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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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규보는 고려 시대의 문인으로, 116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그는 특히 서사시 《동명왕편》을 통해 민족의 영웅인 동명왕의 생애를 노래하며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시, 가전체 문학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당대 문학 비평가로서도 활동했다. 말년에는 강화도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123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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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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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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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규보 |
한자 | 李奎報 |
로마자 표기 | Yi Gyubo |
자 | 춘경(春卿) |
호 | 백운거사(白雲居士) |
시호 | 문순(文順) |
출생일 | 1169년 1월 15일 |
사망일 | 1241년 10월 8일 |
국적 | 고려 |
가문 | 황려 이씨 |
관직 | |
관직명 | 우사간 |
재임 기간 | 1217년 ~ ? |
군주 | 고려 고종 |
군주 호칭 | 국왕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윤수(李允綏) |
2. 생애
116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아홉 살 때 이미 여러 경전과 서적을 섭렵했다고 한다.
1190년(명종 21) 예부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 이후 개경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라 칭하며 지냈다. 이때 고구려 건국 영웅 동명왕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 〈동명왕편〉을 저술했는데, 이는 한국 문학사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최충헌, 최우 집권기에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1232년 몽골의 침입 당시 오고타이에게 보내는 서장을 작성하여 외교적으로 기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8,000수가 넘는 시를 남겨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었으며, 설화 문학인 『백운소설』(白雲小說)도 유명하다. 당대의 중요한 문학 비평가로서 형식보다는 내용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견해를 보였는데, 이는 한문의 형식미를 강조했던 이인로 등과는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2]
2. 1. 유년 및 청년 시절
116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버지는 호부랑중(戶部郎中)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이다.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아홉 살 때 '기이한 신동'으로 불렸다. 이때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경사(經師), 백가(百家)의 문헌과 도교, 불교 서적까지 두루 섭렵했으며, 한 번 읽으면 기억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사학 기관이던 문헌공도에 입학하여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시를 빨리 짓는 시험인 각촉부시(刻燭賦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189년(명종 19) 예비시험 격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1190년(명종 21) 본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개성의 천마산에 들어가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칭하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천마산시〉 등을 지었으며, 특히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의 생애와 업적을 노래한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우리 민족 서사시의 중요한 성과이자 한국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오세재(吳世才)가 죽은 뒤 이잠지(李湛之)로부터 강좌칠현(江左七賢)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지금의 칠현 중에는 서진(西晋)의 왕융(王戎)과 같은 식견을 가진 자가 없다"며 사양하기도 했다.
1199년(신종 2) 동경(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종군(從軍)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 겸 수제(修製)가 되었으며,[8] 같은 해 전주(全州)의 사록(司錄)으로 임명되었다.
2. 2. 중년 및 관직 생활
1207년(희종 3)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충헌의 명으로 〈모정기〉(茅亭記)라는 글을 쓰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이라는 임시직 한림학사 벼슬을 받았다.1213년(강종 2)에는 40여 개의 운(韻)을 사용한 장편시 〈공작〉(孔雀)을 지었으며, 이후 사재승(司宰丞) 벼슬을 받았다. 1218년(고종 5)에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맡는 좌사간(左司諫)을 지냈다.
1219년(고종 6), 지방관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당시 계양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지역에 해당한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계양산 기슭에 있는 정자 '자오당'(自娛堂)에 대한 기록인 〈자오당기〉(自娛堂記) 등을 남겼다.[8]
이후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가 집권한 시기에도 정치가로서 활동하였다. 1232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이규보가 오고타이에게 외교 문서를 보내 몽골군을 물러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공로로 훗날 추밀부사(樞密副使), 이부상서(吏部尙書),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2. 3. 말년
1230년 고종 17년에 잠시 위도로 귀양을 갔으나, 곧 다시 등용되어 집현전 대학사, 정당문학, 태자소부, 참지정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237년 고종 24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대몽 항쟁 시기에는 몽골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몽골의 고려 침공을 피해 임시 수도가 된 강화도의 학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나라의 중요한 정책 자문에 응하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국가의 일에 참여했다.
