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퀼레이아
1. 개요
아퀼레이아는 이탈리아 우디네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나티소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기원전 181년에 로마 공화정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로마 시대에는 북동쪽 변방을 방어하는 요새이자 발트해 호박 무역의 중심지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번영을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훈족, 서고트족,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 쇠퇴했다. 11세기에는 아퀼레이아 대주교가 세속적 주권을 행사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1420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병합되었다. 주요 유적으로는 바실리카, 고대 로마 유적, 국립 고고학 박물관 등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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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명칭 | 코무네 디 아퀼레이아 |
|---|---|
| 토착어 명칭 | 올레fur / |
| 위치 | 45° 46′ 11.01″ N, 13° 22′ 16.29″ E |
| 지역 |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 |
| 도 | 우디네도 (UD) |
| 시장 | 에마누엘레 조리노 |
| 면적 | 37.44 km² |
| 인구 | 3,302 명 (2017년 4월 30일) |
| 인구 밀도 | 88.2 명/km² |
| 거주민 | 아퀼레이에시 |
| 해발 고도 | 5 m |
| 시간대 | CET (UTC+1) |
| 여름 시간대 | CEST (UTC+2) |
| 우편 번호 | 33051 |
| 지역 번호 | 0431 |
| ISTAT 코드 | 030004 |
| 수호 성인 | 에르마고라스와 포르투나투스 성인 |
| 축일 | 7월 12일 |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 프라치오니 | 벨리냐, 벨베데레, 비올라, 모나스테로 |
|---|---|
| 인접 코무네 | 필라 |
| 공식 명칭 | 아퀼레이아의 고고 유적 지구와 총대주교 대성당 |
|---|---|
| ID | 825 |
| 등재 연도 | 1998년 |
| 기준 | 문화: iii, iv, v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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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로마 유적 -
트리에스테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 북동부 아드리아해 연안의 도시로, 로마 시대 번성한 항구 도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 도시이자 국제적인 과학 연구 및 문화 중심지이다. -
기원전 180년 -
여씨의 난
여씨의 난은 기원전 2세기 초 여태후가 외척 여씨 일족을 등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다 유씨 황족과 공신들에 의해 진압된 사건으로, 외척 세력의 발호와 권력 남용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파괴된 도시 -
헤르쿨라네움
헤르쿨라네움은 이탈리아 에르콜라노에 위치한 고대 로마 도시로, 오스칸족이 건설한 후 로마의 무니키피움이 되었으나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혀 1709년에 발견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파피루스의 빌라 등 다양한 유적을 통해 고대 로마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
파괴된 도시 -
폼페이
기원전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는 로마 식민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나 화산재에 묻혀 보존되면서 고대 로마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적이 되었고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1. 위치 및 인접 코무네
고리치아에서 남서쪽으로 약 27km, 우디네에서 남남동쪽으로 약 35km, 트리에스테에서 북서쪽으로 약 34km, 베네치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90km 거리에 있다.。 고대 도시 아퀼레이아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 건설되었으나, 해안선이 이동하여 현재는 내륙으로 약 5km 들어와 있다.
인접한 코무네는 다음과 같다.
* 피우미첼로 빌라 비첸티나 - 북쪽
* 그라도 (GO) - 남쪽
* 테르초 디 아퀼레이아 - 북서쪽
2.2. 지형 및 기후
나티사 강Natissa이탈리아어이 코무네를 흐르고 있으며, 아퀼레이아는 그 좌안(동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아퀼레이아의 이탈리아 기후 분류Classificazione climatica dei comuni italiani이탈리아어에 따르면 일조 시간은 2244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지진 위험 등급Classificazione sismica dell'Italia이탈리아어에서는 3등급으로 분류된다。
3. 역사
기원전 18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시디누스 3인이 라틴 권을 가진 식민지로 아퀼레이아를 건설했다. 아퀼레이아는 율리안 알프스 남쪽, 나티소강을 따라 위치하여 트란스파다나 이탈리아 북동쪽 국경 요새 역할을 했다. 아드리아해 베네티를 보호하고, 카르니족과 히스트리족 등 갈리아 키살피나 진출을 막는 역할을 했다. 또한 발트해 호박 무역의 종착지로서 상업적으로도 중요했다.
