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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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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니콜라오 3세는 1277년부터 1280년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이다. 그는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추기경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재위 기간 동안 교황령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족벌주의를 통해 친척들을 고위 성직에 임명했다. 그는 또한 프란치스코회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으며, 바티칸 궁전 등을 보수했다. 니콜라오 3세는 128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단테의 '신곡'에서 성직 매매의 죄를 지은 자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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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책로마주교
이름니콜라오 3세
본명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라틴어 이름Nicolaus III
그리스도에게 교회를 바치는 니콜라오 3세를 묘사한 [[산타 산크토룸 (라테라노, 로마)]]의 13세기 프레스코화
13세기 프레스코화, 그리스도에게 교회를 바치는 니콜라오 3세 (산타 산크토룸 (라테라노, 로마))
이전 직책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의 추기경 부제 (1244–1277)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사제 (1276–1277)
임기 시작1277년 11월 25일
임기 종료1280년 8월 22일
선임자요한 21세
후임자마르티노 4세
출생일1225년경
출생지로마, 교황령
사망일1280년 8월 22일
사망지비테르보, 교황령
문장C o a Niccolo III.svg
서임 정보
교단가톨릭 교회
추기경 서임인노첸시오 4세
추기경 임명일1244년 5월 28일
주교 서임 1트루고트 토르스텐센
주교 서임일 11277년 12월 27일
주교 서임 2빌럼 판 무르베커, O.P.
주교 서임일 21278년 4월 9일
주교 서임 3존 펙햄, O.F.M.
주교 서임일 31279년 2월 19일
주교 서임 4하인리히 플레밍
주교 서임일 41279년 3월 21일
주교 서임 5윌리엄 위크웨인
주교 서임일 51279년 9월 17일
주교 서임 6니콜라스 쿠삭, O.F.M.
주교 서임일 61280년 5월 15일
주교 서임 7윌리엄 프레이저
주교 서임일 71280년 5월 19일
주교 서임 8페르난도 코바루비아스, O.F.M.
주교 서임일 81280년 5월 21일 ~ 1280년 8월 22일 사이

2. 개인 약력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로마 태생으로[51][2] 이탈리아의 유력한 귀족 집안인 오르시니 가문의 일원이다. 로마 귀족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3]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페르나 가에타니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235년부터 비코바로, 리첸차, 칸탈루포인사비나, 로카조비네, 가레라, 포르넬로, 카스텔산탄젤로디티볼리, 네투노, 치비텔라달리아노, 보마르초, 산폴로, 네롤라의 카스텔폴리아의 영주였으며, 1241년부터 1243년까지는 무나노와 산탄젤로로마노, 몬테로톤도의 영주와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다.

오르시니 가문은 이미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와 교황 바오로 1세(757-767), 교황 첼레스티노 3세(1191-1198) 등의 교황을 배출하였다.[52][4]

그의 동생 지오르다노는 1278년 3월 12일 형인 교황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산에우스타키오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또 다른 동생 젠틀레는 무나노와 펜나, 네투노, 피티리아노의 영주가 되었다. 그리고 몬테조르다노의 마테오 로소라는 또 다른 동생은 1279년 (아마도)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1281년 토디의 전투 지휘관과 시에나의 행정관(포데스타)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섯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그의 조카와 일부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없다.[53][5] 1244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기 전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법률 전문가나 신학자는 아니였으며 1277년 교황이 되기 전까지 사제가 되지 않았다. 요한 21세는 학자였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추기경에 불과했지만, 대신 정무를 담당했다. 1277년 요한 21세가 사고사하고 콘클라베는 반년이나 걸렸지만, 실적을 인정받아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니콜라오 3세라고 칭했다.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견을 목표로, 추기경 시절부터 세속 군주와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로마의 왕루돌프 1세가 로마냐의 영유 포기를 타진했고, 니콜라오 3세는 이를 승낙하여 이탈리아 정책은 포기되었다. 1279년프란치스코회의 사목 활동 특전을 옹호하는 "엑지트 퀴 세미나토(Exiit qui seminat)"를 발표했지만, 이윤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대논쟁이 일어났다. 바티칸 궁전의 개수를 진행하는 한편 네포티즘도 행하여, 3명의 친척을 고위 성직자로 등용했다.

1280년, 비테르보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문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로마 태생으로[51] 이탈리아의 유력한 귀족 집안인 오르시니 가문의 일원이다.[2] 로마 귀족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3]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페르나 가에타니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235년부터 비코바로, 리첸차, 칸탈루포인사비나, 로카조비네, 가레라, 포르넬로, 카스텔산탄젤로디티볼리, 네투노, 치비텔라달리아노, 보마르초, 산폴로, 네롤라의 카스텔폴리아의 영주였으며, 1241년부터 1243년까지는 무나노와 산탄젤로로마노, 몬테로톤도의 영주와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다.