같은 해(1237년) 7월 병세가 위독해지자,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가 그의 문집 간행을 서둘렀으나, 이규보는 문집 간행을 보지 못하고 그해 9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8]
3. 문학 세계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아홉 살에 신동으로 불렸다. 사서오경은 물론 불교, 도교 서적까지 두루 읽으며 시문에 능통해졌다. 그는 평생 8,000편이 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으며, 이 작품들은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전해진다. 시 외에도 설화 문학인 「백운소설」을 남기기도 했다.
당대의 문인 그룹인 강좌칠현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의 칠현 중에는 서진(西晋)의 왕융과 같은 식견을 가진 자가 없다"며 거절한 일화는 그의 높은 문학적 자부심과 식견을 보여준다.
이규보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그의 다양한 문학적 관심과 현실 비판 의식을 잘 보여준다.
- 동명왕편: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서사시 형태로 노래하여,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당시 백성들의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 천보영사(天寶詠史): 당 현종 시기의 퇴폐적인 생활이 나라를 위태롭게 했음을 노래하며, 이를 통해 당시 고려 왕조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다.
- 가포육영(家圃六詠): 텃밭에서 기르는 채소 여섯 가지를 노래한 시로, "겨울을 대비하여 오이와 무를 소금에 절인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오늘날 김치의 원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로 여겨져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 1. 신의론(新意論)과 독창성
이규보는 당대의 저명한 문장가였던 이인로와는 상반된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인로가 과거 고전에서 뛰어난 구절을 가져와 시를 짓자는 '용사론'을 주장한 반면, 이규보는 시인 자신의 개성을 살려 독창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신의론'을 내세웠다. 이러한 문학관 덕분에 이규보의 작품에는 기존 한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이면서도 표현이 뛰어난 구절이 많다. 그의 대표작인 <미인원>은 앞에서 뒤로 읽거나 뒤에서 앞으로 읽어도 의미가 통하는 '회문시(回文詩)'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기발하고 파격적인 시 세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8]3. 2. 사륜정(四輪亭)
사륜정은 이규보의 독창적이고 기발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발명품이다. 네 개의 바퀴가 달린 가벼운 대나무 정자로, 당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아이디어였다. 이규보의 사륜정 실물은 경기도 양평군 석창원에 있다.[8]3. 3. 가전체(假傳體) 문학
이규보는 시 외에도 여러 편의 서사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한유(韓愈)가 당나라 시대에 유행시킨 허구적인 전기 형식인 가전체(假傳) 장르의 산문 작품을 썼다.[1] 대표적인 가전체 작품으로는 술을 의인화한 <국선생전>(「주생전(酒生傳)」)[1][8]과 「청류거담(清水龜談)」[1] 등이 있다. 가전체 문학은 고대 설화와 근대 서사 문학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이규보는 이러한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서사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8]4. 중국 문학의 영향
현대 한국 학자들은 이규보 작품에 나타난 중국 문학의 영향으로 백거이 (白居易), 도연명 (陶淵明), 소식 (蘇軾, 호는 동파) 등을 주목한다. 당나라의 백거이는 이백 (李白)이나 두보 (杜甫)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이규보가 활동하던 시기보다 400년 전인 중당(中唐) 시대 문학의 모방은 송나라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고려 사신들은 송 태종 (宋太宗) 때 편찬된 4대 총서 중 하나인 『문원영화 (文苑英華)』를 입수했는데, 이 책은 송나라 작가들에게 시와 문학 작품 창작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3]
이규보는 도연명에 관한 시 「도연명 시를 읽고 (讀陶淵明詩)」를 짓기도 했다.[3]
도연명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
소나무 대나무 국화 사이를 거닐었네.
술이 없으면 친구를 찾아 나서고
매일 취하여 잠들었네.
잠자는 벤치에 몸을 쭉 뻗고 누우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네.
찬란한 고대 세계에서 온
고결하고 진실한 선비
시를 읽으며 그를 생각하니
그의 절개는 천년 동안 칭송받으리라.