3인 위원회는 3,000가구를 이 지역으로 이끌어 정착시켰으며, 기원전 169년에는 1,500명의 라틴 식민지 개척자들이 가족과 함께 주둔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착했고, 비아 포스투미아, 비아 포필리아 등 도로 건설로 교통과 통신이 개선되었다. 기원전 90년 아퀼레이아는 무니키피움이 되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이 도시를 방문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아피데스족에게 약탈당했지만, 이후 재건되어 "두 번째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했다. 1세기를 통해 문화와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유대인 장인이 만드는 유리 공예품은 이 도시의 특산품이 되었다.
167년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아퀼레이아는 격렬한 공격을 받았으며, 16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퀼레이아를 제국 북동부 제일의 요새 도시로 만들었다. 238년 아퀼레이아는 원로원 편에 서서 싸웠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암살될 때까지 몇 달 동안 공격을 견뎌내며 그 견고함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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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년 - 305년) 치세에 아퀼레이아에는 궁전이 건설되었고, 조폐소를 가지고 독자적인 통화를 만들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재위: 306년 - 337년)도 이 도시에 오래 머물렀다. 4세기 말, 아우소니우스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도시로 아퀼레이아를 꼽았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발생한 세 아들들의 다툼 속에서, 아퀼레이아를 빼앗으려 침공한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는 삼남 콘스탄스 1세에게 패배하여, 이 도시의 성벽 아래에서 살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되어 기독교가 공인된 후, 주교 테오도로는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다. 381년에 첫 회의가 열린 이후, 이 도시는 수세기 동안 공의회의 무대가 되었다.
401년과 408년 두 차례에 걸쳐 아퀼레이아는 서고트족의 알라릭 1세에 의해 포위되었고, 452년에는 훈족의 아틸라에 의해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퀼레이아 주민들은 인근 작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석호로 피난하여 베네치아와 그라도 도시의 기초를 세웠다.
아틸라의 파괴 이후 아퀼레이아는 규모가 작아졌지만 재건되었다. 553년 아퀼레이아의 대주교는 총대주교(Patriarch)가 되었다. 그러나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도시는 다시 파괴되었다.
606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는 둘로 분열되었으며, 699년까지 이어졌지만, 총대주교의 자리가 코르몬스나 치비달레로 이전된 후에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774년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면서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는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0세기에는 마자르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11세기까지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가 가진 힘은 커져 프리울리와 아퀼레이아의 세속적인 통치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총대주교에게 이 지역을 주어 봉건 영주로 삼았다. 11세기 전반의 총대주교 포포(Poppo, Patriarch of Aquileia독일어)는 아퀼레이아의 성당을 재건한 인물이나, 1027년과 1044년에 그라도를 공격, 파괴했다.
총대주교좌는 1238년 우디네로 옮겨졌다. 14세기 총대주교령은 최대 영역을 가지게 되었다.
1420년 베네치아가 우디네를 병합하면서 총대주교좌는 아퀼레이아로 돌아왔다. 1445년 베네치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총대주교 루도비코 트레비산Lodovico Trevisan영어은 세속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대주교 자리에는 베네치아인만이 임명되었다.
1751년 총대주교좌는 정식으로 해체되었으며, 대신 우디네와 고리치아에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3.1. 고대
기원전 18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시디누스 3인이 라틴 권을 가진 식민지로 아퀼레이아를 건설했다. 아퀼레이아는 율리안 알프스 남쪽, 나티소강을 따라 위치하여 트란스파다나 이탈리아 북동쪽 국경 요새 역할을 했다. 아드리아해 베네티를 보호하고, 카르니족과 히스트리족 등 갈리아 키살피나 진출을 막는 역할을 했다. 또한 발트해 호박 무역의 종착지로서 상업적으로도 중요했다.
3인 위원회는 3,000가구를 이 지역으로 이끌어 정착시켰으며, 이주해온 식민지 개척자들은 출신 지역과 직위에 따라 다른 크기의 토지를 받았다. 기원전 169년에는 1,500명의 라틴 식민지 개척자들이 가족과 함께 주둔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착했고, 비아 포스투미아, 비아 포필리아 등 도로 건설로 교통과 통신이 개선되었다.
