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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스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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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요스 회의는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가문의 후계자와 영지 분배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등이 참석했으며, 노부나가의 적손인 오다 히데노부를 후계자로, 오다 노부오와 오다 노부타카를 후견인으로 정하는 체제를 결정했다. 회의 결과로 가신들의 영지가 재분배되었으나, 가신단 내부의 세력 변화와 영지 분배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회의 결정을 파기하고 오다 노부오를 오다 가문의 가독으로 세우면서 시즈가타케 전투로 이어졌고,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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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스 회의
개요
시기덴쇼 10년 음력 6월 27일 (1582년 8월 16일)
장소오와리국기요스성
목적혼노지의 변 이후의 오다 노부나가 가문의 후계자 및 영지 배분 결정
참석자
주요 참석자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오다 노부카츠
오다 노부타카
결과
주요 결정오다 히데노부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
오다 가문의 영지 배분
배경
주요 사건혼노지의 변으로 인한 오다 노부나가 사망
영향오다 가문의 권력 공백 발생
논의 내용
후계자 선정 과정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오다 히데노부를 옹립하려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주장
오다 노부나가의 3남인 오다 노부타카를 옹립하려는 오다 노부카츠의 주장
영지 배분오다 노부나가의 영지를 각 후계자들에게 분배하는 방안 논의
하시바 히데요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영지 배분 계획
중요성
정치적 의미오다 가문의 후계 구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
하시바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
기타
관련 작품소설 기요스 회의
영화 기요스 회의

2. 참석자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4명이 참가하였다.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간다야가와 전투에서 고호조 씨에게 패하여 시나노에서 이세로 도주 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1] 가즈마스가 부끄러워서 불참했거나, 오다 씨의 세력을 간토에서 철수시킨 것을 이유로 참가를 거절당했다는 설,[2] 침공해 온 고호조 씨와의 최전선에 있던 가즈마스가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처음부터 소집 대상이 아니었다는 설[3]도 있다.

3. 오다 가문 가독과 체제 결정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가 사망한 후, 오다 가문의 후계자와 영지 배분을 결정하기 위해 기요스 성에서 기요스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가 참석했다.[1]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간다야가와 전투에서 고호조 씨에게 패배하여 시나노에서 이세로 패주하는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1]

오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서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오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가 대립했으나,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적손인 산포시를 옹립할 것을 제안하여 결국 산포시가 가독을 계승하게 되었다.[1] 가와스미 태합기(川角太閤記)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산포시를 옹립하고 가쓰이에가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하여 대립했으나, 결국 산포시의 가독 옹립이 결정되었다고 한다.[3]

시바 히로유키(柴裕之)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는 이미 산포시로 정해져 있었고, 기요스 회의는 산포시를 지지하는 체제를 결정하는 회의였다고 주장한다.[2] 그는 노부오와 노부타카의 대립은 산포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명대(名代)"를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고 설명한다.[2]

결과적으로 산포시가 오다 가문 가독을 계승하고, 노부오와 노부타카가 후견인이 되었으며, 호리 히데마사가 후견역으로 임명되었다. 히데요시,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가 보좌하는 체제가 만들어졌으며,[1]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체제에 협력했다.

4. 영지 재분배

노부오는 오와리국을, 노부타카는 미노국을 상속받았고, 노부나가의 넷째 아들이자 히데요시의 양자인 하시바 히데카츠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구 영지인 탄바국을 상속받았다. 가신단에게는 가츠이에가 에치젠국을 안도받은 후, 가츠이에의 희망에 따라 히데요시의 영지인 나가하마성과 북 오미 3군 12만 석이 할당되어, 나가하마성은 양자인 시바타 카츠토요에게 주어졌다. 나가히데는 와카사국을 안도받은 후, 오미국의 2군을, 츠네오키는 셋츠국에서 3군을 각각 추가로 받았다. 새로운 당주인 산포시는 오미국 사카타군과 아즈치성을 상속했으며, 히데요시는 종래의 하리마국・타지마국에 더해 카와치국과 야마시로국이 증령되어, 탄바국을 포함하면 28만 석이 추가되어 가츠이에와 역전되었다.