또한 이규보의 작품은 북송 (北宋)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소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규보는 소식에 대해 "소식은 최고의 문인으로, 현대의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라고 평가하며 존경심을 표했다.[3]
5. 대표 작품
- 《동명왕편》(東明王篇):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소재로 한 서사시이다. 이규보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한국 고유의 역사 전설과 문화적 성취를 강조했다. 이는 당시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몽골의 정치적 지배에 맞서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1]
- 가전 작품: 중국 당 시대 문인 한유(韓愈)가 유행시킨 허구적 전기 형식인 가전 작품으로 '청류거담'(清水龜談)과 '주생전'(酒生傳) 등을 남겼다.[1]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8000편이 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모은 시문집이다.
- 《백운소설》(白雲小說): 설화 문학 작품이다.
- 《천보영사》(天寶詠史): 당 현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장편시이다. 현종의 사치와 향락이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음을 지적하며, 이를 통해 고려 왕조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가포육영》(家圃六詠): "겨울을 대비하여 오이와 무를 소금에 절인다"라는 구절이 있어, 김치의 원형에 관한 초기 기록으로 주목받는다.
- 기타 작품: 《미인원》(美人怨), 《영정중월》(詠井中月) 등이 있다.
6. 평가
그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칭할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특히 시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그의 작품 <시벽>에서 잘 드러나며, 평소 술을 즐겨 술 없이는 시를 짓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술에 '선생'이라는 극존칭을 붙여 가전체 문학인 <국선생전>을 짓기도 하였다.
최씨 무인 정권 시기에 활동하며 권력에 협조했다는 점에서 '권신의 압객(狎客)',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개가 있고 성격이 강직하여 조정 내에서는 '인중룡(人中龍)', 즉 사람들 가운데 용과 같은 인물이라는 긍정적인 평판도 있었다.[8] 그는 젊은 시절 관운이 따르지 않았으나, 관직에 나아간 후에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때로는 글 한 수로 벼슬을 얻을 만큼 뛰어난 글재주가 그의 관운에 영향을 미쳤다. 한두 차례 좌천되거나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료였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그의 작품들은 깊은 고뇌 끝에 나온 자기표현이라기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흥을 즉각적으로 표출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부에서는 그를 가문의 부흥과 개인의 입신출세를 우선시하는 입신출세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8]
이러한 삶의 태도는 가문을 일으키고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집권자인 최우에게 바친 시들에서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은, 그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그는 최씨 정권 아래에서 활동했던 일반적인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8]
7. 이규보의 흔적
- 이규보 묘: 이규보는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한 강화도에 묻혔다. 이규보의 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으며, 근처에 이규보의 사당이 함께 있다.
- 이규보로: 이규보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재임했던 것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길이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에 있다.
- 이규보의 문학시비: 그의 시비는 고향이었던 경기도 여주, 한동안 재임했던 인천 계양구의 계양산 자락, 인생의 중후반기를 보냈던 강화도 등지에 있다.
- 강화문학관: 이규보가 강화도에서 오랜 시간 지냈던 것을 기념하여 그의 문학적 생애 등을 다루고 있다.[8]
8. 이규보가 등장한 작품
9. 주요 저서
- 동국이상국집: 8000편이 넘는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 국선생전
- 백운소설: 설화 문학 작품이다.
참조
[1]
웹사이트
Yi Kyubo
https://medieval_lit[...]
2023-11-00 # Dead link date, assuming month only available.
[2]
서적
Understanding Korean Literature
https://books.google[...]
M. E. Sharpe
[3]
서적
Korea's Premier Collection of Classical Literature: Selections from Sŏ Kŏjŏng's Tongmunsŏ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4]
웹사이트
李奎報(りけいほう)
https://kotobank.jp/[...]
2023-10-21
[5]
웹사이트
이규보(李奎報)
http://encykorea.aks[...]
2023-01-12
[6]
문서
동국이상국집 연보
[7]
문서
이규보 묘지명
[8]
문서
이규보 관련 저서 및 논문 목록
[9]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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