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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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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홍의장군으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했으나,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켜 게릴라 전술로 왜군을 물리치고, 정암진 대첩에서 승리하여 호남 진격을 막는 데 기여했다. 이후에도 정유재란에서 활약하고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했으며, 사후 충익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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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곽재우 장군상
한글곽재우
한자郭再祐
로마자 표기Gwak Jae-u
별명홍의장군, 천강홍의장군
개인 정보
출생일1552년
출생지조선 경상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사망일1617년 (향년 66세)
사망지조선 경상도 영산현 청암진(現 대한민국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에서 병사(아사)
본관현풍 곽씨
가족 관계
배우자상산 김씨 부인
자녀아들 곽영, 아들 곽활, 딸 현풍 곽씨
부모아버지 곽월, 어머니 진주강씨, 계모 허씨
친인척처외조부 조식, 동서 김우옹, 사위 성이도
관직 정보
경력의병장, 무관
정당동인 성향 북인 후예
직책조선군 경상좌도방어사
임기1597년 ~ 1598년
주군선조
군사 정보
복무조선군
복무 기간1592년 ~ 1613년
최종 계급종2품 병마절도사
소속조선 육군
지휘조선 의병
참전임진왜란, 정유재란
기타 정보
종교유교(성리학)
거주지조선 경상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2. 생애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군 세간촌에서 곽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젊은 시절 과거 시험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게릴라전을 펼쳐 일본군을 공격했다. 미끼 부대 전술을 사용하여 안국사 혜경 군을 격퇴하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복병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명성을 높였다. 붉은 비단 군복을 입고 싸워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 후에는 관직을 거부하고 영창대군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2. 1. 생애 초반

곽재우는 양반 출신으로, 경상남도 의령군 세간촌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곽월이며,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논술 내용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많아 관직을 얻지 못했다.[3] 이후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평생 은거하기로 결심했다.[4]

2. 1. 1. 출생과 가계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 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 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친형제로는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과 누이 1명이 있었고, 계모 허씨에게서는 이복동생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와 이복 누이 1명이 더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 1117 - 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 중 한 명으로 고려에 귀화하였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5대조 곽안방(郭安邦)은 세조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냈고, 1467년(세조 12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여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세조 대의 청백리였다. 고조부 곽승화(郭承華)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으나 진사였고, 할아버지 곽지번이 성균관사성에 올라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양반 출신으로, 34세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그의 논술 내용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많아 관직을 얻지 못했다.[3] 그 후 그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평생 은거하기로 결심했다.[4] 경상남도를 흐르는 남강에 있는 의령군 세간촌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곽월의 셋째 아들이었고,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젊은 시절 과거 시험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2. 1. 2. 수학과 소년기

일찍이 생모 진주 강씨를 여의고 아버지 곽월은 허씨와 재혼하였다. 곽재우는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후에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13]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조식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가 쓰던 칼


그 뒤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14] 그는 북인 당원이었으나 비주류였던 탓에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고 혹평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585년(선조 18년) 과거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어 낙방되고 만다.[15]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낚시를 하며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조식의 문하생들이 대부분 김효원이 한때 조식의 문하에 있었던 인연으로 동인(東人)에 가담하면서 그도 동인의 당인이 되었다가 동인북인(北人-남명학파,경상우도)과 남인(南人-퇴계학파,경상좌도)으로 분당될 때는 북인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과 북인 내부의 내분을 못마땅히 여기던 그는 이산해 등 다른 북인 당원들을 피하거나 일부러 멀리하였다.

그는 고향인 의령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근검절약했는데,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14] 경상남도 의령군 세간촌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곽월의 셋째 아들이며,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젊은 시절 과거 시험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2. 1. 3. 과거 시험과 좌절

곽재우는 양반 출신으로 34세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그의 논술 내용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많아 관직을 얻지 못했다.[3] 이후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평생 은거하기로 결심했다.[4]

2. 2. 임진왜란기 의병장 활동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관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곽재우는 6월 1일(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홍의)을 입고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힌 깃발을 내걸고, 2천 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의령, 창녕 등지의 산악 지형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물리치고,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했다. 또한 일본군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고,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에 기여했다. 곽재우는 붉은 비단 군복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3]

1592년 5월 곽재우는 함안군을 함락시키고 정암진 도하 작전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붉은 비단옷을 입고 선두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자처하며 기습과 매복 작전을 성공시켜 관군도 이기지 못한 일본군을 격파하며 이름을 알렸다.

