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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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1593년 일본군이 진주성을 재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전라도 진출을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으며, 9만 명의 대군을 투입했다. 진주성에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조선군과 민간인 7천여 명이 방어했으나, 열세한 상황 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공성탑, 거북선 등을 동원하여 공격했고, 조선군은 화살, 포탄, 횃불 등으로 저항했다.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학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전투는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논개의 순국 등 끈질긴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 진주성에는 관련 유적과 기념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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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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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전투 정보 | |
분쟁 | 제2차 진주성 전투 |
전체 | 임진왜란 |
날짜 | 1593년 7월 20일 ~ 7월 27일 |
장소 |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진주성 함락과 일본군의 후퇴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 |
조선군 지휘관 | 관군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정평구 민병 도절제 김천일 강희보 복수의병장 고종후 공조좌랑 양산숙 적개의병장 이잠 복수의병장 오빈 복수의병장 오유 의병장 민여운 의병장 황대중 성수경 |
일본군 지휘관 | 1번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 가쓰노부 나베시마 나오시게 2번대 고니시 유키나가 다테 마사무네 나가오카 다다오키 소 요시토시 3번대 우키타 히데이에 (총사령관) 이시다 미쓰나리 4번대 모리 히데모토 5번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
병력 규모 | |
조선군 병력 | 군인 6,000명, 의병 2,800명, 민간인 24,000명 |
일본군 병력 | 1번대: 25,000명 2번대: 26,000명 3번대: 18,000명 4번대: 13,000명 5번대: 8,000명 총계: 90,000명 |
사상자 | |
조선군 사상자 | 전멸 |
일본군 사상자 | 13,000명 이상 사망 (또는 20,000명 사망, 부계기문에 의하면 1594년 일본군 사절이 말하기를 그동안에 진주성 전투(1차 진주성 전투, 2차 진주성전투)에서 입은 일본군에 사망자가 3만명에 달한다고 나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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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592년 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6일간 약 30,000명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쳤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 진주대첩에 보복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10] 이듬해 1593년 계사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0,000명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명나라와 일본군이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통해 전쟁이 속히 종결되기를 원했던 조선은 사실상 협상에서 배제되었고, 조명 연합군의 추격도 멈추었다. 일본군은 이 때를 이용하여 진주성을 총공격하였다. 심유경이 공격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번 공격은 보복전의 성격으로서 태합의 명령이 절대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고니시는 조선 측에 승산이 없으니 차라리 진주성을 비워두면 일본군이 일시 점령했다가 물러갈 것이라고 심유경에게 충고까지 해주었다.[10]
진주성 안에는 수천 명의 병사만이 있었고, 90,000명이 넘는 일본군과 비교하면 전투력은 전무했다. 당시 진주 근처 대구, 남원, 상주의 명나라 군대는 다 합쳐 봐야 10,000명을 넘을 뿐이어서, 10배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명군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고 권고했으며, 곽재우와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 장수들조차 진주 근교까지 갔다가 10만 대군을 보고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여 진주를 포기했다. 하지만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방어사 황진 및 의병장들은 조정과 명군의 권고, 일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 무렵 경상도 지역 민심을 다스리던 초유사 김성일이 병으로 죽었다.
2. 1. 조선과 일본의 정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전 일본군의 함락 실패 이후 진주(晋州)를 함락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졌다.[1] 개전 이래 일본군은 조선군의 유효한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약 2개월 만에 평양, 함흥 등지까지 빠르게 진격했다. 한성(서울)을 기점으로 조선반도 각지에 전개되었던 일본군이었지만, 경상도의 부산에서 한성을 잇는 3개의 후방 기간 루트 확보나 전라도 방면에 이르는 서진 작전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조선군의 주력을 분쇄하고, 북방으로의 진격도 예상외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진주성을 공략할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때까지 진주성은 부산에서 한성으로의 침공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 않았다. 또한, 조선에서는 진주성과 평양성이 견고한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2. 2.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
진주성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일본군에게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1592년 임진년에 있었던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는 조선에게 큰 의미를 지녔으며, 일본군은 이 패배에 대한 보복과 함께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진주성을 다시 공격할 필요성을 느꼈다.[10]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있어 자연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1]3.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1592년 10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난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은 곽재우 장군의 의병 지원을 받아 30,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에 맞서 진주성을 방어했다.
