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라이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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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타프 클라이캄프는 제1차 세계 대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 나치 독일 해군에서 복무한 독일 해군 장교였다. 1913년 해군에 입대하여 여러 함선에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39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휘관으로 베스테르플라테 공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여러 보직을 거쳐 네덜란드 주둔 사령관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포로가 되었으며, 1952년 사망했다.

구스타프 클라이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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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 세계 대전 (1913-1918)

1913년 4월 1일, 클라이캄프는 제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방호순양함 비네타에 배치되었다. 기초 훈련을 받은 후, 1914년 4월 3일 뫼르비크 해군사관학교로 전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순양전함 데르플링거의 통신 장교로 배치되었고, 1915년 소위로 진급했다.

1918년 3월부터 잠수함학교에 다녔고, 1918년 10월까지 SM U-9독일어에서 감시 장교로 복무했으며, 그 해 말까지 제1 잠수함 기동함대의 서기 장교가 되었다.

2.1. 제국 해군 입대

1913년 4월 1일, 클라이캄프는 제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방호순양함 SMS 비네타에 배치되었다. 기초 훈련을 받은 후, 1914년 4월 3일 뫼르비크 해군사관학교로 전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는 순양전함 SMS 데르플링거의 통신 장교로 배치되었고, 1915년 소위로 진급했다.

1918년 3월부터 그는 잠수함학교에 다녔고, 1918년 10월까지 SM U-9독일어에서 감시 장교로 복무했으며, 그 해 말까지 제1 잠수함 기동함대의 서기 장교가 되었다.

2.2. 뫼르비크 해군사관학교

1914년 4월 3일 뫼르비크 해군사관학교로 전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는 순양전함 SMS 데르플링거의 통신 장교로 배치되었고, 1915년 소위로 진급했다.

2.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3년 4월 1일, 클라이캄프는 제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방호순양함 SMS 비네타에 배치되었다. 기초 훈련을 받은 후, 1914년 4월 3일 뫼르비크 해군사관학교로 전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는 순양전함 SMS 데어플링거의 통신 장교로 배치되었고, 1915년 소위로 진급했다.

1918년 3월부터 그는 잠수함학교에 다녔고, 1918년 10월까지 U-9에서 감시 장교로 복무했으며, 그 해 말까지 제1 잠수함 기동함대의 서기 장교가 되었다.

3.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 (1918-1933)

클라이캄프는 에르하르트 해병여단 복무 후, 1920년 10월 1일부터 함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통신 및 감시 장교로 근무했다. 1922년 10월 1일에는 M 113의 지휘를 맡았으며, 1923년 10월 1일부터 해군통신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1925년 Kapitänleutnant독일어로 진급했다.

1926년 9월 24일 전함 하노버의 롤렌오피치어가 되었고, 이후 북해 해군 기지의 기함 슐레지엔으로 이동했다. 1928년 9월 28일부터 순양함 엠덴에서 훈련 및 교육을 담당했고, 1930년 2월 11일 나흐리히텐미텔베르수흐산스탈트 국장이 되었다. 1932년 10월 쾨니히스베르크 제1방위군관구 해군 연락 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933년 1월 나치당 집권 후 함대 사령부 제4 참모 장교가 되었다.

3.1. 에르하르트 해병여단 복무

클라이캄프는 1918년 11월 군주제 붕괴 이후 해군에 남아 에르하르트 해병여단에서 복무했다. 1920년 1월 7일 오버로이테난트 츠어 제로 임시 진급했으며, 1921년 5월 14일에 확정되었다.

3.2.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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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 일자계급
1913년 4월 1일사관후보생
1914년 4월 3일해군 소위
1915년 9월 18일해군 중위
1921년 5월 14일해군 대위
1925년 2월 1일해군 소령
1932년 10월 1일해군 중령
1936년 10월 1일해군 대령
1938년 4월 1일해군 준장
1942년 4월 1일해군 소장
1943년 10월 1일해군 중장

Oberleutnant zur See독일어로 임시 진급했던 것은 1920년 1월 7일 자로 소급되었다.

3.3. 주요 보직

클라이캄프는 1920년 10월 1일 통신 및 감시 장교로 함부르크에 배치되었다. 1921년 12월 4일에는 같은 자격으로 전노급 전함 브라운슈바이크로 전출되었으며, 1922년 10월 1일 M 113의 지휘를 맡았다.

1년 동안 지휘관으로 복무한 후, 1923년 10월 1일 해군통신학교(Marinenachrichtenschule)의 교관이 되었다. 1926년 9월 24일에는 롤렌오피치어(Rollenoffizier)로 전함 하노버에 합류했다. 하노버가 운행 중단되자, 그는 같은 역할로 북해 해군 기지(Marinestation Nordsee)의 새로운 기함인 슐레지엔으로 전출되었다.