곽재우는 낙동강 일대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교란하는 게릴라전을 펼쳤고, 의령 전투에서 조선군 최초의 육상 승리를 이끌었다. 안국사혜경이 이끄는 일본군 제6사단이 남강을 건너려 하자, 곽재우는 말뚝을 깊은 곳으로 옮기는 계략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의령 공격을 포기하게 했다. 이러한 공으로 곽재우는 의령과 인근 삼가 일대의 조선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의병과 조선 정부 및 관군과의 관계는 의병장의 계층이나 사상에 따라 달랐지만, 초기에는 양측이 대립하기도 했다. 곽재우 의병 역시 처음에는 반란군으로 간주되어 조선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2. 2. 1. 의병 봉기와 초기 전투

1592년(선조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자(임진왜란),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3] 곽재우는 임진왜란 시기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그는 의령에서 일족과 촌민 등 50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했다.[10]

일본군은 15만 8800명의 병력을 9개 부대로 나누어 침략했다. 이 중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함안을 거쳐 남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출하려 했다. 곽재우는 정암진 부근 남강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이곳에서 매복 작전을 펼쳤다. 곽재우는 병사들을 정암진 언덕에 매복시키고, 날랜 병사들로 하여금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하여 화살 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 정찰대가 늪지대를 피하기 위해 만든 표식을 밤에 늪지로 옮겨 꽂아 왜군을 유인하여 공격, 격퇴하였다.

이 정암진 대첩으로 왜 제6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아 전라도를 보전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왜란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이 육지로부터의 왜군 공격 없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승리의 영향이었다. 곽재우는 낙동강과 남강의 갈대밭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쳐 일본군의 보급선을 교란했다.

안국사혜경이 이끄는 일본군 제6사단은 남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격하려 했다. 곽재우는 일본군이 강을 건너기 위해 얕은 곳에 표시한 말뚝을 깊은 곳으로 옮겨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의령 전투는 조선군 최초의 육상 승리였다.

이러한 공으로 곽재우는 의령과 인근 삼가 일대의 조선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관군의 패배와 곽재우의 승리가 자주 비교되면서 그를 시기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의 갈등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되기도 했으나, 김성일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16] 이후 조정에서는 곽재우의 공을 높이 사 유곡도찰방을 거쳐 형조정랑에 임명했다.[16]

2. 2. 2. 정암진 대첩

임진왜란 당시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위해 함안을 거쳐 의령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들은 정암진 나루를 건너려 했는데, 곽재우는 이 지역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곽재우는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벼슬을 포기하고 정암진 부근 남강에서 낚시를 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정암진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날랜 병사들로 하여금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하여 화살 공격으로 전멸시켰다.[3]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대임을 파악하고 통과 가능한 지점에 표식을 만들었다. 곽재우는 이를 지켜보다가 밤에 표식을 늪지로 옮겨 꽂았다. 다음날 왜군은 잘못된 표식을 따라 늪지에 빠졌고, 곽재우는 매복한 병사들을 시켜 기습 공격하여 왜군을 몰살시켰다.

이 정암진 대첩은 관군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아 전라도를 보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전라 좌수영이 육지로부터의 왜군 공격 없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결국, 정암진 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가능하게 한 연쇄적인 승리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왜군의 보급로는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가는 해로와 경상도 내륙 낙동강을 통한 병참선 두 가지만 남게 되었다. 이 중 해로는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차단되었고, 낙동강 병참선은 곽재우를 비롯한 영남 의병들에 의해 차단되어 북상한 왜군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결국 재정비된 관군과 명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임진왜란의 패인을 전라도 함락 실패로 보고 전라도를 통해 북상하는 데 총공세를 펼쳤다.

2. 2. 3. 관군과의 갈등과 협력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자, 곽재우는 경상도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3] 곽재우는 낙동강 일대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을 펼쳤고, 의령 전투에서 조선군 최초의 육상 승리를 거두었다.[3] 안국사혜경이 이끄는 일본군 제6사단이 남강을 건너려 하자, 곽재우는 말뚝을 깊은 곳으로 옮기는 계략을 써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의령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로 조선 정부는 곽재우의 능력을 인정하여 의령과 인근 삼가 일대의 조선군 지휘를 맡겼다.

