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리포는 카를 마르텔과 스완힐드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서자 또는 적자로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이복 형제인 피핀 3세, 카를로만 1세와 갈등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748년에는 바이에른 공작에 추대되었으나 피핀 3세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에도 피핀에 대항하다가 753년 프로방스 백작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726년 출생 - 당 대종
당 대종은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당나라 황제에 올랐으나, 환관의 권력 장악, 절도사의 세력 확대, 토번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당나라 중앙집권 체제 약화와 봉건화의 시작을 초래했다. - 726년 출생 - 아가보디 7세
죄송합니다. 아가보디 7세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위키백과 스타일의 한 문장 요약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 바이에른 공작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황제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는 '경건왕'이라는 별칭을 가졌으나, 정치적 무능과 상속 분쟁으로 인해 제국 분열을 초래했다. - 바이에른 공작 -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과 대립하고 아들에게 폐위되어 사망했다.
그리포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714년 |
사망 | 753년 (추정) |
아버지 | 카를 마르텔 |
어머니 | 루트루 |
형제자매 | 피핀 3세 힐트루트 (바이에른) 카를로만 (궁재) 란트힐트 알트루트 |
경력 | |
작위 | 공작 |
지배 지역 | 노르망디 브르타뉴 멘 |
2. 생애
그리포는 카를 마르텔이 바이에른에서 사로잡은 스완힐드 소생이었다. 아날레스 연대기(Annales regni Francorum)에 의하면 그리포는 합법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아들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포의 이복 형 카를로만과 피핀 3세가 그의 몫의 유산을 박탈했다고 한다.[1]
카를 마르텔은 당초 피핀과 카를로만에게만 궁재직을 분배할 계획이었으나, 스완힐드는 카를 마르텔에게 그리포의 몫을 요구하였다. 741년 카를 마르텔은 병석에서 프랑크 왕국의 일부를 그리포의 몫으로 정하였다. 카를 마르텔 사후, 그리포와 그의 형제 피핀 3세, 카를로만 1세는 카를 마르텔의 유산을 분배하였다. 그러나 피핀 3세와 카를로만 1세에 의해 그리포는 사생아로 규정되었고, 742년 빅스 푸아티에(푸아티에 근처)에서 어머니 스완힐드와 함께 체포되어 수도원에 감금되었다.[1]
이후 그리포는 여러 차례 반란과 망명을 반복했다. 747년 바이에른으로 망명하여 이복 매부 오딜로의 지원을 받기도 했고, 748년 바이에른 공작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피핀 3세는 그리포를 진압하고 오딜로의 아들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했다. 피핀 3세는 그리포를 용서하고 만스 백작 등에 임명하기도 했지만, 751년 피핀 3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리포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753년 그리포는 프로방스 백작 테오돈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1]
2. 1. 출생과 가계
카를 마르텔과 바이에른 출신 스완힐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완힐드는 바이에른의 유력 귀족 가문인 아길롤핑 가문의 일원이었다.[1] 그리포의 출생 신분에 대해서는 서자라는 설과 정실 자녀라는 설이 동시에 존재한다.[1]2. 2. 유산 분쟁과 반란
카를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상속하려 했으나, 그리포는 이복 형제인 피핀 3세와 카를로만 1세에게 유산을 빼앗겼다.[1] 아날레스 연대기(Annales regni Francorum)에 따르면 그리포는 합법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아들이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피핀 3세와 카를로만 1세는 그리포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유산을 박탈했다. 그리포는 742년 빅스 푸아티에(푸아티에 근처)에서 어머니 스완힐드와 함께 체포되어 수도원에 감금되었다.수도원을 탈출한 그리포는 랑의 요새화된 지형을 이용하여 피핀 3세와 카를로만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곧 체포되어 뇌샤텔의 노붐 카스텔룸 수도원 혹은 벨기에 리에주 근처 복스-수-쉐브흐몽에 다시 감금되었다.
747년 그리포는 탈출에 성공하여 바이에른으로 망명했다. 일설에는 747년 카를로만 1세가 수도원으로 은퇴한 직후 피핀 3세가 그리포를 석방했다고도 한다. 그는 바이에른 북부 튀링겐을 거쳐 작센으로 갔다가 다시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그리포는 어머니쪽 친척이자 이복 매부였던 바이에른 부족 공작 오딜로의 지원을 받아 쉐브흐몽 수도원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1]
748년 1월 오딜로가 사망하자 그리포는 바이에른 공작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군사를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그리포를 몰아내고 오딜로의 아들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부족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피핀 3세는 그리포를 용서하고 748년 만스 백작(메인)과 파리 백작에 임명하였고, 르망의 영주와 네우스트리아의 12개 변경령을 주었다.
751년 11월 피핀 3세가 메로빙거 왕조의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그리포는 다시 피핀 3세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바스코뉴로 가 아키텐 공작 바이페루스와 동맹을 맺고, 앵글로-색슨 족 등과 연합하여 피핀 3세에 대항했으나 2년간의 전투에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그리포는 753년 프로방스 백작 테오돈과 교전하던 중, 산 지오반니 드 모리아나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일설에는 피핀 3세의 적인 랑고바르드 왕국의 아이스톨프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 알프스산맥에서 피핀 3세가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2. 3. 바이에른 공작 즉위와 최후
747년 그리포는 탈출에 성공,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귀족들과 함께 바이에른으로 망명했다. 다른 설에는 747년 카를로만 1세가 수도원으로 은퇴한 직후 피핀 3세에 의해 석방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는 바이에른 북부의 튀링겐을 거쳐 작센으로 갔다가 다시 바이에른으로 갔다. 그는 어머니쪽 친척이자 이복 매부였던 바이에른 부족 공작 오딜로(Odilo)의 지원을 받았다.[1]오딜로는 그리포를 지원했지만 748년 1월 사망하였다. 그리포는 바이에른 공작에 추대되었다. 바이에른을 재장악하려던 피핀 3세는 군사를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 그리포를 몰아내고 오딜로의 아들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부족공으로 임명하였다. 피핀 3세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곧 그를 용서하였다. 748년 만스 백작(메인)과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고, 르망의 영주와 네우스트리아의 12개의 변경령을 받았다.
751년 11월 피핀 3세가 메로빙거 왕조의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는 피핀 3세를 상대로 다시 싸움을 재개하였다. 그는 바스코뉴로 가 아키텐 공작 바이페루스를 만나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포는 앵글로-색슨 족과, 아키텐의 공작 바이페루스 등과 동맹을 맺고 피핀과 상대하였으나 2년간의 전투 중 성과를 얻지 못했다. 753년 프로방스 백작 테오돈과 교전하던 중, 산 지오반니 드 모리아나의 전투에서 결국 살해되었다. 피핀 3세가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3. 기타
피핀 3세의 측근 게르하르투스 1세에게 파리 백작직이 돌아갔다.[1] 그리포의 자녀들의 행방은 알 수 없다.[1] 르미르몽 수도원(abbaye de Remiremont) 문서에는 그리폰과 카를이라는 두 아들이 나타난다.[1] 790년 무렵 벡상의 백작으로 있던 그리폰이 그의 후손인지는 불확실하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