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우르바노 3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교황 우르바노 3세는 1185년부터 1187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추기경과 밀라노 대교구장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영토 분쟁, 하인리히 6세의 이탈리아 왕위 주장 문제로 대립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듣고 홧병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87년 사망 - 르노 드 샤티용
르노 드 샤티용은 12세기 프랑스 기사로 안티오키아 공작과 울트르조르당 영주를 지냈으며, 잦은 분쟁과 약탈, 특히 살라딘과의 충돌로 예루살렘 왕국 멸망에 영향을 미치고 하틴 전투에서 처형된 인물로, 당대에는 전사로, 현대에는 약탈자로 평가받는다. - 1187년 사망 - 남송 고종
고종은 금나라의 침략으로 북송이 멸망한 후 남송을 건국하고 군사력 강화와 문화 발전에 힘썼으며, 금나라와의 화평을 추구하다가 양위한 남송의 초대 황제이다. - 12세기 로마 가톨릭 대주교 - 토머스 베켓
12세기 잉글랜드의 성직자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베켓은 헨리 2세의 총애를 받아 대법관까지 지냈으나, 대주교 임명 후 교회의 권리 옹호로 왕과 대립, 암살당해 순교자로 시성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삶과 죽음은 후대 예술과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12세기 로마 가톨릭 대주교 -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는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믿는다'는 신념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이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르 벡 수도원 원장과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하며 주요 저서를 남겼고 잉글랜드 국왕과의 서임권 투쟁에서 교회의 독립을 옹호했다. - 밀라노 대교구장 -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하고 교회 개혁을 추진한 교황으로, 교황청 개혁과 전례 개혁을 단행하고 교회 일치 운동에 기여했으나, 인공 피임 금지 회칙과 교회 개혁 논란으로 복잡한 시기를 겪었으며 시복 및 시성되었다. - 밀라노 대교구장 - 교황 비오 11세
교황 비오 11세는 1922년부터 1939년까지 재임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라테라노 조약 체결을 통해 바티칸 시국 독립을 이끌고 나치 독일을 비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교황 우르바노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교황 |
이름 | 우르바노 3세 |
로마자 표기 | Urbano Samse |
직책 | 로마 주교 |
![]() | |
출생 이름 | 움베르토 크리벨리 |
임기 시작 | 1185년 11월 25일 |
임기 종료 | 1187년 10월 20일 |
이전 교황 | 루치오 3세 |
다음 교황 | 그레고리오 8세 |
서임 | 1182년 |
추기경 임명 | 1173년 9월 |
추기경 임명자 | 루치오 3세 |
출생일 | 1120년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쿠조노 |
사망일 | 1187년 10월 20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페라라 |
이전 직책 | 베르첼리 주교 (1182–85)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추기경 사제 (1182–85) 밀라노 대주교 (1185) |
다른 이름 | 우르바노 |
2. 생애 초기와 교황 선출
우베르토 크리벨리는 쿠조노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공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3] 교황 루치오 3세에 의해 밀라노 대교구장과 추기경에 서임되었다.[7] 1185년 11월 25일, 루치오 3세가 사망하자마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4] 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5] 그는 1162년 프리드리히 1세가 밀라노를 파괴했을 때 친족이 살해당한 경험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2. 1. 가문과 초기 경력
쿠조노에서 구알라 크리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피에트로, 도메니코, 파스토레, 구알라가 있었다. 훗날 교황 첼레스티노 4세의 외삼촌이 된다.[7] 볼로냐에서 공부했다.[7]117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3] 1182년 산 로렌초 인 루치나의 추기경 사제가 되었고, 1185년 교황 루치오 3세에 의해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4]
2. 2. 교황 선출
우르바노 3세(본명: 우베르토 크리벨리)는 쿠조노에서 구알라 크리벨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피에트로, 도메니코, 파스토레, 구알라 등 네 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는 훗날 교황 첼레스티노 4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7] 볼로냐에서 공부했다.교황 루치오 3세는 우르바노 3세를 밀라노 대교구장과 추기경에 서임했다. 이후 우르바노 3세는 1185년 11월 25일 루치오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7] 이러한 급박한 선출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3. 교황 재위 기간