오르시니 가문은 이미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와 교황 바오로 1세(757-767), 교황 첼레스티노 3세(1191-1198) 등의 교황을 배출하였다.[52][4]

그의 동생 지오르다노는 1278년 3월 12일 형인 교황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산에우스타키오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또 다른 동생 젠틀레는 무나노와 펜나, 네투노, 피티리아노의 영주가 되었다. 그리고 몬테조르다노의 마테오 로소라는 또 다른 동생은 1279년 (아마도)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1281년 토디의 전투 지휘관과 시에나의 행정관(포데스타)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섯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그의 조카와 일부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없다.[53][5] 1244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기 전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2. 2. 초기 경력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로마 태생으로[51] 이탈리아의 유력한 귀족 집안인 오르시니 가문의 일원으로 로마 귀족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페르나 가에타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235년 이래 여러 지역의 영주였으며, 1241년부터 1243년까지는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다. 그의 동생 지오르다노는 1278년 3월 12일 형인 교황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산에우스타키오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또 다른 동생 젠틀레는 여러 지역의 영주가 되었다. 그리고 몬테조르다노의 마테오 로소라는 또 다른 동생은 1279년 (아마도)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1281년 여러 전투 지휘관과 행정관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섯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오르시니 가문은 이미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와 교황 바오로 1세(757-767), 교황 첼레스티노 3세(1191-1198) 등의 교황을 배출하였다.[52]

그는 그의 조카와 일부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없다.[53] 1244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기 전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3. 추기경 시절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1244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소집한 첫 추기경회의에서 12명의 추기경 중 한 명으로 서임되었으며,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54][6] 그는 요크의 의전참사회원 및 비(非)봉록 참사원이었다.[54][7] 그 해 여름, 교황 인노첸시오 4세 및 다른 네 명의 추기경과 함께 제노바로 피신했고,[55][9] 리옹에서[56][10] 제1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57][11] 1251년 5월,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사망한 후에야 오르시니 추기경을 비롯한 로마 교황청은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노바와 밀라노, 브레시아에서 여름을 보낸 후, 1251년 11월 페루자에 도착하여 1253년 4월까지 머물렀다.[58][12]

1254년 10월 중순,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왔고, 교황과 교황청은 1254년 4월 말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5월에는 아시시로 순례를 떠났고, 이후 아나니로 가서 6월부터 10월 둘째 주까지 머물렀다. 이들은 만프레디의 추격을 피해 이동해야 했으며, 12월 초 포지아 전투에서 교황군이 패배했다. 인노첸시오 4세나폴리에서 1254년 12월 7일 선종했고, 그의 후임자를 뽑기 위한 교황 선거가 나폴리에서 열렸다. 12월 11일 금요일에 시작된 선거에는 총 12명의 추기경 중 10명이 참여했으나, 과반수 득표를 얻은 후보는 없었다. 그러나 12월 12일 토요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조카이자 조정자로 명성이 높았던 리날도 데이 콘티 디 세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 명명되었고, 1254년 12월 20일 나폴리 대성당에서 즉위했다.[59][13] 오르시니 추기경은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 11년 반 동안 로마에서 불과 6개월밖에 보내지 못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교황청은 1255년 6월 첫째 주까지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나니로 돌아갔고,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로마로 귀환했다. 당시 로마는 1252년부터 카살레키오 백작 브란칼레오네 데글리 안달로 원로원 의원의 손에 넘어가 있었고, 기벨린들은 알렉산데르 4세를 반복적으로 난폭한 폭도들에게서 쫓아냈다.[60][14] 교황청은 1257년 5월 말까지 로마에 머물렀다가 비테르보에서 여름을 보냈고, 1258년 10월 말까지 머문 후 다시 아나니로 가서 1260년 11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 후 교황은 라테란에 1261년 5월 첫째 주까지 머물렀고, 이후 교황청은 다시 비테르보로 떠났다. 알렉산데르 4세는 1261년 5월 25일 비테르보에서 선종했다. 알렉산데르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추기경을 서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 열린 교황 선거에는 겨우 8명의 추기경만이 참석했다. 선거는 1261년 5월 25일부터 8월 29일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추기경들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1255년부터 성지에서 십자군과 함께 교황 특사로 활동했던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자크 판탈레옹을 선택했다. 그는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되었고, 1261년 9월 4일 비테르보에서 즉위했다.[61][15]

오르시니 추기경은 1262년 11월 2일 우르바노 4세에 의해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으며,[16] 최초의 알려진 대종교 재판관이었다.[17]

그는 1268~1271년 교황 선거에 참석했고, 비테르보 당국과 사람들의 추기경과 교황청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제기하는 서한에 서명한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1271년 9월 1일, 그는 교황 선출 후보자를 타협하기 위해 선정된 여섯 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고 이탈리아에도 없었으며 십자군을 위해 성지에 있던 리에주의 부제 테오발도 비스콘티를 교황으로 선출하는데 기여했다.[62][18] 1273년, 그는 교황청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 1275년, 그는 리옹을 떠나 로마로 돌아가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수행원 추기경이 아니었고, 교황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인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사망했을 때에도 자리에 없었다. 그는 1276년 1월 20일에 시작되어 다음 날 타랑테즈의 베드로가 교황 인노첸시오 5세로 선출되며 끝난 1276년 1월 교황 선거에 참석하지 않았다.[63][64][19][20] 인노첸시오 5세는 1276년 6월 22일 로마 라테란에서 선종했다.