일본군의 맹공에 조선 정규군이 마을을 포기하고 퇴각한 후, 곽재우는 임진왜란 발발 9일 후에 일족과 촌민 등 50명을 모아 의령 마을 방위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군이었다.

일본군 3번대가 창원시에서 상주시로 향하자,[10] 곽재우는 버려진 정부 창고에서 보급 물자를 얻었지만, 경상도 순찰사 김수는 곽재우를 모반인으로 간주하고 해산을 명했다.[10] 곽재우가 다른 지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왕에게 직접 호소문을 보내자, 김수는 곽재우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수도에서 온 관리가 곽재우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김수로부터 구했다. 이후 곽재우는 낙동강남강의 높은 갈대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임진왜란 초기, 의병과 조선 정부·관군과의 관계는 의병장의 계층이나 사상에 따라 다양했지만, 초기에는 양측이 대립했다.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도 처음에는 반란군으로 간주되어 조선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2. 3. 정유재란과 이후 활동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위험이 커지자, 조선 조정은 곽재우를 경상좌도 방어사에 임명했다. 곽재우는 정유재란에 대비하여 화왕산성과 현풍 석문산성을 쌓아 왜군의 북진을 막는 전략을 세웠다.[18] 가토 기요마사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왜 우군 6만 대군이 경상도로 북상하자, 곽재우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2000여 명의 의병 및 승병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웠고, 결국 왜군은 화왕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는 좌군과 합류했다.[19] 곽재우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 우군을 막아 정유재란 시 왜 우군의 북상로에 있던 모든 읍성을 보전하였으며, 정암진 전투와 더불어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전쟁 중 계모 김해 허씨가 사망하여 3년상을 치렀고, 전란이 끝난 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히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상좌병사로 부임 직후 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으나, 왕이 거절하자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어부 생활을 하였다.

1599년(선조 30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사퇴하였다. 같은 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상중이었으므로 부임을 미루었다. 1600년(선조 33년) 2월 일본과 화친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고, 같은 해 봄, 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으나, 사헌부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유배된 지 2년 만에 풀려났다.

1602년 고향에 돌아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낙동강변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
망우정 현판 (1602년 곽재우 친필)
1604년(선조 37년) 찰리사로 재직 중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고,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8월 인동 현감으로 나갔다가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가선대부 행용양위 상호군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1605년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같은 해 3월 한성부 우윤이 되고, 5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3월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돌아왔으며,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 곽재우는 16살 위인 의병대장-영의정 정인홍을 존경했고, 정인홍도 곽재우를 챙겼다. 정인홍은 1602년, 1612년, 1615년에 걸쳐 곽재우를 수군통제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광해군 즉위 초 곽재우는 경상우도조방장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나올 것을 간청하여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여 부임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 처리에 대해, 곽재우는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21]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거나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창암강사에서 은거 중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2. 3. 1. 화왕산성 전투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위험이 커지자, 조선 조정은 곽재우를 경상좌도 방어사에 임명했다. 곽재우는 왜군의 재침에 대비해 1차적으로 창녕 화왕산성, 2차적으로 현풍 석문산성을 쌓아 왜군의 북진을 막는다는 전략을 세웠다.[18] 부산 동래에서 출발하여 김해평야, 창원 대산평야, 밀양 하남평야를 거쳐 올라오는 왜 우군을 화왕산성에서 1차 저지하고, 실패하면 석문산성에서 2차 저지하여 경상도를 통한 북상을 막는 전략이었다.

곽재우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고, 그의 매제(성천조)의 형인 임진왜란 의병장 성천희, 사촌형 곽재겸 등은 창녕 화왕산성을 증축하였다. 화왕산성 축조가 지체되자 성천희가 직접 비변사에 도움을 청해 왜군 재침 전에 완성되었다.[19]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12만 대군을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전라도, 우군은 경상도를 통해 북상하려 했다. 석문산성이 완공되기 전, 가토 기요마사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왜 우군 6만 대군이 경상도로 북상하자, 곽재우는 화왕산성으로 옮겨 결전을 대비했다.