기원전 90년 아퀼레이아는 무니키피움이 되었고, 시민들은 로마 부족 벨리나에 속하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이 도시를 방문했고, 기원전 59–58년에 근처에 겨울 캠프를 쳤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아피데스족에게 약탈당했지만, 이후 재건되어 "두 번째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했다. 7년에 본국 제10주 "베네치아 에토 히스트리아"가 설치되면서, 1세기를 통해 문화와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이 도시는 제국의 북동부 도시 베르디데나(인스브루크)로 향하는 율리아 아우구스타 가도의 출발점이었으며,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이탈리아 출신 외에도, 켈트인, 일리리아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유대인, 시리아인이 살면서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 유리 세공, 포도주 (푸키눔), 호박, 금속 (노리쿰 산) 등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특히 유대인 장인이 만드는 유리 공예품은 이 도시의 특산품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토착 태양신 베레누스를 대체한 로마 신앙이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유대인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유대교의 계율을 실천했지만,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들도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병사들 중에는 미트라교를 숭배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방문했으며, 티베리우스의 아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167년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아퀼레이아는 격렬한 공격을 받았으며, 16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퀼레이아를 제국 북동부 제일의 요새 도시로 만들고 야만족의 위협에 대비했다. 도시는 최전성기를 맞아 인구는 10만 명에 달했다. 238년 아퀼레이아는 원로원 편에 서서 싸웠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암살될 때까지 몇 달 동안 공격을 견뎌내며 그 견고함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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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년 - 305년) 치세에 아퀼레이아에는 궁전이 건설되었고, 이후 황제는 종종 머물렀다. 아퀼레이아가 조폐소를 가지고 독자적인 통화를 만들게 된 것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재위: 306년 - 337년)도 이 도시에 오래 머물렀고, 그 치세의 중요한 사건 중 일부는 이 도시에서 일어났다. 또한, 아퀼레이아는 해군 기지가 되었고, 베네치아 에토 히스트리아 주의 지사의 치소였다. 4세기 말, 아우소니우스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도시로 아퀼레이아를 꼽으며, 로마, 메디올라눔(밀라노), 카푸아 다음으로 언급했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발생한 세 아들들의 다툼 속에서, 아퀼레이아를 빼앗으려 침공한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는 삼남 콘스탄스 1세에게 패배하여, 이 도시의 성벽 아래에서 살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되어 기독교가 공인된 후, 주교 테오도로는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다. 아퀼레이아 교회는 동방 지역 포교에 있어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아퀼레이아의 주교는 수도 대주교 (metropolitan archbishop)의 지위에 놓였다. 381년에 첫 회의가 열린 이후, 이 도시는 수세기 동안 공의회의 무대가 되었다.
3.1.1. 로마 공화정 시대
기원전 18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시디누스의 3인 위원회가 라틴 권을 가진 식민지로 아퀼레이아를 건설했다. 아퀼레이아는 율리안 알프스 남쪽, 나티소강을 따라 위치했으며, 트란스파다나 이탈리아 북동쪽 국경 요새 역할을 했다. 아드리아해 베네티를 보호하고, 카르니족과 히스트리족 등의 갈리아 키살피나 진출을 막는 역할을 했다. 또한 발트해 호박 무역의 종착지로서 상업적으로도 중요했다.
3인 위원회는 3,000가구를 이 지역으로 이끌어 정착시켰다. 식민지화 가족의 대부분은 피케눔, 사무니움, 캄파니아에서 왔으며, 이주해온 식민지 개척자들 중 페디테스는 각각 50 유게라의 토지를 받았고, 백인대장은 각각 100 유게라를 받았으며, 에퀴테스는 각각 140 유게라를 받았다.
기원전 169년, 1,500명의 라틴 식민지 개척자들이 가족과 함께 주둔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착했다. 비아 포스투미아, 비아 포필리아 등 도로 건설로 교통과 통신이 개선되었다.
기원전 90년, 아퀼레이아는 무니키피움이 되었고, 시민들은 로마 부족 벨리나에 속하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이 도시를 방문했고, 기원전 59–58년에 근처에 겨울 캠프를 쳤다.
3.1.2. 로마 제국 시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아피데스족에게 약탈당했지만, 이후 재건되어 "두 번째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했다. 7년에 본국 제10주 "베네치아 에토 히스트리아"가 설치되면서, 1세기를 통해 문화와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이 도시는 제국의 북동부 도시 베르디데나(인스브루크)로 향하는 율리아 아우구스타 가도의 출발점이었다. 이 도로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도나우강을 따라 노리쿰으로 향하는 길은 빌눔(클라겐푸르트)을 거쳐 리메스를 따라 라우리움(로르히)으로, 판노니아로 향하는 길은 아에모나(류블랴나), 실미움(스렘스카 미트로비차)으로 이어졌다. 또한 아드리아해를 따라 타르사티카(리에카 근교)나 시스치아(시자크)로 향하는 길은 타르게스테(트리에스테)나 이스트라의 해안 도시를 연결했다.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 외에도, 켈트인, 일리리아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유대인, 시리아인이 살면서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 유리 세공, 포도주 (푸키눔), 호박, 금속 (노리쿰 산) 등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특히 유대인 장인이 만드는 유리 공예품은 이 도시의 특산품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토착 태양신 베레누스를 대체한 로마 신앙이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유대인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유대교의 계율을 실천했지만, 유대인 중에서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들도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병사들 중에는 미트라교를 숭배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방문했으며, 티베리우스의 아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2년~기원전 10년의 판노니아 전쟁 중에 이 도시를 방문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티베리우스의 아들이 이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요절했다.
