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고자에몬
1. 개요
기무라 고자에몬은 1888년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은행, 회사 대표 등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1924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했으며, 와카츠키 레이지로의 측근으로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등을 지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농림대신, 가타야마 내각에서 내무대신, 건설원 총재 등을 역임했다. 내무성 존속을 위해 노력했으나, 연합군의 해체 방침으로 무산되었다. 전후에는 일본진보당, 민주당 등에서 활동했으며, 민주당 분열 시에는 국민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1952년에 사망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원어 이름 | 기무라 고자에몬 |
|---|---|
| 로마자 표기 | Kimura Kozaemon |
| 출생 | 1888년 |
| 출생지 | 시마네현 오하라군 다이토정 |
| 사망 | 1952년 2월 28일 (향년 63세) |
| 출신 학교 | 와세다 대학 |
| 소속 정당 | (헌정회→) (입헌민정당→) (일본진보당→) (민주당→) (국민민주당→) 개진당 |
| 초대 건설원 총재 | 재임 기간: 1948년 1월 1일 ~ 1948년 3월 10일 내각: 가타야마 내각 |
|---|---|
| 제6대 농림대신 | 재임 기간: 1947년 2월 15일 ~ 1947년 5월 24일 내각: 제1차 요시다 내각 |
| 제67대 내무대신 | 재임 기간: 1947년 6월 1일 ~ 1947년 12월 31일 내각: 가타야마 내각 |
| 제4대 지방재정위원회 위원장 | 재임 기간: 1949년 2월 16일 ~ 1949년 5월 31일 내각: 제3차 요시다 내각 |
| 초대 지방자치청 장관 | 재임 기간: 1949년 5월 31일 ~ 1950년 1월 24일 내각: 제3차 요시다 내각 |
| 서명 | 알 수 없음 |
|---|---|
|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
시마네현립 마쓰에키타 고등학교 동문 -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 노보루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자민당 내 파벌을 창설하여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재무대신 시절 플라자 합의에 참여했고, 총리 재임 중에는 고향 창생 1억 엔 사업과 소비세 도입을 추진하고 한국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 힘썼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총리직에서 사임한 후 정치적 업적과 부패 혐의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시마네현립 마쓰에키타 고등학교 동문 -
와카쓰키 레이지로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재정 전문가로서 명성을 쌓고 재무대신과 내무대신을 거쳐 두 차례 일본 총리를 지낸 정치가로, 남자 보통선거법 제정과 치안유지법 제정에 동시에 관여했으며 런던 해군 군축 회의 수석 전권 대표로 활동했고 만주사변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종전을 위해 노력하고 평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
1888년 출생 -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했으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으로 전범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판은 지휘자 책임 적용 및 맥아더의 복수심 작용 등의 논란이 있다. -
1888년 출생 -
프리츠 제르니커
프리츠 제르니커는 위상차 현미경 발명 및 제르니커 다항식 개발을 통해 광학 분야에 기여하여 195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물리학자이다. -
1952년 사망 -
지그메 왕축
부탄의 제2대 국왕인 지그메 왕축은 교육 및 인프라 개선, 사법 제도 개혁 등 국내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영국령 인도 및 인도와 우호 관계를 맺으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
1952년 사망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2. 생애
기무라 고자에몬은 1924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이후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으며, 와카쓰키 레이지로 전 수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총리대신 비서관, 대장 대신 비서관 등을 거쳐 농림 대신, 내무 대신, 국무대신건설원 총재(초대, 후의 건설대신), 국무대신 지방자치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하위 섹션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작성)
2.1. 초기 생애 및 정계 입문
시마네현오하라군다이토정(현재의 운난시)에서 1888년에 태어났다. 마쓰에 중학교(현 시마네현립 마쓰에키타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여러 은행에서 일했으며 다양한 회사의 대표를 역임했다. 총리대신, 재무 대신, 내무 대신의 비서관을 지냈으며, 국회 의원 고문이기도 했다.
1924년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향인 시마네현에서 헌정회 공인으로 처음 당선되었으며, 1946년 기준으로 중의원 부의장이었다. 와카쓰키 레이지로의 측근으로 알려졌으며, 헌정회·민정당 시대에는 와카쓰키에게 내상 비서관·수상 비서관으로 보좌했으며, 그 후에도 장상 비서관·탁무참여관 등을 역임했다.
2.2. 전후 정치 활동
기무라 고자에몬은 1924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이후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다. 와카쓰키 레이지로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대장 대신 비서관 등을 거쳤다. 전후에는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농림대신(현재의 농림수산대신)을 역임했다. 가타야마 내각에서는 일본 최후의 내무대신(1947년 6월 1일-12월 31일) 및 초대 건설원 총재(후의 건설대신, 1948년 1월 1일-3월 10일)를 역임했다. 제3차 요시다 내각에서는 지방재정위원회 위원장·지방자치청 장관을 역임했다.
가타야마 내각에서 내무대신이었던 기무라는 내무성을 존속시키려고 노력했다. 1947년 6월 2일, 그는 새로운 지방자치 제도 육성,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통괄, 선거 주관을 위해 내무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는 내무성을 "관료의 대본영"이라고 비판했지만, 기무라는 1947년 6월 14일, 지방청이나 각 성으로 권한을 위임하더라도 "내무성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으므로, 비록 명칭이 변하더라도 지방자치단체의 육성에 전념하는 한 성이 존치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기무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타야마 내각은 1947년 6월 20일 내무성 관제 개정안을 각의 결정하고, 내무성의 해체가 아닌, 성명을 "민정성"으로 개정하려 했다. 그러나 GHQ의 강경한 자세와 여론의 비판, 내무성의 압력에 억눌려 있던 다른 성의 권한 탈취 움직임에 따라, 1947년 6월 27일 가타야마 내각은 내무성의 전면 해체안을 결정했다.
전후 진보당·민주당에 소속되었을 때, 기무라는 양당을 전전의 민정당의 흐름을 계승하는 정당으로 여겼으며, 이누카이 겐이 민주당 총재로 취임하는 것에 반대했다. 민주당 분열 시에는 연립파에 소속되었지만 민주자유당과의 합당에는 참가하지 않고, 국민협동당과 함께 국민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사망 20일 전에는 개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2.3. 민주당 분열과 사망
기무라 고자에몬은 일본 진보당 당원이었다. 1940년대 후반 민주당 당원이 되었고 이누카이 다케루가 이끄는 파벌에 속했다. 1947년 6월 10일 당 사무총장에서 사임하고 토마베치 기조로 교체되었다. 1951년 당내에 9명의 구성원을 포함하는 파벌을 설립하고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당내 "사천왕"이라 불리는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다른 구성원은 다카하시 에이키치, 스즈키 심파치, 마키노 칸사쿠였다.
전후 진보당·민주당에 소속되었을 때 양당을 전전의 민정당의 흐름을 계승하는 정당으로 보았고, 이누카이 겐이 민주당 총재로 취임하는 것에 반대했다. 민주당 분열 시에는 연립파에 소속되었지만 민주자유당과의 합당에는 참가하지 않고 민주당 야당파 및 국민협동당과 함께 국민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1952년에 사망했으며, 사망 20일 전 개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3. 정치 성향 및 평가
1924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이후, 와카츠키 레이지로 (전 수상)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다. 총리대신 비서관, 대장 대신 비서관 등을 거쳐 농림 대신, 내무 대신, 국무대신건설원 총재(초대, 후의 건설대신), 국무대신 지방자치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