3. 1. 일본군의 공격과 조선군의 방어
1593년 7월 21일, 일본군은 진주성 주변 해자를 메운 제방을 무너뜨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사무라이들은 나무 방패 아래에서 진격했으나, 조선군은 화살, 포탄, 조총으로 대응했다.[1] 일본군은 조총병의 지원 사격 아래 사다리를 설치했고, 조선군은 돌과 불타는 기름을 쏟아 부었다. 7월 22일과 23일, 일본군은 공성탑을 이용해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포격에 모두 파괴되었다.[3]7월 24일, 일본군은 "거북선"이라 불리는 철갑차를 이용해 성벽까지 접근하여 외벽의 일부 돌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성 안의 군사들이 소나무 횃불을 던져 풀에 불을 질렀고, 거북선 안의 병사들도 불에 타서 후퇴했다.[1] 7월 25일, 우키타 히데이에는 휴전 깃발 아래 김천일 장군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포로로 잡힌 1만 명의 조선 백성을 학살하겠다고 통보했다. 김천일 장군은 중국군 증원이 온다고 말하며 항복을 거부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신웨이징을 비롯한 중국 장군들은 진주성을 방어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1만 명의 조선 백성이 참수당했다.[4]
7월 27일, 일본군은 다시 "거북선"을 이용해 공격했다. 폭우로 인해 조선군은 기름에 적신 횃불을 떨어뜨려 일본군을 불태우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5] 폭우의 도움으로 일본군 공병들은 성벽의 기초를 무너뜨렸고, 사무라이들이 성에 먼저 진입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서로 밀치며 성벽을 넘었다.[5] 구로다 나가마사의 가신 고토 모토츠구는 진주성에 먼저 진입하려 했으나,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인 이다 가쿠베가 니치렌 깃발을 성벽의 틈에 꽂아 그 영광을 차지했다.[5] 조선군은 탄약과 검이 부족하여 많은 병사들이 나무 막대기를 들고 가타나를 든 사무라이의 공격에 맞섰다. 황진은 가슴에 두 발이나 맞았지만, 끝까지 싸우다가 부상으로 쓰러져 방어군의 사기를 꺾었다.[5]
서예원 장군은 오카모토 곤조라는 사무라이와 장시간 일기토를 벌였으나, 부상당한 서예원 장군이 숨을 거두자 오카모토는 카타나로 그의 목을 베었다.[5] 서예원 장군의 머리는 남강(Nam River (South Korea))에 떨어졌다.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은 사무라이에게 큰 영광이었다. 오카모토는 서예원 장군의 머리를 찾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가도록 명령했다.[5] 조선군 지휘관 김천일 장군은 자결했다.[5] 일본군은 포로를 사로잡지 않고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를 살해했다. 수천 명이 남강(Nam River (South Korea))을 건너려다 사무라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강물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5]
3. 2. 전투의 경과
1593년 7월 21일, 일본군은 진주성 주변 해자를 메운 제방을 무너뜨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사무라이들은 나무 방패 아래에서 진격했으나, 조선군은 화살, 포탄, 조총으로 대응했다.[1] 일본군은 조총병의 지원 사격 아래 사다리를 설치했고, 조선군은 돌과 불타는 기름을 쏟아 부었다. 7월 22일과 23일, 일본군은 공성탑을 이용해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포격에 파괴되었다.[3]7월 24일, 일본군은 "거북선"이라 불리는 철갑차를 이용해 성벽까지 접근하여 외벽 돌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성 안의 군사들이 소나무 횃불을 던져 풀에 불을 질렀고, 거북선 안의 병사들도 불에 타서 후퇴했다.[1] 7월 25일, 우키타는 휴전 깃발 아래 사자를 김천일 장군에게 보내 항복하지 않으면 포로로 잡힌 1만 명의 조선 백성을 학살하겠다고 통보했다. 김천일 장군은 중국군 증원이 온다고 말하며 항복을 거부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신위경을 비롯한 중국 장군들은 진주성을 방어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1만 명의 조선 백성이 참수당했다.[4]
7월 27일, 일본군은 "거북선"을 이용하여 같은 지점을 공격했다. 그러나 폭우로 인해 조선군은 기름 횃불 공격을 할 수 없었다.[5] 폭우의 도움으로 일본군 사퍼들은 성벽 기초를 무너뜨렸고, 사무라이들이 성벽을 넘었다.[5] 흑田長政의 가신 고토 모토츠구가 먼저 진주성에 진입하려 했으나,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이다 각베이가 니치렌 깃발을 성벽 틈에 꽂아 그 영광을 차지했다.[5] 조선군은 탄약과 검이 부족하여 나무 막대기로 카타나를 든 사무라이에게 맞섰다. 황진은 가슴에 두 발을 맞고도 끝까지 싸우다 부상으로 쓰러져 방어군 사기를 꺾었다.[5]
서예원 장군은 오카모토 곤죠라는 사무라이와 일기토를 벌였으나, 부상으로 숨을 거두자 오카모토는 그의 목을 베었다.[5] 서예원 장군의 머리는 남강에 떨어졌다. 오카모토는 서예원 장군의 머리를 찾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가도록 명령했다.[5] 조선군 지휘관 김천일 장군은 자결했다.[5]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를 살해했다. 수천 명이 남강을 건너려다 사무라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강물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5]
3. 3. 전투의 결과와 영향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 3대 대첩 중 하나로 기록되며,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주성 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 백성들에게 항전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조선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할 능력이 없었지만, 진주성을 지켜낸 김시민은 일본 측에서 "모크소"(목사)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았다. 진주성은 "모크소성"이라 불렸다. 그러나 일본 교토에서 "모크소관"으로 전시된 것은 김시민이 아니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임 목사 서례원의 목이었다.