1276년 7월 교황 선거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정한 규칙에 따라 7월 2일에 시작되었다.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를 포함한 13명의 추기경이 참석했다. 시칠리아의 샤를 1세 왕은 콘클라베 총독으로 활동했는데, 이 직책에서 그는 엄격했지만 프랑스 파벌에 편파적이었다고 한다. 7월 11일, 제노바의 오토보노 피에스키 추기경이 선출되어 교황 아드리아노 5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65][21] 그는 39일 후, 로마의 여름 더위를 피해 갔던 비테르보에서 사망했다.[66][22] 그의 유일한 행적은 콘클라베를 규제한 그레고리오 10세의 헌법 "우비 페리쿨룸"을 정지시킨 것이었다. 그는 추기경들의 조언에 따라 그레고리오 10세의 규정을 개선하고자 했다. 오르시니 추기경은 이 토론과 결정에 참석했다. 아드리아노 5세는 즉위 직후 시칠리아 왕 샤를 1세가 비테르보에 와서 충성 맹세를 하기를 원했고, 산 니콜라 인 카르체의 조반니 추기경(오르시니) 등을 파견하여 그의 뜻을 전했다. 샤를 1세는 7월 24일 로마에서 비테르보에 도착했으나, 아드리아노 5세가 8월 18일 사망하면서 샤를 왕과의 협상은 미완료로 남았다.[67][24]

1276년 9월 교황 선거는 아드리아노 5세가 사망한 비테르보에서 9월 초에 시작되었다. 8월 29일에 열렸어야 할 개회식은 비테르보 시민들의 폭력 사태로 며칠 동안 연기되었다. 그러나 소란이 진정되자 추기경들은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1276년 9월 8일, 수석 추기경 주교인 리스본의 베드로 율리아노가 첫 번째 투표에서 선출되었다. 그는 요한 21세로 불리기로 했고, 9월 20일 비테르보의 산 로렌초 대성당에서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에 의해 즉위했다.[68][25] 10월 18일,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68][26]

아드리아노 5세의 그레고리오 10세 규정 정지는 비판을 받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정지의 진실을 보증한 추기경들이 거짓말을 했다거나, 철회가 가톨릭교회 교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요한 21세는 1276년 9월 30일, 정지가 유효하다는 입장을 밝히며 즉각 반박했다.[70][28] 요한 21세의 이 철회 칙서 문제는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의 제안으로 공표되었다고 한다.[71][29] 조반니 가에타노 추기경이 샤를 1세 왕과 맺은 협상은 완료되었고, 샤를 1세는 1276년 10월 7일 요한 교황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72][30] 1277년 5월 중순, 교황이 비테르보 주교궁에 새로 지은 방에 있을 때 갑자기 지붕이 무너졌다. 교황은 잔해에 깔려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며칠 후인 1277년 5월 20일, 즉위 8개월 만에 사망했다.[31]

1277년 교황 선거가 비테르보에서 열렸고, 7명의 추기경이 참석했다.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은 여전히 교황 특사로 프랑스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 콘클라베는 쉽지 않았다. 선거인 3명은 앙주 파벌에 속했고, 3명은 반대했다. 콘클라베는 5개월 반 이상 진행되었다. 마침내 1277년 11월 25일 성녀 가타리나 축일에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이 선출되었다.[73][32] 그는 교황 니콜라오 3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새 교황은 즉시 로마로 출발했다.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12월 19일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 즉위했다. 그는 시칠리아의 샤를 1세의 후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선출은 어려움을 예고했다. 반대로 그는 샤를 1세가 교회 문제와 교황령 운영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74][33]

요한 21세는 학자였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추기경에 불과했지만, 대신 정무를 담당했다. 1277년 요한 21세가 사고사하고 콘클라베는 반년이나 걸렸지만, 실적을 인정받아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니콜라오 3세라고 칭했다.

