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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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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산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한반도 진격 과정에서 충청도 금산을 두고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를 의미한다. 제1차 금산 전투에서는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이 곽영의 관군과 함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에 맞섰으나 고경명과 그의 아들들이 전사하며 패배했다. 제2차 금산 전투에서는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 대사의 승병이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조헌과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했다. 두 전투 모두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선군의 저항은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제2차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들의 시신은 칠백의총에 안장되어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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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전투

2. 배경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북상하며 주요 거점을 점령해 나갔다. 충청도 금산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 제6진이 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로 진로가 막히자 이곳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고, 조선군의병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집결했다.

3. 제1차 금산 전투 (1592년 음력 7월)

1592년 8월 15일(음력 7월 9일)부터 8월 16일(음력 7월 10일)까지 전라도 금산에서 벌어진 제1차 금산 전투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고경명광주에서 7000명의 의병을 일으켜 금산 탈환을 위해 북상했고,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연합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치 전투에서 권율과 교전 중이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이 소식을 듣고 금산성 방어에 나섰다.

고경명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하여 금산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조총 사격과 방어에 고전했다. 곽영의 관군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고경명과 그의 아들 고인후를 포함한 많은 의병들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의병장 유팽로, 안영도 전사하였다.

3. 1. 제1차 금산 전투의 전개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은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의병 7000명을 이끌고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1592년 8월 7일(음력 7월 1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연락해 금산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곳을 지키던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권율과의 이치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고경명의 의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중지하고 금산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고경명전라도 방어사 곽영과도 합류해 금산성을 공격했고 왜군은 조총으로 대항했다. 고경명은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와 30명의 특공조까지 편성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저녁이 되어 첫 전투가 끝나고 곽영이 철수를 하려고 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해 다음 날 다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곽영의 관군이 싸울 뜻이 없는 것을 안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곽영의 진을 공격해 곽영이 후퇴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까지 무너졌고, 고경명의 부하 유팽로와 안영이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고경명도 결국 전사했고, 아버지의 목이 일본군의 창 끝에 걸린 것을 본 둘째 아들 고인후가 나섰으나 그도 역시 전사해 창 끝에 목이 걸렸다. 전투가 종결되고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아버지와 동생의 목 없는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4. 제2차 금산 전투 (1592년 음력 8월)

고경명이 전사한 이후, 조헌은 청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금산 탈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윤선각, 권율, 곽재우 등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조헌은 700명의 의병과 영규 대사가 이끄는 600명의 승병으로 금산으로 향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헌 부대의 열세를 파악하고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조헌 부대는 분전했으나, 결국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로 의병과 승병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가 막심하여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으며, 이후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금산에 칠백의총을 만들었다.

4. 1. 제2차 금산 전투의 전개

고경명이 전사한 뒤에도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금산을 탈환하려 했으나, 왜군은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하려던 보성남평의 군대를 공격해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에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던 의병장 조헌은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군사만 축낼 것이라 하여 거절당했다. 전라도관찰사 권율경상도의 의병장 곽재우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권율은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 거절하고 곽재우도 금산 외에도 중요한 요지가 더 많다고 하여 거절했다.

결국 조헌은 혼자 출발했고 충청도관찰사 허욱이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이마저도 무시했다. 윤국형이 이끄는 관군의 방해로 1000명의 의병이 700명으로 줄었으나, 청주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의병장 이광륜이 이끌던 의병 300여 명과 영규 대사와 승병 600명이 합류해 총 1500명의 군사가 되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끄는 왜군은 조헌의 부대가 소수이며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자 퇴로를 끊고 금산성 밖 평야 지대에서 포위를 시도했다. 화살이 떨어지고 왜군과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 오자 주변 사람들이 조헌에게 피신하라고 말했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직접 북을 치며 독전하다가 아들인 조극관, 이광륜, 영규 대사의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5. 결과 및 영향

두 차례의 금산 전투는 모두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조선 관군과 의병, 승병의 끈질긴 저항은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기여했다. 2차 전투에서 전사한 700여 명은 칠백의총에 안장되어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 제6군은 이치 전투웅치 전투에 이어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의 의병, 조헌영규의 연합군과 싸우면서 큰 피해를 보았다. 결국 일본군은 음력 9월 7일 무주의 군사를 불러들이고, 음력 9월 16일 옥천으로 철수했다.

5. 1. 전투 종합 인구 손실

조선군 (고경명고인후를 포함한 의병과 승병)은 5,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일본군은 1,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6. 칠백의총



칠백의총은 제2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700명의 의병과 승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무덤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의로운 이들의 넋을 기리는 대한민국의 중요한 역사 유적지이다.

조헌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한 후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 탈환에 나섰으나, 충청도순찰사 윤선각, 전라도관찰사 권율,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조헌은 혼자 출발했고, 윤국형이 이끄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은 70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청주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이광륜이 이끌던 의병 300여 명과 영규 대사와 승병 600명이 합류하여 총 1500명의 군사가 되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끄는 왜군은 조헌의 부대가 소수이며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퇴로를 끊고 금산성 밖 평야 지대에서 포위했다. 화살이 떨어지고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에서 조헌은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직접 북을 치며 독려하다가 아들 조극관, 이광륜, 영규와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병과 승병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가 막심하여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으며, 이후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금산에 칠백의총을 만들었다.

7. 평가 및 역사적 의의

금산 전투는 비록 조선군이 패배했지만,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항전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의병과 승병들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고 조선 전체의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 탈환에 나섰으나, 이치 전투에 참전했던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고경명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하여 금산성을 공격했으나, 곽영의 관군이 후퇴하면서 의병들도 무너졌다. 결국 고경명과 그의 부하들이 전사했다.

고경명이 전사한 후, 조헌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한 경험을 바탕으로 금산 탈환을 시도했다. 조헌은 1000명의 의병을 모아 금산으로 향했고, 도중에 영규 대사가 이끄는 승병 600명이 합류하여 총 1300명의 군사를 이끌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헌 부대의 퇴로를 끊고 포위했다. 조헌은 화살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직접 불을 지휘하며 독려했지만, 결국 조헌영규 대사를 포함한 모든 의병과 승병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은 칠백의총이라는 무덤으로 기려지고 있다.

7. 1. 조선의 입장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병과 승병들이 금산 전투에서 보여준 용기와 희생정신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금산에서의 항전은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고 조선 전체의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 탈환에 나섰다. 8월 7일(음력 7월 1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금산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이치 전투에 참전했던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대가 금산성으로 복귀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고경명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하여 금산성을 공격했고, 일본군은 조총으로 대응했다. 고경명비격진천뢰와 특공대를 동원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나, 곽영의 관군이 후퇴하면서 의병들도 무너졌다. 결국 고경명과 그의 부하 유팽로, 안영이 전사했고, 고경명의 아들 고인후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고경명이 전사한 후, 조헌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한 경험을 바탕으로 금산 탈환을 시도했다. 조헌은 1000명의 의병을 모아 충청도순찰사 윤선각, 전라도관찰사 권율,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조헌은 혼자서 금산으로 향했고, 도중에 영규 대사가 이끄는 승병 600명이 합류하여 총 1300명의 군사를 이끌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헌 부대의 퇴로를 끊고 포위했다. 조헌은 화살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직접 불을 지휘하며 독려했지만, 결국 조헌영규 대사를 포함한 모든 의병과 승병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은 칠백의총이라는 무덤으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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