4.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임진왜란 중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조선 경상도 진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조선반도 남부 확보를 기정사실화하고 진주대첩의 복수를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다.[10]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승리했지만, 조선군은 결사 항전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4. 1. 일본군의 재공격 준비
1592년 임진년 11월, 약 30,000명의 병력으로 진주대첩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호남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복수하기 위해 1593년 계사년에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한 100,000명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10] 이들은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며 진주성으로 향했다.당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고, 조선은 이 협상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협상 중에도 진주성 공격을 강행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른 보복전의 성격이 강했다.[10]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심유경에게 공격 중지를 요구받았으나, 태합의 명령이 절대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조선 측에 승산이 없으니 진주성을 비워두면 일본군이 일시 점령 후 물러갈 것이라는 충고까지 덧붙였다.[10]
일본군은 약 43,000명의 진주성 공략군을 편성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부대가 포위를 담당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는 성 축조와 거점 근무를 맡았다.
공성전 이전에 성주(星州) 일대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정은 수만의 명나라, 조선 원군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제6군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모리 히데카네는 4,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주로 향했다. 6월 13일, 유정은 자신의 부하 임호에게 명나라, 조선군 40,000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진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다치바나군과 고바야카와군은 후퇴하는 척하며 명군을 유인하여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6월 14일, 일본군은 창원에서 진격을 시작하여 함안을 거쳐 의령에 집결했다. 이빈, 권율, 선거이 등 조선군이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패배했다.[8] 6월 21일,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성용 고루를 만들며 해자의 물을 남강으로 빼는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22일부터 본격적인 포위와 공사가 시작되었고, 가토 기요마사 등 일번대와 우키타 히데이에 등 삼번대가 포위를,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부대는 후방 지원과 수송을, 모리 히데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은 한반도 남부에서 영구적인 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6월 27일, 우키타 히데이에는 항복을 권고했으나 조선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군과 조선군의 병력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 | 조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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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조선군의 상황과 전투 준비
김천일이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진주로 왔고, 황진은 700명, 최경회는 500명, 의병 복수장 고종후는 400명, 부장 장윤은 300명, 의병장 이계련은 100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은 300명, 의병장 민여운은 200여 명을 거느리고 왔다. 이들은 초유사 김성일, 목사 서예원, 김준민, 이종인 등과 진주성 사수를 논의했다.[11]1차 진주성 전투와 달리, 조선 조정은 소극적인 지원을 보였다. 함안(咸安)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한 이후, 명나라 군대는 성주(星州), 선산(善山), 남원(南原), 거창(居昌), 경주(慶州) 등지에 3만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지만, 적극적으로 진주성을 지원하지 않았다.[8]
결국 진주성에 집결한 병력은 조선군 약 7천 명과 피난민뿐이었다.
4. 3. 전투의 경과
7월 19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 기마병 200여 기가 진주성을 정찰하고 돌아갔다. 7월 20일(음력 6월 22일) 첫 교전이 벌어져 일본군 30여 명을 사살하자 퇴각했으나, 초저녁과 밤에 다시 공격해왔다. 조선군은 남강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하고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채웠지만, 일본군은 흙으로 해자를 메워 길을 만들었다.7월 21일(음력 6월 23일) 낮에 3회, 밤에 4회 공격이 있었고, 24일에는 일본군 증원군 1,000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 포위했다. 7월 23일(음력 6월 25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 언덕을 쌓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황진은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아 맞섰고, 낮과 밤의 공격을 모두 격퇴했다.