3. 1. 인노첸시오 4세 시기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1244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어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6] 그는 요크의 사제이자 성직록 소유자였으며,[7] 소아송과 랑의 성직록 소유자이기도 했다.[8] 같은 해 여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함께 제노바로 피신한 다섯 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으며,[9] 리옹에서 열린[10] 제1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11]

오르시니 추기경과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사망한 후인 1251년 5월까지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제노바, 밀라노, 브레시아를 거쳐 1251년 11월 페루자에 도착하여 1253년 4월까지 머물렀다.[12] 1254년 4월 말까지 로마에 머물렀던 교황청은 5월에 아시시 순례를 떠났고, 아나니에서 6월부터 10월까지 머물렀다. 이후 만프레디의 추격을 피해 이동하던 중, 12월 초 포지아 전투에서 교황군이 패배했다. 인노첸시오 4세는 나폴리에서 1254년 12월 7일 선종했다.

인노첸시오 4세의 선종으로 나폴리에서 교황 선거가 열렸고, 12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조카인 리날도 데이 콘티 디 세니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 선출되었다.[13] 오르시니 추기경은 추기경 임기 11년 6개월 중 불과 6개월만 로마에 머물렀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교황청은 1255년 6월까지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나니로 이동했고,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왔다. 1252년부터 카살레키오 백작 브란칼레오네 데글리 안달로 원로원 의원이 로마를 장악하고, 기벨린과 교황청은 난폭한 폭도들에 의해 로마에 들어갔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했다.[14] 교황청은 1257년 5월 말까지 로마에 머물다가 비테르보에서 여름을 보냈고, 1258년 10월 말부터 1260년 11월 초까지 아나니에 머물렀다. 알렉산데르 4세는 1261년 5월 25일 비테르보에서 선종했다.

알렉산데르 4세의 선종 후 소집된 교황 선거는 1261년 5월 25일부터 8월 29일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추기경단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던 자크 팡탈레옹을 교황 우르바노 4세로 선출했고, 그는 1261년 9월 4일 비테르보에서 즉위했다.[15] 오르시니 추기경은 1262년 11월 2일 우르바노 4세에 의해 종교 재판으로 임명되었으며,[16] 최초의 알려진 대종교 재판관이었다.[17]

3. 2. 알렉산데르 4세 시기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1244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어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6] 그는 요크의 사제이자 성직록 소유자였으며,[7] 소아송과 랑의 성직록 소유자이기도 했다.[8] 같은 해 여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함께 제노바로 피신하였고,[9] 리옹에서[10] 열린 제1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였다.[11] 1251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에야 이탈리아로 돌아와 페루자에 머물렀다.[12]

1254년, 교황과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왔으나, 만프레디의 추격을 피해 아나니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포지아 전투에서 교황군이 패배하고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서 사망하자, 나폴리에서 후임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조카이자 조정자로 명망 높았던 리날도 데이 콘티 디 세니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 선출되었다.[13] 오르시니 추기경은 추기경 임기 동안 로마에 머문 기간이 매우 짧았으며,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았다.

알렉산데르 4세는 로마를 장악한 브란칼레오네 데글리 안달로 원로원 의원과 기벨린의 잦은 공격으로 인해 로마, 아나니, 비테르보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1261년 알렉산데르 4세가 비테르보에서 사망하고, 8명의 추기경만이 참석한 콘클라베에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자크 판탈레옹이 교황 우르바노 4세로 선출되었다.[15]

3. 3. 우르바노 4세 시기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1244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소집한 첫 추기경 회의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54][6] 그는 요크의 의전참사회원 및 비(非)봉록 참사원이었다.[54][7] 1244년 여름, 교황 인노첸시오 4세 및 다른 네 명의 추기경과 함께 제노바로 피신했다.[55][9] 리옹에서[56][10] 제1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57][11] 오르시니 추기경을 비롯한 로마 교황청은 1251년 5월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했다.[58][12] 제노바와 밀라노, 브레시아에서 여름을 보낸 후, 1251년 11월 페루자에 도착하여 1253년 4월까지 머물렀다.[58][12]

1254년 10월 중순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후, 교황과 교황청은 1254년 4월 말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5월에 아시시로 순례를 떠난 다음 아나니로 가서 6월부터 10월까지 머물렀다.[13] 그들은 만프레디의 추격을 피해 자리를 떴고, 12월 초 포지아 전투에서 교황군이 패배했다. 인노첸시오 4세가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선종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선출되었다.[59][13] 오르시니 추기경은 추기경 임기 11년 6개월 중 첫 6개월 동안만 로마에 있었다.[59]

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교황청은 1255년 6월 첫 주간까지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나니로 가서, 11월 중순까지 로마에 귀환하지 않았다. 그동안 로마는 브란칼레오네 델리 안달로의 손에 넘어가 있었고, 기벨린과 교황청은 난폭한 폭도들에 의해 로마에 들어갔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했다.[60][14] 교황청은 1257년 5월 말까지 로마에 지내다가 비테르보에서 여름을 보냈고, 1258년 10월 말까지 머문 후 다시 아나니로 가서 1260년 11월 초까지 머물렀다. 이후 교황은 1261년 5월 첫 주간까지 라테라노에 지낸 후 비테르보로 다시 갔다. 알렉산데르 4세는 1261년 5월 25일 비테르보에서 선종했다.[61] 알렉산데르 4세는 재위하는 동안 추기경을 서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 선거에는 겨우 8명의 추기경만이 참석했다. 결국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던 자크 팡탈레옹이 교황 우르바노 4세로 선출되었다.[61][15]

