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1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교황 율리오 1세는 로마 출신으로, 교황 마르코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며 활동했다. 율리오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사르디카 공의회를 통해 로마 주교의 재심 권한을 진전시켰다. 율리오 1세가 12월 25일을 예수의 공식 탄생일로 선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위조된 편지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352년 사망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52년 사망 - 요익중
요익중은 오호십육국시대 강족 수장으로, 유랑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고 전조와 후조에 복속하며 활약하다가 후조 말기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동진에 귀순했으나 곧 병사했으며, 그의 삶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강족을 이끌며 생존을 모색했던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후대 후진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 - 352년 사망 - 염민
염민은 오호십육국시대 염위의 초대 황제로, 후조의 석호에게 입양되어 석민으로 개명했으나 정권을 장악 후 석씨 일족을 몰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한족 중심주의 정책과 이민족 학살을 자행하다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하는 등 논쟁적인 행적을 남겼다. - 4세기 교황 - 교황 다마소 1세
다마소 1세는 366년부터 384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재임하며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교회를 수호하고 불가타 성경 번역을 지원했으며, 교황의 권위를 강화했다. - 4세기 교황 - 교황 리베리오
교황 리베리오는 4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아리우스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유배를 당하고 논란에 휩싸였지만,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 율리우스 씨족 - 율리우스 네포스
율리우스 네포스는 474년부터 475년까지 서로마 제국 황제였으며, 오레스테스의 반란으로 달마티아로 망명한 후 480년 암살당할 때까지 황제 지위를 유지했다. - 율리우스 씨족 - 율리우스 파울루스
율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 제국의 법학자로, 방대한 법률 저술을 통해 로마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활동하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일부 저술의 위작 논란과 초기 생애에 대한 정보 부족이 있다.
교황 율리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율리오 1세 |
존칭 접두사 | 교황 성인 |
직함 | 로마의 주교 |
![]() | |
다른 이름 | 율리오 |
출생일 | 280년 |
출생지 | 로마, 로마 제국 |
사망일 | 352년 4월 12일 |
사망지 | 로마, 로마 제국 |
재임 시작 | 337년 2월 6일 |
재임 종료 | 352년 4월 12일 |
선임자 | 마르코 |
후임자 | 리베리오 |
기념일 | 4월 12일 |
공경 |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
2. 교황 선출
로마 출신으로, 교황 마르코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로마 교황직이 4개월 동안 공석이었던 후에 선출되었다.
율리오 1세는 아리우스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41년 안티오크 시노드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파면이 갱신된 후, 아리우스파는 율리오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의 근거를 설명하려 했다. 율리오는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며 양측에 시노드 개최를 제안했으나, 아리우스파 동방 주교들은 이를 거부했다.[1][2]
3. 아리우스파 논쟁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와서 342년 율리오가 주재한 시노드에서 정규 주교로 인정받았다. 율리오는 동방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먼저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1]
사르디카 공의회는 율리오의 영향으로 개최되었으나, 동방 주교들은 필리포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율리오와 아타나시우스 등을 파면했다. 서방 주교들은 로마 시노드의 결정을 확정하고 교회 규율 관련 법령을 발표했다. 사르디카 공의회는 율리오가 주장한 재심의 권리 관련 법령을 통해 로마 주교의 주장을 진전시켰다.[3] 율리오는 여러 바실리카와 교회를 건설했다.
3. 1. 아타나시우스 지지
율리오 1세는 주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수행한 역할로 알려져 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의 추종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후, 341년 안티오크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파면을 갱신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황제인 콘스탄스와 율리오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이 진행한 근거를 설명하기로 결정했다. 율리오는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는 의견을 표명한 후, 양측을 모두 초대하여 자신이 주재할 시노드에 사건을 제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아리우스파 동방 주교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1][2]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번째로 추방된 후,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왔고, 342년 율리오가 주재한 시노드에서 정규 주교로 인정받았다. 율리오는 동방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이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 율리오는 서한에서 "설령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약간의 잘못이 있더라도,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먼저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면서 "이것이 관습이라는 사실을, 즉 우리가 먼저 편지를 받아야 하고, 여기에서 정의로운 것이 정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1]
나중에 일리리아에서 열린 사르디카 공의회는 율리오의 영향으로 개최되었으며, 단 76명의 동방 주교만이 참석했다. 이들은 즉시 플로브디프로 물러나 필리포폴리스 공의회에서 율리오를 아타나시우스 등과 함께 파면했다. 남아있던 300명의 서방 주교들은 로마 시노드의 이전 결정을 확정하고 교회 규율에 관한 여러 법령을 발표했다. 첫 번째 법규는 주교가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전임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자주 이루어질 경우 탐욕과 야망을 조장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
사르디카 공의회는 율리오가 주장한 재심의 권리와 관련된 3, 4, 5번째 법령을 통해 로마 주교의 주장을 뚜렷하게 진전시켰다.