7월 24일(음력 6월 26일) 일본군은 방책으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며 화전 공격으로 성내 초가집을 불태우고, 항복을 재촉하는 문서를 보냈다. 이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했으나, 김성일이 병사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7일) 일본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 언덕을 쌓고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 사격을 가해 조선군 300여 명을 사살했다. 철갑을 두른 사륜거(장갑차)를 끌고 와 철퇴로 성문을 뚫으려 했으나, 이종인이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횃불을 던져 격퇴했다.
7월 26일(음력 6월 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적이 성을 뚫으려 했으나 힘겹게 방어했다. 1,000여 명의 적이 사망했고, 황진도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황진의 죽음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7월 27일(음력 6월 29일) 일본군은 거북선을 이용해 공격했고, 폭우로 인해 조선군은 기름 횃불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폭우 속에서 일본군은 성벽의 기초를 무너뜨렸고, 흑田長政의 가신 고토 모토츠구가 먼저 진입하려 했으나,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이다 각베이가 니치렌 깃발을 성벽 틈에 꽂아 그 영광을 차지했다.[5] 조선군은 탄약과 무기가 부족해 나무 막대기로 카타나를 든 일본군에 맞섰다. 황진은 가슴에 두 발의 총상을 입고도 끝까지 싸우다 쓰러졌다.[5]
서예원 장군은 오카모토 곤죠라는 사무라이와 장시간 일기토를 벌였으나, 부상으로 숨을 거두자 오카모토는 카타나로 그의 목을 베었다.[5] 서예원 장군의 머리는 남강에 떨어졌고, 오카모토는 그의 머리를 찾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가도록 명령했다.[5] 조선군 지휘관 김천일 장군은 자결했다.[5]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 살해했고, 남강을 건너려던 수천 명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해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5]
4. 4. 전투의 결과와 참상
7월 27일(음력 6월 29일) 황진이 전사한 후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여 최경회가 파직시키고 장윤에게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비가 내려 동문 성벽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밀려왔고, 활과 화살이 부족하여 육박전이 벌어졌다. 김천일은 진주 촉석루에서 항전하다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고, 최경회 등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5]조선측 기록에는 사망자가 60,000명, 일본측 기록에는 30,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어느 쪽이든 당시 진주성에 있던 조선 군인 및 민간인들은 거의 모두 전멸하였다.[5] 이 전투로 김천일을 비롯한 전라도 의병 지도부가 전멸하여 의병이 와해되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만 하고 전라도로 진격하지 않고 동쪽으로 돌아갔다.[7]
조선 조정은 음력 7월 15일 명군의 송응창과 이여송에게 진주성 구원을 요청했으나,[12] 이미 진주성이 함락되고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다음날인 음력 7월 16일, 진주성 함락 소식이 조정에 도착했다.[13]
장흥부사 유희선이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남해안으로 도망가 일본군이 쳐들어온다고 소문을 퍼뜨리자, 순천, 광양 백성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 사태는 전라도 남해안 전체로 확산되었고, 유희선은 이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14]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책임 소재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은 김천일의 재주 없음을 비난했고,[15] 안방준은 류성룡을 비난했다.[16] 이러한 논쟁은 서인과 남인의 당파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를 살해했다. 수천 명이 남강(Nam River (South Korea))을 건너려다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해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5] 일본 장군들은 진주 기생들을 살려 노역에 동원하고, 촉석루에서 승전 축하연을 열었다.[5] 논개는 게야무라 로쿠노스케를 유혹하여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순국하여 국민 영웅이 되었다.[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는 점에 만족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으면서까지 도시를 함락한 것은 낭비였다는 평가도 있다.[7] 가토 기요마사 가문의 기록에는 "모든 중국군은 우리 일본도에 겁을 먹고 강에 뛰어들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끌어올려 목을 베었다."라고 적혀 있다.[5] 한국 기록에는 진주에서 6만 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일본 기록에는 승리 후 2만 개의 목을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5]
5. 전투 이후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하여 7월 5일에는 구례, 7일에는 곡성에 진출했으나, 남원 방어가 견고하여 9일에는 진주성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영구 주둔을 위해 조선 남부에 거점 축성을 시작했고, 진주성은 후퇴 시 파괴되었다.