곽재우는 방어사 곽재우, 종사관 성안의, 조방장 이영, 조전장(장웅기(창녕현감), 전제(영산현감), 신초(현풍현감), 이숙, 성정국, 신방로, 김충민)와 990명의 의병, 그리고 영산 보림사 스님들을 비롯한 승병 1000여 명 등 총 2000여 명의 의병 및 승병과 함께 화왕산성을 거점으로 왜 우군에 맞섰다. 읍성이 아닌 산성을 택한 것은, 화왕산이 높이 756m로 창녕 쪽에서 매우 가파른 지형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곽재우는 산성이 함락되면 불을 질러 모두 죽겠다는 결의로 전투에 임했다.

왜군은 처음 화왕산성 창녕 쪽에서 전면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완만한 밀양 쪽으로 돌아 공격했다. 그러나 결국 화왕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는 좌군과 합류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산성을 지키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었고, "곽재우가 지킨다"라는 답을 듣고 군사를 돌렸다고 한다.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 우군을 막음으로써 정유재란 시 왜 우군의 북상로에 있던 모든 읍성이 보전되었다. 곽재우는 정암진 전투에서 왜 6군 1만 5700명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 우군 6만 명의 경상도를 통한 북상을 막는 큰 공을 세웠다.

2. 3. 2. 종전 이후

1597년 전쟁 중 계모 김해 허씨가 사망하여 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치렀다. 상중에 전란은 종결되었고, 전란이 끝난 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히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경상좌병사로 부임 직후 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으나, 왕이 거절하자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 생활을 하였다.

1599년(선조 30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사퇴하였다. 같은 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1개월간 지체하여 10월에 부임하였다. 1600년(선조 33년) 2월 일본과 화친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하였다. 같은 해 봄, 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으나, 사헌부 등으로부터 함부로 사퇴하였다는 이유와 부임을 지체한 점 등을 구실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유배된 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고향에 돌아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녕 창암진 솥바위나루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 선조로부터 거듭 출사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년) 초 찰리사가 되었다. 찰리사로 재직 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다. 그해 5월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에서 사직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8월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가선대부 행용양위 상호군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1605년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같은 해 3월 한성부 우윤이 되고, 5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3월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말 사헌부로부터 음식을 끊고 도술과 수련에 전념한다는 점을 이유로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돌아왔으며,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곽재우는 16살 위인 의병대장-영의정 정인홍을 존경했고, 정인홍도 곽재우를 살뜰하게 챙겼다. 1602년(선조 35년) 4월 12일, 정인홍은 고향 합천에서 대사헌(종2품) 직책으로 상경하여 선조에게 이순신이 맡았던 종2품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곽재우를 임명하도록 건의했다. 1612년(광해 4년) 11월 1일, 우의정 정인홍은 합천에서 상경하여 1602년에 이어 다시 광해에게 곽재우를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도록 건의했고, 광해는 1613년(광해 5년) 4월 16일 곽재우를 종2품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임명했으나 곽재우는 직책을 받지 않았다. 1615년(광해 7년) 11월 12일, 80세 정인홍은 좌의정 신분으로 상경하여 41세 광해에게 64세 곽재우를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水軍)의 전함과 병기를 튼실하게 하여 남쪽 변방(바다)을 지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정인홍은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어 곽재우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아본 것이다.

광해군 즉위 초 곽재우는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 번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호분위부호군, 호분위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여 부임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 처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인홍의 건의로 1613년 4월 16일 종2품 전라병사에 제수됐지만 부임을 거부하고 있는) 곽재우가 전라병사를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난 날 역적 이진(임해군)이 스스로 반역을 하였기 때문에 신(곽재우) 역시 소를 올려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의(영창대군)는 무슨 지각이 있기에 반역의 죄를 준단 말입니까. 온 조정의 사람들이 이의를 처벌하자고 떠들어대면서 전하(광해)를 불의에 빠뜨리고 있으므로 신은 감히 반열(전라병사)에 나가지 못하겠습니다[臣不敢就列]하였는데, (상이) 상소를 안에 두고 하달하지 않았다. 상(광해)이 비록 그 사람(곽재우)을 중히 여겨 죄를 주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다른 의논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상이) (폐서인돼 궁궐에 있는) 이의를 (1613년 6월 21일 어염집에) 내보내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로부터 대신들이 자못 이의를 (죽이라고) 논하였던 것을 후회하였고, 정인홍도 이의(異意)를 제기하고자 누차 말을 바꾸었는데[鄭仁弘亦欲持異 屢變其說], 정온(鄭蘊)의 의논(이의를 살려야 한다)이 사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鄭蘊之論 實始此]. 그러나 오직 이이첨만은 이를 갈며 (영창대군 李㼁를) 죽이려고 하였다[惟李爾瞻等 切齒欲殺之]." (광해군일기 5년 1613년 6월 21일)