오르시니 추기경은 1262년 11월 2일 우르바노 4세에 의해 종교 재판으로 임명되었으며,[16] 최초의 알려진 대종교 재판관이었다.[17]

3. 4. 콘클라베와 교황 선출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1244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시니발도 피에스키)가 소집한 첫 추기경회의에서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6][54] 그는 요크의 사제이자 성직록 소유자였으며,[7][54] 소아송과 랑의 성직록 소유자이기도 했다.[8] 1244년 여름, 교황 인노첸시오 4세 및 네 명의 다른 추기경과 함께 제노바로 피신했다.[9][55] 리옹에서[10][56] 제1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11][57] 오르시니 추기경을 비롯한 로마 교황청은 1251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했다. 제노바와 밀라노, 브레시아에서 여름을 보낸 후, 교황청은 1251년 11월 페루자에 도착하여 1253년 4월까지 머물렀다.[12][58]

교황청은 10월 중순에 로마로 돌아와 1254년 4월 말까지 머물렀다. 5월에 아시시로 순례를 간 다음 아나니로 가서 6월부터 10월 둘째 주까지 머물렀는데, 이때 만프레드의 추격을 피해 자리를 떴다. 12월 초 포지아 전투에서 교황군이 패배한 후, 인노첸시오 4세는 나폴리로 피신하여 1254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나폴리에서 열렸다. 12월 11일 금요일에 시작된 선거에는 총 12명의 추기경들 중에서 10명이 참여했으나, 어느 후보도 과반수 득표를 받지 못했다. 12월 12일 토요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조카이자 조정자로 평판이 높았던 리날도 데이 콘티 디 세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 불리기로 했고 1254년 12월 20일 나폴리 대성당에서 즉위했다.[13][59]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은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 11년 반 동안 로마에서 6개월밖에 보내지 못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교황청은 1255년 6월 첫째 주까지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나니로 돌아갔고,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청은 그곳에서 1256년 5월 말까지 머물렀고, 그 후 여름을 보내기 위해 12월 초까지 아나니로 떠났다. 1252년부터 카살레키오 백작인 브란칼레오네 데글리 안달로 원로원 의원이 로마를 장악하고 있었고, 기벨린들은 알렉산데르를 반복적으로 난폭한 폭도들에게 쫓겨났다.[14][60] 로마는 1257년 5월 말까지 다시 안식처가 되었고, 비테르보에서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휴가는 1258년 10월 말까지 지속되었고, 교황청은 다시 아나니를 방문하여 1260년 11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 후 교황은 라테란에 1261년 5월 첫째 주까지 머물 수 있었고, 그 후 교황청은 다시 비테르보로 떠났다. 알렉산데르 4세는 1261년 5월 25일 비테르보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데르는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았고, 그의 사후에 열린 선거 회의에는 8명만 참석했다. 선거는 1261년 5월 25일부터 8월 29일까지 계속되는 장기전이었다. 추기경들은 서로 합의할 수 없었기에, 1255년부터 성지에서 십자군과 함께 교황 특사로 활동했던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자크 판탈레옹을 선택했다. 그는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되었고 1261년 9월 4일 비테르보에서 즉위했다.[15][61]

오르시니 추기경은 1262년 11월 2일 우르바노 4세에 의해 종교 재판으로 임명되었으며,[16] 최초의 알려진 대종교 재판관이었다.[17]

오르시니 추기경은 1268~1271년 교황 선거에 참석했고, 비테르보의 당국과 사람들의 추기경과 교황청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제기하는 서한에 서명한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271년 9월 1일에 교황으로 선출될 타협 후보를 선택하기 위해 선택된 6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고, 이탈리아에도 없었으며, 십자군을 위해 성지에 있던 리에주의 부제 테오발도 비스콘티를 교황 자리에 앉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8][62] 그는 1273년에 교황청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했고,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1275년에 리옹을 떠나 로마로 돌아가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수행원 추기경 중 한 명이 아니었고, 교황이 그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1276년 1월 10일에 사망한 아레초에도 없었다. 그는 1276년 1월 20일에 시작되어 다음 날 타란테즈의 베드로가 선출되면서 끝난 1276년 1월 교황 선거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5세가 되었다.[19][63][20][64] 교황 인노첸시오 5세(타란테즈의 베드로)는 1276년 6월 22일 로마 라테란에서 사망했다.

