대성전'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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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년 사망 -
지도림
지도림은 동진 시대의 승려로, 불교와 노장사상을 융합하여 격의불교 발전에 기여했으며, 《장자》에 주석을 달고 왕희지 등과 교류하며 불교 사상을 전파하여 한국 불교, 특히 선불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
4세기 교황 -
교황 다마소 1세
다마소 1세는 366년부터 384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재임하며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교회를 수호하고 불가타 성경 번역을 지원했으며, 교황의 권위를 강화했다. -
4세기 교황 -
교황 율리오 1세
교황 율리오 1세는 337년부터 352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며 동방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했고, 사르디카 공의회 개최에 영향을 주어 로마 주교의 권위를 강화했으며, 여러 바실리카와 교회 건설에 힘쓴 공로로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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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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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2. 재임 기간
리베리우스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었다. 그 후 아를(353–354)에 있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편지를 써서 아타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아퀼레이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사절 빈센티우스 카푸아는 아를 공의회에서 황제의 강요로 알렉산드리아의 정통 파트리아르크를 규탄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으며, 리베리우스를 설득할 수 없게 되자 그를 베로에로 유배 보냈다.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리베리우스는 로마로 복귀했다. 황제는 리베리우스가 펠릭스 2세와 함께 교회를 다스리게 하려 했지만, 리베리우스가 도착하자 펠릭스는 로마인들에게 추방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에 사망한 후, 리베리우스는 아리우스파와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아리우스파 회의의 법령을 무효화했지만, 아타나시우스와 푸아티에의 힐라리오의 동의를 얻어 서명 후 지지를 철회한 주교들은 유지했다. 366년, 리베리우스는 동방 주교단의 사절단을 호의적으로 맞이했고, 옛 아리우스파 중 온건파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였다.
2.1. 초기 활동
리베리우스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첫 번째로 기록된 행위로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었다. 그 후, 당시 아를(353–354)에 머물고 있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편지를 써서 아타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아퀼레이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사절 빈센티우스 카푸아는 아를에서 열린 소집 공의회에서 황제에 의해 억지로 알렉산드리아의 정통 파트리아르크를 규탄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2.2. 아리우스파와의 갈등과 유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에 동조적이었고, 리베리우스를 자신의 관점으로 설득할 수 없게 되자 교황을 베로에로 유배 보냈다. 2년 이상 트라키아에서 유배 생활을 한 후, 리베리우스는 일시적으로 입장을 바꾼 것처럼 보였으나, 이는 리베리우스에게 귀속된 세 통의 편지(아마도 위조된 것)에 의해 부분적으로 입증된다. 황제는 로마인들의 압력에 의해 그를 소환했다. 로마인들은 그의 꼭두각시 펠릭스 2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교좌가 펠릭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점거된 상태에서, 리베리우스가 로마로 보내지기까지 1년이 걸렸다. 황제의 의도는 리베리우스가 펠릭스와 함께 교회를 공동으로 통치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리베리우스가 도착하자 펠릭스는 로마인들에 의해 추방되었다. 리베리우스와 펠릭스 모두 리미니 공의회 (359)에 참여하지 않았다.
교황이 유배에서 돌아온 것은 로마인들에게 기쁨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비판도 받았다. 필로스토르기우스는 교황 리베리우스가 시르미움의 두 번째 신조에 서명한 후에야 교황직에 복귀했다고 주장했고, 소조멘은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주장했지만, 푸아티에의 힐라리오는 "그를 추방한 것이 더 불경한 짓인지, 그를 복귀시킨 것이 더 불경한 짓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위조된 편지와 아리우스파, 반 아리우스파 및 루시페리아누스파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일부 작가들은 교황 리베리우스가 나중에 시르미움에서 아리우스 신조에 서명한 것을 뉘우쳤다고 인정하지만, 그가 서명했는지는 원본 출처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에 근거할 때 매우 의심스럽다.
2.3. 로마 복귀와 이후 활동
로마 시민들의 극심한 압력으로 리베리우스는 로마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의도는 리베리우스가 펠릭스 2세와 함께 교회를 공동으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지만, 리베리우스가 도착하자 펠릭스는 로마인들에 의해 추방되었다. 리베리우스와 펠릭스 2세 모두 리미니 공의회(359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361년에 사망한 후, 리베리우스는 아리우스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아리우스파 회의의 법령을 무효화했지만, 아타나시우스 주교와 푸아티에의 힐라리오의 동의를 얻어 서명 후 지지를 철회한 주교들은 유지했다. 366년, 리베리우스는 동방 주교단의 사절단을 호의적으로 맞이했고, 옛 아리우스파 중 더 온건한 사람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였다.
3. 평가와 영향
교황 비오 9세와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리베리오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 아리우스파에 맞섰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리베리오가 시르미움의 신조에 서명하고 아타나시오를 단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리베리오를 성인으로 시성하여 공경하고 있다.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이따금씩 ‘리베리오 대성전’이라고도 불린다.
3.1. 긍정적 평가
교황 비오 9세는 《Quartus Supra》에서 리베리오가 아리우스파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았으며, 아타나시오를 단죄하기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회칙 《사도들의 으뜸 베드로》(Principi Apostolorum Petro)에서 리베리오가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유배길을 떠났다고 언급하였다.
3.2. 부정적 평가
일부 역사가들은 리베리우스가 시르미움의 신조에 서명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필로스토르기우스는 리베리우스가 시르미움의 두 번째 신조에 서명한 후에야 교황직에 복귀했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교황을 죽이겠다고 위협한 후 교황 리베리오가 그를 단죄했다고 말했다.
3.3. 동방 정교회의 시성
동방 정교회에서는 리베리오를 성인으로 시성하여 공경하고 있으며, 축일은 8월 27일이다. 콥트 기독교에서는 로마 주교 성 리베리오의 서거를 피 코기 에나보트 4일에 기념한다.
4. 유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리베리오 대성전'이라고도 불린다. 마솔리노 다 파니칼레가 1428/29년에 그린 산타 마리아 마조레 건립에는 교황 리베리오가 기공식을 거행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교황 비오 9세는 1863년 회칙 Quartus supra에서 리베리오가 아리우스파에 의해 거짓 고발을 당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교황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리베리오가 그를 단죄했다고 주장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1920년 회칙 Principi Apostolorum Petro에서 리베리오가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망명길에 올랐다고 언급했다.
동방 정교회는 리베리오를 성인으로 시성했으며, 축일은 8월 27일이다. 콥트 기독교에서는 4일 피 코기 에나보트에 로마 주교 성 리베리오의 서거를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