1613년(광해군 5년) 4월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북 계열에 의해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 5월 사직 상소와 함께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21]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거나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창암강사에서 은거 중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3. 사후

그 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이순신과 죄없는 김덕령이 죽은 일 등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의 고위 무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다 1617년 망우정에서 사망하였다.[22]

글씨도 잘 썼는데 필체가 웅건하고 굵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6월 1일(음력 4월 28일) 광해군의 명으로 장례비와 장례물품이 조정에서 지급되었고[23] 바로 예관을 파견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예조좌랑 유약(柳瀹)을 파견하여 장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24] 사망 당시 향년 66세였다.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고 훗날 그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광해군이 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으며, 시호는 한참 후대에 추증되었는데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

묘는 경상남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시호는 충익공이다.

현재 대한민국 의령군에서는 곽재우 등을 기리는 '''의병제'''가 있으며, 교외에는 '''의병공원'''도 있다.

4. 저서 및 유품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 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5. 평가와 의의

곽재우는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 과거에 합격하고도 낙방하여 관직 진출을 단념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4월, 조선 관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하고 백성들과 동료 양반들이 피난했음에도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고, 관군을 섬멸하고 올라온 왜군을 여러 차례 신출귀몰하게 물리친 점이 높이 평가된다.[10][11]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었고, 훗날 그 규모가 확장되어 광해군이 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의 활약은 조선이 왜군에 맞서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게릴라전을 펼치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복병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뛰어난 전술을 보여주었다.[10][11] 이러한 공로로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의병과 조선 정부·관군과의 관계는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 의병장들은 대부분 양반 출신이었지만, 휘하 병사들은 신분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 노비, 천민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곽재우의 의병 역시 처음에는 반란군으로 간주되기도 했다.[11]

전쟁이 끝난 후, 의병장들은 당파 간 정쟁에 휘말려 불우한 생애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곽재우 역시 관직을 거부하고 낙향했으며, 영창대군의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벼슬을 버려야 했다.[12]

다음은 성이도(成以道)가 지은 곽재우 추모글의 일부이다.

淑氣鍾天東 (숙기종천동) 맑은 기운이 하늘 동쪽에 모여


斯人四海雄 (사인사해웅) 이 분이 나셨으니, 천하(四海)의 영웅이었다.


磊落器度遠 (뇌락기도원) 활달하고 거침 없는 도량은 원대하였으며


傑魁容貌充 (걸괴용모충) 걸출한 용모는 충만하였다.


(중략)


先壟餘隙地 (선롱여극지) 선산 남은 틈새 땅에


今日卜玄宮 (금일복현궁) 오늘 무덤자리(玄宮)를 정하였다.


題輓哀永訣 (제만애영결) 이 만사를 쓰며 영결을 슬퍼하니


回首不勝恫 (회수불승통) 고개를 돌려도 이 슬픔을 견딜 수 없다.|음차중국어

위 글에서 언급된 곽재우와 관련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임금을 비판한 답안지로 인해 합격이 취소된 후 벼슬에 뜻을 버렸다.[11]
  • 동래성 함락 후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관군이 전멸하는 등 조선군이 낙동강남강 방어에 실패했다.
  • 정암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기강 전투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 경상우도를 보전하고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았다.
  • 임진왜란 중 의병 활동으로 가산을 소진하였다.
  • 임금이 계속 관직을 내렸으나, 신하의 예의로 잠시 관직에 나갔었다.
  • 광해군이 여진족(후금) 침략에 대비해 곽재우를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가에 은거하였다.