1276년 7월 교황 선거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정한 규칙에 따라 7월 2일에 시작되었다.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를 포함한 13명의 추기경이 참석했다. 시칠리아의 샤를 1세 왕은 콘클라베의 총독으로 활동했고, 그 직책에서 그는 엄격했지만 프랑스 파벌에 유리하게 편파적이었다고 한다. 제노바의 오토보노 피에스키 추기경이 7월 11일에 선출되었고, 교황 아드리아노 5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21][65] 그는 단 39일 더 살았고, 로마의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갔던 비테르보에서 사망했다.[22][66] 그의 한 가지 기억에 남는 행위는 콘클라베를 규제하는 그레고리오 10세의 헌법 "우비 페리쿨룸"을 정지시킨 것이다. 그는 추기경들의 조언에 따라 그레고리오의 규정을 개선하고자 했다. 오르시니 추기경은 이 토론과 결정에 참석했다. 교황 아드리아노 5세는 즉위 직후 시칠리아의 샤를 1세 왕이 비테르보에 와서 통상적인 충성 맹세를 수행하기를 원했고, 산 니콜라 인 카르체의 조반니 추기경 (오르시니)등을 파견하여 그의 소원을 이루게 했다. 샤를은 7월 24일 로마에서 비테르보에 도착했다. 불행히도 아드리아노 교황은 8월 18일에 사망했고, 샤를 왕과의 협상은 미완료로 남았다.[24][67]

1276년 9월 교황 선거는 아드리아노 5세가 사망한 비테르보에서 9월 초에 시작되었다. 8월 29일에 열렸어야 할 개회식은 비테르보 시민들의 난폭한 행동으로 인해 며칠 동안 연기해야 했다. 그러나 소란이 진정되자 추기경들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1276년 9월 8일, 수석 추기경 주교인 리스본의 베드로 율리아노가 첫 번째 투표에서 선출되었다. 그는 요한 21세로 불리기로 했고, 9월 20일 비테르보의 산 로렌초 대성당에서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에 의해 즉위했다.[25][68] 10월 18일,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26][68]

아드리아노 5세 교황의 그레고리오 10세의 규정 정지는 공격을 받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정지의 진실을 보증한 추기경들이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하거나, 철회가 가톨릭교회 교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아마도 콘클라베를 지연시킨 소동을 선동했던 교황청의 문제 해결사들이었을 것이다.[27][69] 요한 21세는 즉시 1276년 9월 30일에 반격하여 정지가 이루어졌고 유효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28][70] 요한 21세의 이 철회 칙서 문제는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29][71] 조반니 가에타노 추기경이 샤를 1세 왕과 맺은 협상은 완료되었고, 샤를은 1276년 10월 7일 요한 교황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30][72] 1277년 5월 중순, 교황이 비테르보의 주교 궁에 새로 지은 방에 있었을 때, 갑자기 지붕이 무너졌다. 교황은 떨어진 돌과 목재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며칠 동안 고통 속에 있었고, 1277년 5월 20일, 즉위 정확히 8개월 후에 사망했다.[31]

1277년 교황 선거가 비테르보에서 열렸고, 7명의 추기경이 참석했다.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은 여전히 교황 특사로 프랑스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은 콘클라베였다. 선거인 3명은 앙주 파벌에 속했고, 3명은 반대했다. 따라서 콘클라베는 5개월 반 이상 진행되었다. 마침내 1277년 11월 25일 성 카테리나 축일에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이 선출되었다.[32][73] 그는 니콜라오 3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새 교황은 즉시 로마로 출발했다. 그는 12월 18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12월 19일에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 즉위했다. 그의 선출은 심각한 어려움을 예고했는데, 그는 시칠리아의 샤를 왕의 후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그는 샤를 왕이 교회 문제와 교황령 운영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33][74]

요한 21세는 학자였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추기경에 불과했지만, 대신 정무를 담당했다. 1277년 요한 21세가 사고사하고 콘클라베는 반년이나 걸렸지만, 실적을 인정받아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니콜라오 3세라고 칭했다.

4. 교황 재위 (1277년 ~ 1280년)

요한 21세는 학자였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추기경에 불과했지만, 대신 정무를 담당했다. 1277년 요한 21세가 사고사하고 콘클라베는 반년이나 걸렸지만, 실적을 인정받아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니콜라오 3세라고 칭했다.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견을 목표로, 추기경 시절부터 세속 군주와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로마의 왕루돌프 1세가 로마냐의 영유 포기를 타진했고, 니콜라오 3세는 이를 승낙하여 이탈리아 정책은 포기되었다. 1279년프란치스코회의 사목 활동 특전을 옹호하는 "엑지트 퀴 세미나토(Exiit qui seminat)"를 발표했지만, 이윤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대논쟁이 일어났다. 바티칸 궁전의 개수를 진행하는 한편 네포티즘도 행하여, 3명의 친척을 고위 성직자로 등용했다.