167년의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아퀼레이아는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아퀼레이아의 방벽은 오랜 평화 기간 동안 약화되어 있었다. 16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퀼레이아를 제국 북동부 제일의 요새 도시로 수축하고, 야만족의 위협에 대비했다. 도시는 최전성기를 맞아 인구는 10만 명에 달했다. 238년, 최초의 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대해 원로원이 반기를 들었을 때, 아퀼레이아는 원로원 편에 서서 싸웠다. 방비를 서둘러 굳힌 아퀼레이아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암살될 때까지 몇 달 동안 공격을 견뎌내며 그 견고함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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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년 - 305년) 치세에 아퀼레이아에는 궁전이 건설되었고, 이후 황제는 종종 머물렀다. 아퀼레이아가 조폐소를 가지고 독자적인 통화를 만들게 된 것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재위: 306년 - 337년)도 이 도시에 오래 머물렀고, 그 치세의 중요한 사건 중 일부는 이 도시에서 일어났다. 또한, 아퀼레이아는 해군 기지가 되었고, 베네치아 에토 히스트리아 주의 지사의 치소였다. 4세기 말, 아우소니우스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도시로 아퀼레이아를 꼽으며, 로마, 메디올라눔(밀라노), 카푸아 다음으로 언급했다.
중요한 도시인 아퀼레이아는 종종 쟁탈전의 무대가 되었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발생한 세 아들들의 다툼 속에서, 아퀼레이아를 빼앗으려 침공한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는 삼남 콘스탄스 1세에게 패배하여, 이 도시의 성벽 아래에서 살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되어 기독교가 공인된 후, 주교 테오도로는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다. 아퀼레이아 교회는 동방 지역(도나우강, 헝가리, 이스트라, 발칸 방면)의 포교에 있어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퀼레이아의 주교는 수도 대주교 (metropolitan archbishop)의 지위에 놓였다. 381년에 첫 회의가 열린 이후, 이 도시는 수세기 동안 공의회의 무대가 되었다.
3.2. 중세
401년과 408년 두 차례에 걸쳐 아퀼레이아는 서고트족의 알라릭 1세에 의해 포위되었고, 일부 주민들은 석호(라군)로 피난했다. 452년에는 훈족의 아틸라에 의해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퀼레이아 주민들은 인근 작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석호로 피난하여 베네치아와 그라도 도시의 기초를 세웠다.
아틸라의 파괴 이후 아퀼레이아는 규모가 작아졌지만 재건되었다. 553년 아퀼레이아의 대주교는 총대주교(Patriarch)가 되었다. 그러나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도시는 다시 파괴되었다.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 파울리누스 1세(Paulinus I of Aquileia라틴어)는 그라도로 피난하여 비잔틴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606년, 그라도에 체류하던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는 로마와 화해했다. 그러나 이를 불복하는 사람들은 아퀼레이아에서 새롭게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이렇게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자리는 본토의 아퀼레이아를 거점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보호를 받는 자와, 그라도를 거점으로 라벤나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보호를 받는 자(Patriarcato di Grado이탈리아어)의 두 개로 분열되었다.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분열은 699년까지 이어졌지만, 총대주교의 자리가 코르몬스나 치비달레로 이전된 후에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랑고바르드 왕국 아래 아퀼레이아와 주변 지역을 통치했던 것은 치비달레를 거점으로 하는 프리울리 공작이었다. 774년,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자, 프랑크족의 에리크(Eric of Friuli독일어)를 프리울리 공작에 봉했다. 787년, 카롤루스 대제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파울리누스 2세(Paulinus II of Aquileia라틴어)를 궁정의 문법 박사로 삼았다. 파울리누스는 주로 치비달레에서 살았다. 후계자 마켄티우스는 아퀼레이아 재건을 구상했지만, 이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마켄티우스가 총대주교였던 시기, 로마 교황은 만토바의 시노드에서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가 그라도의 총대주교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퀼레이아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퀼레이아의 폐허는 건축 자재로 끊임없이 파괴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10세기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와 함께, 주민들은 마자르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11세기까지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가 가진 힘은 커져 프리울리와 아퀼레이아의 세속적인 통치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총대주교에게 이 지역을 주어 봉건 영주로 삼았다. 하지만, 총대주교가 가진 세속 권력에 관해서는 현지의 귀족들로부터 끊임없이 비판받고 공격을 받았다. 11세기 전반의 총대주교 포포(Poppo, Patriarch of Aquileia독일어)는 아퀼레이아의 성당을 재건한 인물이나, 1027년과 1044년에 그라도를 공격, 파괴했다. 로마 교황은 그라도의 총대주교의 존엄성을 재확인했지만, 그라도 마을이 완전히 부흥하는 일은 없었다. 그라도의 총대주교좌는 1450년 베네치아로 공식 이전되었다.