곽재우는 1995년 12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12]

6. 관련 문화재

보물 제671호로 지정된 곽재우 유물 일괄경상남도 의령군에 있으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보물 제671-1호 - 곽재우 유물 일괄-장검
  • 보물 제671-2호 - 곽재우 유물 일괄-마구
  • 보물 제671-3호 - 곽재우 유물 일괄-포도연
  • 보물 제671-4호 - 곽재우 유물 일괄-사자철인
  • 보물 제671-5호 - 곽재우 유물 일괄-화초문백지팔각대접
  • 보물 제671-6호 - 곽재우 유물일괄 - 갓끈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인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는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의령 보덕각은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에 있다.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었고, 이후 규모가 확장되어 광해군이 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다. 1709년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6]

대구 만구공원에는 곽재우의 동상이 있으며,[6] 의령군에는 곽재우와 그의 부하 17명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가 있다. 곽재우의 묘는 경상남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곽위(郭瑋)
할아버지곽지번(郭之藩)
할머니허씨
아버지곽월(郭越, 1518년 ~ 1586년 8월 6일)
어머니진주 강씨
계모김해 허씨(金海許氏)
숙부곽규(郭赳, 1521년 - 1584년)
부인상주 김씨(尙州金氏)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
누나현풍 곽씨 (김해 허씨 허언심(許彦深)에게 출가)
여동생현풍 곽씨 (창녕 성씨 성천조(成天祚)에게 출가)
이복 동생곽재지(郭再祉)
이복 동생곽재기(郭再祺, 1573년1649년)
이복 여동생현풍 곽씨(玄風郭氏)
아들곽영(郭濚)
아들곽활(郭活)
창녕 성씨 성이도(成以道)에게 출가


8. 기타

1985년부터 1986년까지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에서는 배우 이동신이 곽재우 역을 연기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최효상이, 2004년부터 2005년까지 KBS1에서 방영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이종박이, 2015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임혁이 곽재우 역을 맡았다.[4]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었고, 훗날 규모가 확장되었다. 광해군이 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4]

묘는 경상남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시호는 충익공이다.[4]

현재 대한민국 의령군에서는 곽재우 등을 기리는 '''의병제'''가 있으며, 교외에는 '''의병공원'''도 있다.[4]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곽재우 장군 의병 깃발을 높이 들다 http://www.ohmynews.[...] 2021-03-17
[3] 서적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005
[4] 웹사이트 곽재우 https://terms.naver.[...] 2021-06-06
[5] 서적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005
[6] 웹사이트 Mangu Park http://www.yu.ac.kr/[...] 2006-08-09
[7] 서적 秀吉の野望と誤算 文禄・慶長の役と関ヶ原合戦 文英堂 2000-06
[8] 서적 文禄・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02
[9] 웹사이트 (59)현풍 곽씨(玄風郭氏.포산)-140,283명 http://www.seoulecon[...] 2024-06-07
[10] 서적 2002
[11] 서적 2002
[12] 서적 秀吉の朝鮮侵略と義兵闘争 彩流社
[13] 문서
[14] 문서 《광해군일기》 권114, 광해군 9년(1617년) 4월 27일(신유) 13번째 기사, 전 한성부 좌윤 곽재우의 졸기
[15] 문서 《망우집》 〈연보〉 만력 13년(1585)조 및 배대유 〈망우선생전〉
[16] 문서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8일(병진) 4번째 기사 및 8월 18일(을사) 3번째 기사; 곽재우, 《망우집》 권1, 잡저, 창의시자명소(倡義時自明䟽)·상초유사서(上招諭使書)·답초유사서(答招諭使書); 김성일, 《학봉집》 권3, 곽재우(郭再祐)를 신구(伸救)하는 서장(書狀)(1592); 권4,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에게 보내는 편지; 이현일, 《갈암집》 권29, 가선대부 행 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 병마절도사 함흥부윤 망우당 곽 공 시장
[17] 문서 《선조수정실록》 선조 29년(1596) 8월 1일(병신) 1번째 기사; 송병선, 《연재집》 권33, 충용장군 증 좌찬성 김 공 덕령 묘갈명
[18] 문서 김도화, 《척암집》 권21, 증 형조참의 창녕 성 공 천희 묘갈명
[19] 문서 《선조실록》 권82, 선조 29년(1596년) 11월 20일(임자) 2번째 기사
[20] 문서 선조실록 122권, 선조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2월 29일(계묘) 1번째기사 "사간원에서 경상 좌수사 곽재우를 추국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21] 문서 《망우집》 〈연보〉 만력 41년(1613) 5월조; 권2, 소(疏), 구영창대군소(救永昌大君疏)
[22] 문서 《망우집》 〈연보〉 만력 45년(1617) 4월 10일조
[23] 문서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4월 28일(임술) 3번째 기사
[24] 문서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6월 4일(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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