칸가와 전투 이후 호조 우지마사・우에스기 카게카츠, 그리고 오다 가문에 종속된 다이묘 상태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가문의 지배가 동요하고 있는 구 타케다 영국에 침공했다(덴쇼 임오의 난). 이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시바 히데요시 등 오다 가문 중신들에게 구 타케다 영국의 진출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패주 소식을 접한 중신들은 처음에는 구 타케다 영국의 탈환을 방침으로 삼았지만, 이에야스의 요청을 받아 이에야스에 의한 구 타케다 영국의 평정을 용인하게 되었다.[3] 다만, 이로 인해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비롯하여 이번 결정으로 소령을 잃게 될 구 타케다 영국의 여러 장수들에 대한 대응은 결정되지 않았다. 훗날 구 타케다 영지의 이에야스 위임을 알게 된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대체 소령을 요구했지만, 중신들은 회의에서 결정한 소령 배분을 재검토할 수 없어 결론이 미루어지고, 카즈마스의 불만은 커져갔다. 노부오가 지배하게 된 오와리국과 노부타카가 지배하게 된 미노국의 국경에 대해서도 양측의 의견 대립이 있었고(노부타카는 홍수로 인한 기소강의 유로 변경을 이유로 국경선 자체의 변경을 요구했다), 노부타카의 의견을 지지하는 히데요시와 노부오의 의견을 지지하는 가츠이에가 대립했다(히데요시는 노부타카의 의견을 지지하는 대신 산포시의 아즈치 이동을 거래할 셈이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노부오의 의견이 회의의 합의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이는 노부타카의 불만을 키워나가는 한 원인이 되었다.

5. 회의의 영향

노부나가 사후 오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서 노부오와 노부타카가 대립했으나, 히데요시산포시(三法師)를 옹립하여 가쓰이에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했다.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는 "대개는 하시바(羽柴)의 그대로 된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바 히로유키(柴裕之)는 기요스 회의가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회의가 아니라, 이미 후계자로 정해진 산포시를 지지하는 체제를 결정하는 회의였다고 주장한다. 노부나가 생전에 노부타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산포시가 가독을 계승하는 것이 방침이었고,[2] 회의의 쟁점은 산포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명대(名代)"를 설치할 것인지, 그리고 누구를 명대로 할 것인지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산포시가 오다 가문의 가독을 계승하고, 노부오와 노부타카가 후견인이 되었으며, 호리 히데마사가 보좌역을 맡고, 히데요시,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4중신이 보좌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1] 이에야스도 이 체제에 협력했다.[3]

기요스 회의를 통해 가쓰이에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히데요시가 중신 필두의 지위를 차지하는 등 오다 가문 내부의 세력 구도가 크게 변화하였다. 히데요시는 호리 히데마사,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를 회유하여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부타카는 가쓰이에, 다키가와 가즈마스와 연합하여 오다 가문 중신들은 양분되었다.

이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려 했던 오다 노부오는 기타바타케에서 오다로 복성했기 때문에 기타바타케 씨는 명실상히 멸망했다.

6. 회의 결정 파기

기요스 회의 후, 하시바 히데요시는 호리 히데마사와 손을 잡고 니와 나가히데이케다 쓰네오키를 회유하여 히데요시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다 노부타카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을 잡고 반(反) 히데요시 진영을 구축했고, 회의에서 배제된 다키가와 가즈마스도 가세하여 오다 가문 중신들은 양분되었다.[1]

1582년 10월 11일부터 15일까지,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하시바 히데카쓰를 상주로 내세워 다이토쿠지에서 거행하였다. 장례 행렬에서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위패를 들고,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세상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켰다.[2] 기후성에서 산포시를 안고 놓아주지 않는 노부타카 측에 대항하기 위해, 11월 1일까지 히데요시는 노부타카와 가쓰이에의 모반을 이유로 기요스 회의의 결정을 파기하고, 오다 노부오를 오다 가문의 가독으로 세우기로 가쓰이에를 제외한 세 원로인 니와 나가히데와 이케다 쓰네오키의 삼자 합의로 결정했다.[3] 이 결정은 기요스 회의의 체제에 포함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낙도 필요했고, 이에야스는 같은 해 12월 22일자로 히데요시에게 노부오의 가독 상속에 축의를 표하는 형태로 승인했다. 그 후,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대립은 깊어져 갔고, 이듬해의 시즈가타케 전투로 이어져,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로 이어진다.

7. 오다 가문 가신단 초상화

8. 대중 매체

미타니 코키기요스 회의 (소설)을 출판하였으며,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가 제작되었다.[1]

참조

[1] 서적 天下統一から鎖国へ 吉川弘文館
[2] 서적 織田信長 戦国時代の「正義」を貫く 平凡社 2020-12
[3] 간행물 天正期北関東政治史の一齣 : 徳川・羽柴両氏との関係を中心に 駒沢史学会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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