『문주소가보』에 따르면 1593년 9월 2일(음력), 문주소통경, 문주소정백 형제는 소하가수포의 선봉으로 명나라 유경과 진주성 서남쪽 20km 지점인 하동군에서 조우하여 수백 명이 전사했다. 종무는 패한 소하가군을 구원하고자 유경과 대결했고, 유경은 패하여 진주성으로 돌아갔다.[9]
5. 1.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는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진주성 안에 있던 조선군과 민간인들은 거의 모두 전멸했으며, 사망자는 조선 측 기록에 따르면 6만 명,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3만 명에 달했다.[5] 이 전투로 전라도 의병은 김천일을 비롯한 지도부가 한 번에 사라져 와해되었다.[12]진주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도 남해안 일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장흥부사 유희선이 남해안으로 도망가 일본군이 쳐들어온다고 소문을 퍼뜨리면서 공황 상태에 빠진 순천, 광양 백성들이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전라도 남해안 전체로 확산되었고, 유희선은 이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14]
조선 조정에서는 전투 패배의 책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은 김천일의 능력을 비판했고,[15] 안방준은 류성룡을 비난했다.[16] 이러한 논쟁은 당시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과도 관련이 있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한 후, 진주 기생들을 살려 노역에 동원했다. 그들은 승전을 자축하며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기생 논개는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노스케를 유혹하여 절벽 아래로 함께 떨어져 죽음으로써 국민 영웅이 되었다.[6]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로 진격하지 않고 부산으로 후퇴했다.[7] 일본 기록에 따르면, 승리 후 2만 명의 목을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5]
5. 2. 역사적 평가와 의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참혹함과 조선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이 전투는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승전을 자축하며 연회를 열었다.[5] 이때 기생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노스케를 유인하여 함께 절벽 아래로 투신, 순국함으로써 한국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진주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는 점에 만족했지만,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l)은 상징적인 이유로 그렇게 많은 병사를 잃으면서까지 도시를 함락한 것은 낭비였다고 주장했다.[7]
한국 기록에는 진주에서 6만 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5] 일본 기록에 따르면, 승리 후 2만 구의 목을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5]
6. 유적과 기념물
제2차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유적과 기념물은 다음과 같다.
- '''진주성''': 1592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과 1593년 계사년에 순국한 7만여 명의 군사와 백성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다. 1686년(숙종 12년) 건립된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순국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17] 1987년에는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건립되었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제1호인 김시민 장군 전공비가 있다.
- '''창열사''': 진주성에서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았다.[17]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모셨다.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린다.
- '''논개와 의암''': 최경회의 후처였던 논개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최경회가 순국하자, 진주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던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함께 남강에 떨어져 순국했다.[17] 1625년 진주 백성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1739년(영조 16년) 의기사가 세워져 논개를 추모하고 있다.
6. 1. 진주성


진주성에는 1592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기리고, 다음 해인 1593년 계사년에 순국한 백성과 군사 7만여 명을 위로하기 위해 1686년(숙종 12년)에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를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오는 삼장사(三壯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를 가리킨다.[17] (실록에는 이노 등도 언급됨) 비문에는 이들과 순국한 민관군 7만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촉석루 동쪽에 旋忠壇(정충단)과 정충단비를 함께 세웠다고 적혀 있다.
1987년에는 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임진대첩계사순의단)을 만들었다. 촉석루 맞은편에 설치된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아래에는 호국의 종을 비롯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제1호인 김시민 장군 전공비가 나란히 있다.
6. 2. 창열사
경상도관찰사 정사호는 진주성에서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창열사를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17]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창의사 김천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6. 3. 논개와 의암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제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성안에서 전투를 지원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17]
1625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진주 백성들의 뜻에 따라 정대융이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1739년(영조 16년) 의기사가 세워져 논개는 의로운 인물로 추모받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日本戦史・朝鮮役』 (本編・附記)
[9]
서적
『問註所家譜』
[10]
실록
선조실록
1593-07-10
[11]
웹인용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8-12-05
[12]
실록
선조실록
1593-07-15
[13]
실록
선조실록
1593-07-16
[14]
실록
선조실록
1593-09-06
[15]
서적
징비록
[16]
서적
진주서사
[17]
웹인용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http://www.idomin.co[...]
경남도민일보
200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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