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첼레스티노 4세
1. 개요
교황 첼레스티노 4세는 1241년 10월 25일에 선출되어 17일 동안 교황으로 재위한 인물이다. 밀라노 출신으로, 1227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238년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가 되었다. 1241년 교황 선거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갈등으로 분열된 로마 교황청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치러졌으며, 첼레스티노 4세는 선출 후 건강 악화로 즉위 전에 사망했다. 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를 파문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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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책 | 로마 교황 |
|---|---|
| 재임 시작 | 1241년 10월 25일 |
| 재임 종료 | 1241년 11월 10일 |
| 이전 교황 | 그레고리오 9세 |
| 다음 교황 | 인노첸시오 4세 |
| 출생 이름 | 고프레도 다 카스틸리오네 |
| 출생 | 1180년/1187년경 |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밀라노 |
| 사망 | 1241년 11월 10일 |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 다른 이름 | 첼레스티노 |
| 소속 교회 | 가톨릭 교회 |
|---|---|
| 서품 | 알 수 없음 |
| 서품자 | 알 수 없음 |
| 주교 서임 | 알 수 없음 |
| 주교 서임자 | 알 수 없음 |
| 추기경 서임 | 1227년 9월 18일 |
| 추기경 서임자 | 그레고리오 9세 |
| 직위 | 알 수 없음 |
| 이전 직책 | 산 마르코 성당 추기경 (1227년–1239년) 사비나 주교 추기경 (1239년–12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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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사망 -
이규보
이규보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 시인으로,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으며,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동명왕편』 등의 대표작을 통해 고려 시대 문학 발전에 기여했고, 최씨 무인 정권 시대에 정치 활동을 했으며, '신의론'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시적 세계를 구축했다. -
1241년 사망 -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신고킨슈』 편찬에 기여하고 고토바 상황과의 갈등을 겪었으나 『신정선와가집』 편찬, 권중납언 승진, 『오구라 백인일수』 편찬 등 문학 활동에 전념한 와카 시인이자 가론서 및 주석서 저술가, 서예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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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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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
성좌의 외교관 -
교황 베네딕토 15세
자코모 델라 키에사라는 본명을 가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평화 중재 노력을 펼쳤으나 실패하였고, 전후 인도주의 활동, 외교 관계 수립, 교회법 개정, 선교 활동 강조 등 교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
성좌의 외교관 -
교황 우르바노 2세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88년부터 1099년까지 재위하며 제1차 십자군 파병을 호소하여 십자군 운동을 촉발하고, 개혁을 추진하며 교황권을 강화하다가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직전에 사망한 인물이다.
2. 생애
첼레스티노 4세는 밀라노 출신으로, 본명은 고프레도 또는 고드프리이다. 교황 우르바노 3세의 조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1227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238년에는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가 되었다. 1241년 교황 선거에서 10명의 추기경 중 7명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즉위 17일 만에 노환과 피로로 사망하였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를 파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2.1. 초기 생애와 추기경 시절
밀라노에서 태어난 고프레도 또는 고드프리는 교황 우르바노 3세의 누이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근거가 없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1219년 무렵부터 1223-27년까지 밀라노 교회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27년 9월 18일에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교구와 산 마르코의 성직록을 부여했다.
1228-29년에는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 지역의 도시와 코뮌들은 일반적으로 호엔슈타우펜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충성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들을 교황 편으로 돌아서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238년에는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가 되었다.
2.2. 교황 선출 과정 (1241년 콘클라베)
1241년 교황 선거는 첼레스티노 4세를 교황 자리에 올렸지만, 이 선거는 그가 죽음을 재촉하는 혹독한 조건 속에서 치러졌다. 로마 교황청은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인 프리드리히 2세를 굴복시키기 위한 격렬한 투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한 추기경 그룹은 그레고리오 개혁을 지지하며 프리드리히 2세를 교황의 봉신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티볼리에서 바다에서 포획한 두 명의 추기경을 억류하고 있었고, 로마에서는 추기경 조반니 콜론나가 그의 동맹이었다. 이는 교황청이 콜론나 가문의 숙적인 원로원 의원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는 셉티조디움의 낡은 궁전에 콘클라베를 소집했는데,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들어왔고, 오르시니의 경비병들이 지붕 타일에 소변을 보는 등 환경이 열악했다. 추기경 중 한 명인 영국인 로버트 오브 소머코트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시니발도 데 피에스키를 포함한 한 추기경 그룹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측근으로, 프리드리히 2세에게 강경 노선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후보를 지지했다. 다른 그룹은 호엔슈타우펜의 동맹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전쟁의 종식을 원하며 온건한 중도 노선을 옹호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억류하고 있는 추기경들이 로마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면, 성 니콜라스의 오토라는 온건한 타협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하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했다.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가 지지한 후보인 로마노 다 포르토는 파리 대학교의 학자들을 박해한 인물로, 부적절한 인물로 여겨졌다.
결국 1241년 10월 25일,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는 10명의 추기경 중 7명의 찬성으로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다수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첼레스티노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불과 17일 동안 교황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유일한 중요한 행동으로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를 파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오르시니는 실제로 1242년에도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고, 인노첸시오 4세(피에스키)가 선출되었을 때도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그의 아들(후일 니콜라오 3세)은 1244년에 추기경이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첼레스티노 4세는 1241년 11월 10일, 피로와 노령으로 인해 즉위 전에 사망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3. 짧은 재위와 죽음
1241년 교황 선거는 첼레스티노 4세를 교황 자리에 올렸지만, 이 선거는 그가 죽음을 재촉하는 혹독한 조건 속에서 치러졌다. 로마 교황청은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인 프리드리히 2세를 굴복시키기 위한 격렬한 투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측근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강경 노선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후보를 지지한 추기경 그룹과, 호엔슈타우펜의 동맹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온건한 중도 노선을 옹호하는 추기경 그룹 간의 대립이 있었다.
콘클라베는 콜론나 가문의 숙적인 원로원 의원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의 손에 있었는데, 그는 셉티조디움의 낡은 궁전에서 경비병들의 통제 아래 교황 회의를 감금했다. 방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들어왔고, 오르시니의 경비병들이 지붕 타일에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추기경 중 한 명인 영국인 로버트 오브 소머코트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1241년 10월 25일,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는 10명의 추기경 중 7명의 찬성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첼레스티노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불과 17일 동안 교황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유일한 중요한 행동으로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를 파문하는 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첼레스티노 4세는 1241년 11월 10일, 피로와 노령으로 인해 즉위 전에 사망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