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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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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 애종은 금 선종의 셋째 아들로, 1224년 선종의 붕어에 따라 황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수도를 개봉부에서 채주로 옮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몽골과 남송의 공격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1234년 채주가 포위되자 완안승린에게 양위하고 자결했다. 그의 유해는 몽골과 남송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금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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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미지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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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어 병음Jīn Āizōng
로마자 표기Jin Aijong
별칭녕갑속
간체자宁甲速
병음Níngjiǎsù
다른 이름완안수서
간체자完颜守绪
병음Wányán Shǒuxù
다른 이름완안수례
간체자完颜守礼
병음Wányán Shóulǐ
신상 정보
아버지금 선종
어머니명혜황후
배우자도단황후
출생일1198년 9월 25일
사망일1234년 2월 9일
사망 장소채주 (현재의 루난 현, 허난 성, 중국)
통치 정보
왕조금나라
즉위1224년 1월 15일
퇴위1234년 2월 9일
이전 통치자금 선종
이후 통치자금 말제
연호정대: 1224년–1232년
개흥: 1232년
천흥: 1232년–1234년
묘호애종 (공식), 장종 (사적), 민종 (사적), 의종 (사적)
시호장황제, 민황제
가문완안
기타 정보
완안 영갑속, 완안 수례 (후에 완안 수서)
능묘덕릉

2. 생애

닝자수는 선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선종의 후궁인 왕씨(王氏)이며 사후 명혜황후(明惠皇后)로 추존되었다. 선종이 황위에 오른 후 닝자수는 수왕(遂王)에 봉해졌다. 정우 4년(1216년) 황태자였던 맏형 수충과 그 아들 완안갱이 요절하자, 닝자수는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추밀사에 임명되었다. 닝자수는 스스로 수서(守緒)라는 한화된 이름을 선택했다. 원광 2년 12월(1224년 1월), 선종이 붕어하자 닝자수가 황위에 올랐다.

당시 금나라 북부 영토는 몽골 제국에 빼앗겼고, 도읍도 몽골군을 피해 개봉부로 옮겨진 상태였다. 금나라는 서하와의 동맹에서 활로를 찾으려 했지만, 정대 4년(1227년) 서하가 멸망하자 다시 몽골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애종은 옥에 갇혀 있던 완안진화상을 석방시켜 군무에 복귀시켰고, 완안진화상의 활약으로 한때 몽골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대 8년(1231년) 금나라 군의 거점 하중부가 함락되었고, 천흥 원년(1232년)에는 도성 개봉부가 몽골군에 포위되었다(개봉 공방전).

1232년 삼봉산 전투에서 완안진화상이 전사하고 몽골 제국이 대승하면서 금나라의 쇠퇴는 결정적이었다. 금나라는 몽골군에 화의를 제안했지만, 동생 톨루이를 잃은 오고타이 칸은 애종을 원수로 여기고 교섭을 거부했다. 천흥 2년(1233년) 애종은 개봉부를 탈출, 귀덕부, 박주, 채주로 도망쳤지만, 몽골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천흥 3년(1234년) 몽골군과 남송군에 의해 채주성이 포위되자(채주 전투), 애종은 군 통솔자였던 완안씨 방계 호돈(말제)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스스로 교살했다.

애종 사후 반나절 만에 몽골-남송 연합군 공격으로 채주성 금나라 군은 전멸했고, 금나라는 멸망했다.

2. 1. 초기 생애

선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선종의 후궁인 왕씨(王氏)이며 사후 "명혜황후"(明惠皇后)로 추존되었다. 선종이 황위에 오른 후 닝자수는 "수왕"(遂王)에 봉해졌다. 수충이 요절하고 그 아들 완안갱도 요절하자, 1216년 선종은 닝자수를 황태자로 선포했다. 닝자수는 "수서"(守緒)라는 한화된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다.