1928년 9월 28일부터 클라이캄프는 순양함 엠덴에서 훈련 및 교육 담당 장교를 맡았으며, 1930년 2월 11일 나흐리히텐미텔베르수흐산스탈트(Nachrichtenmittelversuchsanstalt)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의 제1방위군관구(Wehrkreiskommando I) 해군 연락 장교로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클라이캄프는 함대 사령부의 제4 참모 장교가 되었다.

4. 나치 독일 해군 (1933-1945)

1935년 9월 26일, 클라이캄프는 해군 최고 사령부의 기술 통신 그룹 국장을 역임한 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부관이 되었다. 1939년 4월 26일, 해군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휘를 맡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퇴역하여 원격 조종 표적함으로 개조될 예정이었으나, 폴란드 침공 준비로 인해 군사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1939년 8월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를 대신하여 우호 방문 명목으로 단치히로 파견되었는데, 이는 단치히 항구의 폴란드 요새를 무력화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2cm 대공포 5문과 기관총 6정을 갖춘 60명의 병력을 수용했고, 항해 중 M-1독일어 및 기타 선박과 합류하여 메멜에서 온 225명의 해병 특공대를 수송했다.

4.1. 주요 보직

클라이캄프는 1935년 9월 26일에 해군 최고 사령부의 기술 통신 그룹 국장을 역임한 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부관이 되었다. 1939년 4월 26일, 1년 전에 해군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남아메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휘를 맡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퇴역하여 원격 조종 표적함으로 개조될 예정이었으나, 폴란드 침공 준비로 인해 군사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1939년 8월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순양함 Königsberg를 대신하여 우호 방문 명목으로 단치히로 파견되었다. 이 방문은 단치히 항구의 폴란드 요새를 무력화하기 위해 상륙 부대를 단치히로 수송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이를 위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2cm 대공포 5문과 기관총 6정을 갖춘 60명의 병력을 수용했다. 항해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M-1 및 기타 선박과 합류하여 메멜에서 온 225명의 해병 특공대를 수송했다.

4.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4월 26일, 1년 전에 해군 대령으로 진급한 클라이캄프는 몇 주 전에 남아메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휘를 맡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퇴역하여 원격 조종 표적함으로 개조될 예정이었으나, 폴란드 침공 준비로 인해 이 함선은 군사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1939년 8월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를 대신하여 우호 방문 명목으로 단치히로 파견되었다. 이 방문은 단치히 항구의 폴란드 요새를 무력화하기 위해 상륙 부대를 단치히로 수송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이를 위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2cm 대공포 5문과 기관총 6정을 갖춘 60명의 병력을 수용했다. 항해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M-1 및 기타 선박과 합류하여 메멜에서 온 225명의 해병 특공대를 수송했다.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5분, 클라이캄프는 베스테르플라테 공격 명령을 내렸고 2분 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28cm포에서 첫 포탄이 발사되었다.

1940년 4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덴마크 항구 점령을 임무로 하는 제7해군전대의 기함이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클라이캄프는 1940년 8월 29일 바다사자 작전을 위해 칼레 해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수송함대 C 사령관을 겸임했다. 영국 침공이 취소된 후, 클라이캄프는 1943년 2월 21일까지 역임한 군함 건조 본부에서 군사 행정 그룹 책임자로 해군 최고 사령부로 전출되었다.

1943년 3월부터 1944년 말까지, 클라이캄프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최종적으로 해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네덜란드 주둔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945년 1월 1일부터 3월 14일까지 그는 북해 해군 최고 사령관의 지휘 하에 있었다. 1945년 3월 15일, 그는 도이체 부흐 해군 사령관을 맡았다.

4.3.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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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일계급
1913년 4월 1일사관후보생
1914년 4월 3일해군 소위
1915년 9월 18일해군 중위
1921년 5월 14일해군 대위 (1920년 1월 7일자로 소급)
1925년 2월 1일해군 소령
1932년 10월 1일해군 중령
1936년 10월 1일해군 대령
1938년 4월 1일해군 준장
1942년 4월 1일해군 소장
1943년 10월 1일해군 중장

5. 전후 (1945-1952)

클라이캄프는 1945년 5월 7일 포로가 되어 1947년 4월 18일까지 영국에 구금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52년 봄까지 실업 상태였으며, 이후 위고 슈티네스와 함께 뮐하임안데어루르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1952년 9월 13일에 사망했다.

6. 훈장

* 철십자 1급 부장
* 한자 십자 훈장
* 금십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