3. 2. 로마 시노드 (342년)
교황 율리오 1세는 주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수행한 역할로 알려져 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의 추종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후, 341년 안티오크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파면을 갱신했다. 그들은 서방의 황제인 콘스탄스와 율리오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이 진행한 근거를 설명하기로 결정했다. 율리오는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는 의견을 표명한 후, 양측을 모두 초대하여 자신이 주재할 시노드에 사건을 제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아리우스파 동방 주교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1][2]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번째로 추방된 후,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왔고, 342년 율리오가 주재한 시노드에서 정규 주교로 인정받았다. 율리오는 동방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이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 설령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약간의 잘못이 있더라도,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먼저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는 내용이다. 율리오는 "이것이 관습이라는 사실을, 즉 우리가 먼저 편지를 받아야 하고, 여기에서 정의로운 것이 정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율리오가 안티오크에 보낸 서신, c. xxii)라고 썼다.[1]
3. 3. 사르디카 공의회 (343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교황 율리오 1세가 수행한 역할로 인하여 사르디카 공의회는 율리오 1세의 영향으로 개최되었다. 동방 주교 76명만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즉시 플로브디프로 물러나 필리포폴리스 공의회에서 율리오 1세를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등과 함께 파면했다. 남아있던 300명의 서방 주교들은 로마 시노드의 이전 결정을 확정하고 교회 규율에 관한 여러 법령을 발표했다. 첫 번째 법규는 주교가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전임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자주 이루어질 경우 탐욕과 야망을 조장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
사르디카 공의회는 율리오 1세가 주장한 재심의 권리와 관련된 3, 4, 5번째 법령을 통해 로마 주교의 주장을 뚜렷하게 진전시켰다.
4. 크리스마스
350년경 율리오 1세가 12월 25일을 예수의 공식적인 탄생일로 선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9세기 자료에만 인용된 위조된 편지에 근거한 것이므로 잘못된 주장이다.[4][5][6]
4. 1. 크리스마스 날짜 선정 논란
율리오 1세가 350년경 12월 25일을 예수의 공식적인 탄생일로 선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9세기 자료에만 인용된 위조된 편지에 근거한다.[4][5][6] 당시 이 날짜는 예수의 탄생일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기원후 200년경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이 날짜를 사용했다.[7]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총대주교가 로마에 보관된 역사 기록에서 예수의 탄생일이 언제인지 설명을 요청한 후, 율리오 교황이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선포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8] 또한 누가복음을 읽고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고 믿었다.[9][10]예수의 실제 탄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11][12] 12월 25일은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끝난 지 이틀 후라는 점이 지적되었다.[11][13] 일부에서는 율리오가 사투르날리아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만들려고 이 날짜를 선택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11] 또 다른 이유는 274년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의 생일로 선포했고, 율리오 1세는 동일한 날 계속 축하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더 많은 개종자를 기독교로 유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12]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14] 그는 예수가 잉태된 날을 기념하여 죽었다는 생각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예수는 과월절에 죽었고, 3세기에 과월절은 3월 25일에 기념되었기 때문에,[12] 그는 예수의 생일이 9개월 후인 12월 25일에 왔음에 틀림없다고 추정했을 수 있다.[12]
5. 사망과 시성
율리오 1세는 352년 4월 12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리베리오가 즉위했다. 율리오는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4월 12일이다.[1]
참조
[1]
서적
Pope St. Julius 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7-09-28
[2]
서적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Socrates, Surnamed Scholasticus, or The Advocate. Comprising a History of the Church, in Seven Books, from the Accession of Constantine, A.D. 305 to the 38th Year of Theodosius II, Including a Period of 140 Years
Henry G. Bohn
2023-06-24
[3]
웹사이트
Saint Julius, Pope and Confessor
https://catholicsain[...]
2013-04-15
[4]
서적
The Christmas encyclopedia
McFarland & Company, Inc., Publishers
2013
[5]
웹사이트
Christmas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08
[6]
서적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u bibliotheca universalis, integra, uniformis, commoda, oeconomica, omnium SS. Patrum, doctorum scriptorumque ecclesiasticorum, sive latinorum, qui ab aevo apostolico ad tempora Innocentii 3. (anno 1216) pro Latinis et Concilii Florentini (ann. 1439) pro Graecis floruerunt: Recusio chronologica ...: Opera quà exstant universa Constantini Magni, Victorini necnon et Nazzrii, anonymi, S. Silvestri papà , S. Marci papà , S. Julii papà , Osii Cordubensis, Candidi Ariani, Liberii papà , et Potamii
https://books.google[...]
Vrayet
1844
[7]
웹사이트
Hippolytus and December 25th as the date of Jesus' birth
http://www.chronicon[...]
2021-03-03
[8]
웹사이트
Dubious claims: Pope Julius I decided that Jesus was born on 25 December?
https://www.roger-pe[...]
2021-03-03
[9]
웹사이트
Infancy Gospel of James
http://www.earlychri[...]
2021-03-03
[10]
웹사이트
Yes, Christ Was Really Born on December 25: Here's a Defense of the Traditional Date for Christmas
https://taylormarsha[...]
2021-03-03
[11]
서적
A Christmas Compendium
https://books.google[...]
Continuum
2005
[12]
서적
The Book of Christmas: Everything We Once Knew and Loved about Christmastime
https://books.google[...]
Ebury Press
2012
[13]
웹사이트
Why is Christmas celebrated on December 25?
https://www.italyher[...]
2018-11-18
[14]
학술지
Temples and Priests of Sol in the City of Rome
http://dx.doi.org/10[...]
2010
[15]
문서
율리오가 안티오키아 교회에 보낸 서간
[16]
뉴스
크리스마스 그것이 알고싶다
http://www.pauline.o[...]
평화신문
2001-12-23
[17]
뉴스
[금주의 역사/12월 25일] 예수의 탄생
http://weekly.hankoo[...]
한국일보
2012-12-2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