우르바노 3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밀라노 대주교직을 계속 유지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의 분쟁을 강력하게 이어받았다. 여기에는 토스카나의 마틸데 백작 부인의 영토 처분에 대한 오랜 논쟁도 포함되었다.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홧병으로 선종했다.[8]
3. 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갈등
우르바노 3세는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토스카나의 마틸데 백작 부인의 영지 소유권 문제 등을 놓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격렬하게 대립했다.[8] 1162년 밀라노 약탈 당시 황제가 교황의 친척 여러 명을 추방하거나 신체 훼손을 가했기 때문에, 이러한 분쟁은 개인적인 적대감으로 더욱 악화되었다.[5]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우르바노 3세는 밀라노 대교구장직을 계속 유지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 콘스탄체와 혼인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이탈리아 왕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8] 이 결혼으로 교황청은 황제와의 다툼에서 오랫동안 의존해 왔던 노르만족의 지원을 잃게 되었다.[5]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교황에 반항적인 로마 원로원과 손을 잡았고, 프리드리히 1세는 알프스 산맥의 통행을 차단하여 베로나에 있는 교황과 독일의 친교황파 인사들 사이의 모든 연락을 막아버렸다.[8] 우르바노 3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기로 결심했지만, 베로나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에서 황제에 대한 파문 선포를 반대하여 페라라로 철수해야 했다.[8]
3. 2. 하인리히 6세의 결혼과 시칠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 콘스탄체와 혼인하였는데, 우르바노 3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밀라노 대교구장직을 계속 유지하며 하인리히 6세의 이탈리아 왕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8] 이는 교황청이 황제와의 다툼에서 오랫동안 의존해 왔던 노르만족의 지원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5]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교황에 반항적인 로마 원로원과 손을 잡았고, 프리드리히 1세는 알프스 산맥의 통행을 차단하여 베로나에 있는 교황과 독일의 친교황파 인사들 사이의 모든 연락을 막아버렸다.[8]
3. 3. 파문 위협과 베로나에서의 고립
우르바노 3세는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토스카나의 마틸데 백작 부인의 영지 소유권 문제 등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밀라노 대교구장직을 계속 유지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 콘스탄체와 결혼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의 이탈리아 왕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5]하인리히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교황에 반항적인 로마 원로원과 손을 잡았고, 프리드리히 1세는 알프스 산맥의 통행을 차단하여 베로나에 있는 교황과 독일의 친교황파 인사들 사이의 모든 연락을 막았다. 우르바노 3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려 했지만, 베로나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에서 황제에 대한 파문 선포를 반대하여 페라라로 이동했다.[5]
3. 4.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평화 중재
우르바노 3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1187년 6월 23일, 그의 특사들은 파문 위협으로 샤토루 인근에서 충돌 직전이었던 양국 왕들의 군대 간 야전 전투를 막고 2년간의 휴전을 성사시켰다.[5]4. 죽음
우르바노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려 했으나, 페라라에서 사망했다.[5] 연대기 작가 에르눌과 피터버러의 베네딕트에 따르면, 우르바노 3세는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티레의 요시우스 대주교에게 전해 듣고 충격과 슬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5] 그러나 뉴버그의 윌리엄은 하틴 전투(1187년 7월 3-4일) 소식은 그레고리오 8세가 선출된 이후에야 교황청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르바노 3세가 10월 2일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5]
참조
[1]
서적
Saints &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Yale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Genealogie-Mittelalter
http://www.genealogi[...]
[3]
웹사이트
The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 Biographical Dictionary - Consistory of September 1173
https://cardinals.fi[...]
2022-01-15
[4]
서적
Vicars of Christ: A History of the Popes
Citadel Press
[5]
문서
Pope Urban III
[6]
서적
Saints &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Yale University Press
[7]
서적
Vicars of Christ: A History of the Popes
Citadel Press
[8]
논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