1280년, 비테르보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니콜라오 3세는 교황권 강화를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교황령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팽창 정책으로 위협받고 있었다.[75] 프리드리히 2세는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를 정복하려 했고, 이는 교황과의 갈등을 야기했다.[75] 교황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의 앙주의 샤를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또 다른 위협이 되었다.[75] 니콜라오 3세는 앙주의 샤를 1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75]

1273년 독일 왕이자 로마 왕으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와의 협상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신장시켰다.[75] 1278년 5월, 루돌프 1세와의 협약을 통해 볼로냐, 로마냐, 라벤나를 교황령에 귀속시키는 데 성공했다.[75][34] 연대기 작가 루카의 바르톨로뮤에 따르면, 니콜라오 3세는 루돌프 1세신성 로마 제국을 롬바르디아, 부르군디, 투스키아, 독일의 네 왕국으로 분할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34]

또한 니콜라오 3세는 앙주의 샤를 1세를 설득하여 1278년에 로마 원로원 의원직과 토스카나의 교황 대리직을 사임하도록 했다.[77][35][36] 같은 해 7월에는 교령 《Fundamenta militantis》를 발표하여 외국인이 로마에서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78][37]

불라 니콜라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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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3세는 프란치스코회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부친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니콜라오 3세가 반포한 칙서와 서간들 중 165편 이상이 프란치스코회와 관련된 주제였다.[38][39][40] 특히 1279년 8월 14일에는 프란치스코회 내 엄률파와 완화파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 칙서 《Exiit qui seminat》를 발표했다.[38][39][40]

니콜라오 3세는 많은 비용을 들여 라테라노 궁전과 바티칸을 보수하고,[79][41] 비테르보 인근 소리아노넬치미노에 아름다운 시골 저택을 짓도록 하였다.[80][42][43]

니콜라오 3세는 학식이 풍부하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지만, 족벌주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혔다는 평가를 받는다.[43]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척 세 명을 추기경에 서임했고, 그 밖의 친족들에게도 한 명씩 중요한 자리를 주었다.[43] 이러한 족벌주의는 단테에 의해 풍자되었으며, 동시대 만화에서는 그를 고운 옷을 입고 세 마리의 "작은 곰"(orsetti, 가문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이 아래에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43]

니콜라오 3세는 1278년 3월 12일 추기경회의를 소집해 아홉 명의 추기경을 서임했다.[81] 새 추기경들 대부분은 프랑스파가 아니었으며, 개중에서 다섯 명은 수도회 출신이었다.[81]

  • 오르도노 알바레스, 브라가 대주교 - 프라스카티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85년 12월 21일.
  • 벤티벤가 데이 벤티벤기, O.F.M., 토디 주교 - 알바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89년 3월 25일.
  • 라티노 말라브란카 오르시니, O.P., 니콜라오 3세의 조카 - 오스티아 에 벨레트리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94년 8월 10일.
  • 로버트 킬워드비, O.P., 캔터베리 대주교 - 포르토와 S. 루피나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79년 9월 12일.
  • 제라르 드 레신, 오세르 주교 -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78년 7월 18일.
  • 제라르도 비안키 - SS. XII 아포스톨리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 이후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1281년 4월 12일), † 1302년 3월 1일.
  • 지롤라모 마시, O.Min. - 프란체스코회의 총장. S. 푸덴치아나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 이후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주교(1281년 4월 12일) 및 교황 니콜라오 4세(1288년 2월 22일), † 1292년 4월 4일
  • 조르다노 오르시니, 교황 니콜라오 3세의 형제 - S. 에우스타키오의 추기경 부제로 임명, † 1287년 9월 8일.
  • 자코모 콜론나 - S. 마리아 인 비아 라타의 추기경 부제로 임명; 1297년 5월 10일 파문 및 해임, 1305년 12월 15일 무임 추기경 부제로 복귀, † 1318년 8월 14일.


1280년 니콜라오 3세 사망 후 열린 콘클라베 전에 두 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시칠리아의 샤를 1세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협박을 받아야 했다.[45]

4. 1. 교황권 강화 정책

니콜라오 3세는 교황권 강화를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교황령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팽창 정책으로 위협받고 있었다.[75] 프리드리히 2세는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를 정복하려 했고, 이는 교황과의 갈등을 야기했다.[75] 교황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의 앙주의 샤를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또 다른 위협이 되었다.[75] 니콜라오 3세는 앙주의 샤를 1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75]

니콜라오 3세는 1273년 독일 왕이자 로마 왕으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와의 협상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신장시켰다.[75] 1278년 5월, 루돌프 1세와의 협약을 통해 볼로냐, 로마냐, 라벤나를 교황령에 귀속시키는 데 성공했다.[75][34] 연대기 작가 루카의 바르톨로뮤에 따르면, 니콜라오 3세는 루돌프 1세신성 로마 제국을 롬바르디아, 부르군디, 투스키아, 독일의 네 왕국으로 분할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34]