1224년 1월 선종이 사망하자 완안수서가 황위를 계승하여 금 애종(金哀宗)이 되었다.[1]

2. 2. 몽골의 침략과 저항

1224년, 금 애종은 재위 기간 동안 선대 황제들의 정책으로 붕괴 직전에 놓인 금나라를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남송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소흥 화약을 무효화했으며, 금나라의 옛 동맹국인 서하와 화해하고, 행정부 내에서 개혁을 단행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제거하고,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고 몽골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회복한 군 장군들을 등용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이미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1227년에는 서하를 완전히 정복하고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집중했다.

1232년, 몽골은 산봉산 전투에서 금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고, 금나라 주력 군대를 궤멸시켰다. 그들은 계속 진격하여 금나라 수도인 변경(汴京; 현재의 개봉시, 허난성)을 포위했다. 방어하던 금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동시에 변경에 역병이 돌았는데, 약 50일마다 90만 구 이상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될 형편이 안 되는 빈민들의 시신을 제외하고도 도시 밖으로 운반되었다.

같은 해 말, 금 애종은 황태후가 후하게 지불한 호위를 받으며 변경에서 도망쳤다.[1] 그는 황하를 건너 귀덕(歸德; 현재의 상추시, 허난성)에서 피신한 후 채주(蔡州; 현재의 유남현, 허난성)에 정착했다. 한족 출신 장군 석천택은 금 애종이 퇴각하는 것을 추격하여, 8만 명 규모의 완안승의(完顏承裔)가 이끄는 금나라 군대를 포성(蒲城)에서 격파했다. 1233년 8월, 몽골은 동맹국인 남송에게 당주(唐州; 현재의 당하현, 허난성)에서 금나라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금 애종은 남송과 화해를 모색하며, 몽골이 금나라를 정복하면 다음은 남송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남송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1234년 2월 9일, 몽골과 남송 연합군은 채주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이 시대는 과거 금나라 영토의 북부가 몽골 제국에 빼앗겼고, 도읍도 몽골군을 피해 개봉부로 옮겨져 있었다. 금나라는 마찬가지로 몽골의 압박을 받고 있는 서하와의 동맹에서 활로를 찾으려 했지만, 정대 4년(1227년)에 서하가 멸망하자, 금나라는 다시 몽골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그 무렵, 옥에 갇혀 있던 완안진화상을 아낀 애종은 진화상을 석방시켜 군무에 복귀시켰다. 완안진화상의 활약으로 한때 몽골군을 격파했지만, 정대 8년(1231년)에 금나라 군의 거점이었던 하중부가 함락되었고, 천흥 원년(1232년)에는 도성인 개봉부가 몽골군에 의해 포위되었다(개봉 공방전).

1232년 삼봉산 전투에서 완안진화상이 전사하고, 몽골 제국이 대승을 거두면서 금나라의 쇠퇴가 결정되었다. 금나라 측은 몇 차례 몽골군에 화의를 제안했지만, 동생 톨루이를 금나라와의 전투 중에 잃은 몽골 제국의 오고타이 칸은 애종을 동생의 원수로서 일체의 교섭을 거부했다. 궁지에 몰린 애종은 천흥 2년(1233년)에 개봉부를 탈출하여, 귀덕부, 박주, 채주로 도망쳤지만, 몽골군의 추격은 계속되었고, 천흥 3년(1234년)에 북쪽의 몽골군과 남쪽의 남송군에 의해 채주성이 완전히 포위되었다(채주 전투).

2. 3. 최후

애종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역사가들이 자신을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기억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완안승린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려 했다. 완안승린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애종은 "나는 뚱뚱해서 말을 타고 싸울 수 없다. 만약 도시가 함락되면 도망치기 어렵다. 하지만 너는 건강하고 강하며, 재능 있는 군사 지도자다. 네가 탈출에 성공하면 왕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결국 완안승린은 황제 자리를 받아들였다.

애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완안승린은 애종의 죽음을 기리는 의식을 열고 '애종'이라는 묘호를 바쳤다. 그러나 의식이 끝나갈 무렵, 채주는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완안승린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이로써 금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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