총대주교좌는 1238년 우디네로 옮겨졌다. 14세기, 총대주교령은 최대가 되어, 그 영역은 피아베 강 유역에서 줄리앙 알프스 산맥, 이스트리아 북부에까지 이르렀다.
3.3. 베네치아 공화국 시대와 그 이후
1420년, 베네치아가 우디네를 병합하면서 총대주교좌는 아퀼레이아로 돌아왔다. 1445년, 베네치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총대주교 루도비코 트레비산Lodovico Trevisan영어은 베네치아 정부로부터 연 5000두카트의 봉급을 받는 조건으로,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세속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대주교 자리에는 베네치아인만이 임명되었다.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령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프리울리의 파트리아"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우디네에 주재하는 General Proveditor 또는 "Luogotenente"에 의해 통치되었다.
1751년, 총대주교좌는 정식으로 해체되었으며, 대신 우디네와 고리치아에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4. 주요 유적 및 관광지
오늘날 아퀼레이아는 로마가 식민지로 처음 건설했을 때보다 작은 도시이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포위 공격, 지진, 홍수, 그리고 고대 건물에서 재료를 약탈하는 행위 때문에 로마 시대 건물은 지상에 남아 있지 않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퀼레이아 유적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가장 큰 로마 도시로 여겨진다. 발굴 조사를 통해 거리, 도시 성벽의 북서쪽 각도, 강 항구, 목욕탕, 원형극장, 원형 경기장, 묘지, '비아 사크라', 포럼, 시장 터 등 로마 도시 배치의 일부가 밝혀졌다.
아퀼레이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는 2,000개가 넘는 비문, 조각상, 모자이크, 현지에서 생산된 유리 제품, 화폐 컬렉션 등 고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모나스테로 지구에는 5세기 기독교 바실리카가 있었으며, 이후 베네딕토 수도원이 되었다가 현재는 고대 기독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24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인 6세기에 확장된 또 다른 비잔틴 양식의 바실리카가 이 부지에서 발견되었다.
* 파가니 교회(Chiesa dei Pagani)
* 초기 기독교 박물관(Museo Paleocristiano)
*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 아퀼레이아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di Aquileia)
4.1. 대성당
아퀼레이아 대성당은 대주교 포포가 1031년에 이전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운 평지붕 바실리카이며, 마르쿠아르트 폰 란데크(1365-1381) 대주교가 고딕 건축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4.2. 고대 로마 유적
오늘날 아퀼레이아는 로마가 식민지로 처음 건설했을 때보다 작은 도시이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포위 공격, 지진, 홍수, 그리고 고대 건물에서 재료를 약탈하는 행위 때문에 로마 시대 건물은 지상에 남아 있지 않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퀼레이아 유적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가장 큰 로마 도시로 여겨진다. 발굴 조사를 통해 거리, 도시 성벽의 북서쪽 각도, 강 항구, 목욕탕, 원형극장, 원형 경기장, 묘지, '비아 사크라', 포럼, 시장 터 등 로마 도시 배치의 일부가 밝혀졌다. 아퀼레이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는 2,000개가 넘는 비문, 조각상, 모자이크, 현지에서 생산된 유리 제품, 화폐 컬렉션 등 고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4.3. 기타
모나스테로 지구에는 5세기 기독교 바실리카가 있었으며, 이후 베네딕토 수도원이 되었다가 현재는 고대 기독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24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인 6세기에 확장된 또 다른 비잔틴 양식의 바실리카가 이 부지에서 발견되었다.
* 파가니 교회(Chiesa dei Pagani)
* 초기 기독교 박물관(Museo Paleocristiano)
*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 아퀼레이아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di Aquileia)
* 바실리카(La Basilica, 103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