또한 니콜라오 3세는 앙주의 샤를 1세를 설득하여 1278년에 로마 원로원 의원직과 토스카나의 교황 대리직을 사임하도록 했다.[77][35][36] 같은 해 7월에는 교령 《Fundamenta militantis》를 발표하여 외국인이 로마에서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7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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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교회 문제

니콜라오 3세는 프란치스코회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부친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니콜라오 3세가 반포한 칙서와 서간들 중 165편 이상이 프란치스코회와 관련된 주제였다.[38][39][40] 특히 1279년 8월 14일에는 프란치스코회 내 엄률파와 완화파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 칙서 《Exiit qui seminat》를 발표했다.[38][39][40]

니콜라오 3세는 많은 비용을 들여 라테라노 궁전과 바티칸을 보수하고,[79][41] 비테르보 인근 소리아노넬치미노에 아름다운 시골 저택을 짓도록 하였다.[80][42][43]

4. 3. 족벌주의

니콜라오 3세는 학식이 풍부하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지만, 족벌주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혔다는 평가를 받는다.[43]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척 세 명을 추기경에 서임했고, 그 밖의 친족들에게도 한 명씩 중요한 자리를 주었다.[43] 이러한 족벌주의는 단테에 의해 풍자되었으며, 동시대 만화에서는 그를 고운 옷을 입고 세 마리의 "작은 곰"(orsetti, 가문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이 아래에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43]

4. 4. 추기경 임명

니콜라오 3세는 1278년 3월 12일 추기경회의를 소집해 아홉 명의 추기경을 서임했다.[81] 새 추기경들 대부분은 프랑스파가 아니었으며, 개중에서 다섯 명은 수도회 출신이었다.[81]

  • 오르도노 알바레스, 브라가 대주교 - 프라스카티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85년 12월 21일.
  • 벤티벤가 데이 벤티벤기, O.F.M., 토디 주교 - 알바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89년 3월 25일.
  • 라티노 말라브란카 오르시니, O.P., 니콜라오 3세의 조카 - 오스티아 에 벨레트리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94년 8월 10일.
  • 로버트 킬워드비, O.P., 캔터베리 대주교 - 포르토와 S. 루피나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79년 9월 12일.
  • 제라르 드 레신, 오세르 주교 -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 † 1278년 7월 18일.
  • 제라르도 비안키 - SS. XII 아포스톨리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 이후 사비나의 추기경 주교(1281년 4월 12일), † 1302년 3월 1일.
  • 지롤라모 마시, O.Min. - 프란체스코회의 총장. S. 푸덴치아나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 이후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주교(1281년 4월 12일) 및 교황 니콜라오 4세(1288년 2월 22일), † 1292년 4월 4일
  • 조르다노 오르시니, 교황 니콜라오 3세의 형제 - S. 에우스타키오의 추기경 부제로 임명, † 1287년 9월 8일.
  • 자코모 콜론나 - S. 마리아 인 비아 라타의 추기경 부제로 임명; 1297년 5월 10일 파문 및 해임, 1305년 12월 15일 무임 추기경 부제로 복귀, † 1318년 8월 14일.


1280년 니콜라오 3세 사망 후 열린 콘클라베 전에 두 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시칠리아의 샤를 1세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협박을 받아야 했다.[45]

5. 죽음

니콜라오 3세는 비테르보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작스럽게 중병에 걸렸다.[82] 《Chronicon Parmense》에 따르면, 그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82] 바르톨로메오 피아도니는 그가 뇌졸중에 걸려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82] 그는 종부성사도 받지 못한 채 1280년 8월 22일 선종했으며, 재위 기간은 2년 8개월 28일이었다.[82]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바티칸 대성전 내 성 니콜라오 경당에 안장되었다.[83]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독살설이 따르기도 했다.[83]

6. 평가

단테지옥편에서 성직 매매, 즉 교회의 계급에서 직위나 지위를 돈을 주고 사는 죄를 저지른 자들을 위해 마련된 지옥 제8원 제3구덩이에서 영원히 시간을 보내도록 선고받은 교황 교황 니콜라오 3세와 짧게 대화를 나눈다.[49]

단테의 이야기에서, 성직 매매자들은 머리가 아래로 향하게 구멍 속에 갇히고 발바닥에는 불꽃이 타오른다(제19곡).[50] 니콜라오 3세는 이 구덩이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그의 발에 붙은 불꽃의 높이로 이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단테를 교황 보니파시오 8세로 착각한다. 오해가 풀리자 니콜라오 3세는 단테에게 보니파시오 8세뿐만 아니라 훨씬 더 부패한 교황인 교황 클레멘스 5세도 (성직 매매로 인해) 지옥에 떨어질 것을 예견한다고 말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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