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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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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는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의 빗추 다카마쓰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히데요시는 수공(水攻) 전술을 사용하여 성을 포위하려 했고, 모리 가문은 구원군을 보냈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의 조건으로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자결하였으며,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기 위해 철수했다. 이 전투는 히데요시가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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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빗추 다카마쓰 성 전투 (備中高松城の戦い)
시기1582년 4월 - 1582년 6월 4일 (음력)
장소빗추국 다카마쓰 (현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기타구 다카마쓰)
원인오다 노부나가의 중국 정벌
모리 가문의 방어
결과모리 군과의 강화
시미즈 무네하루의 자결
지리 정보
교전 세력
교전 1오다 노부나가 군 [[파일:Mon-Oda.png|15px]]
교전 2모리 데루모토 군 [[파일:Ichimonjimitsuboshi.svg|15px]]
지휘관 및 병력
오다 군 지휘관하시바 히데요시 [[파일:Go-shichi no kiri crest.svg|15px]]
오다 군 병력30,000명
모리 군 지휘관시미즈 무네하루
모리 데루모토 [[파일:Ichimonjimitsuboshi.svg|15px]]
깃카와 모토하루 [[파일:Kuyo.svg|15px]]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파일:Hidari mitsudomoe.svg|15px]]
모리 군 병력농성군: 3,000 ~ 5,000명
원군: 50,000명
전투 상세
다카마쓰 성 수공 그림
다카마쓰 성 수공 그림/도쿄 도립 중앙 도서관 소장
배경하시바 히데요시의 주고쿠 정벌의 일환
특징히데요시의 수공 (물 공세)
성 주변을 제방으로 둘러싸고 물을 채워 성을 고립시킴
미키 성 공략을 "미키의 말려 죽이기", 돗토리 성 공략을 "돗토리의 굶겨 죽이기"라 칭하며, 이에 상응하여 "다카마쓰의 물로 죽이기"라고도 불림.
결과모리 군의 항복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
오다 노부나가의 사망으로 인한 주고쿠 회군
관련 전투
관련 전투혼노지의 변

2. 배경

센고쿠 시대 빗추 국은 수호인 호소카와 가문의 세력이 약해진 후, 여러 고쿠진 영주들이 난립하였다. 그중 미무라 가문이 모리 가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했지만, 비젠 국 우라가미 가문 산하의 우키타 나오이에에게 미무라 이에치카가 암살당하고, 뒤이은 묘젠지 전투에서 패배하여 쇠퇴하였다. 이후 나오이에와 결탁한 모리 가문에 의해 미무라 가문은 멸망했고(빗추 병란), 그 산하 성주 대부분은 모리 가문을 의지했는데, 시미즈 무네하루도 그중 한 명이었다.[2]

한편, 기나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하고(무로마치 막부 멸망) 천하 통일 사업을 추진했다. 모리 모토나리 시대에는 노부나가와 우호 관계였던 모리 가문은, 후계자 모리 데루모토가 요시아키를 보호하고(도모 막부), 이시야마 혼간지와 동맹을 맺는 등 노부나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강화했다.[4]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멸망시키기 위해 배후의 모리 가문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고, 1577년 10월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총대장으로 하는 주고쿠 정벌을 시작했다.[4]

히데요시는 하리마 국 히메지성을 거점으로 주변 세력을 복속시켰으나, 아라키 무라시게의 반란(아리오카 성 전투)과 벳쇼 가문의 배신(미키 전투), 가미즈키 성 전투 등 초반에는 어려움을 겪었다.[5]

히데요시는 야마나 도요쿠니 등을 항복시키고, 깃카와 쓰네이에를 돗토리성 전투에서 격파하는 등 산인도 방면으로 진출했다. 한편, 우키타 나오이에는 처음에는 모리 가문 산하였으나, 오다 가문과 히데요시의 힘을 알고 모리 가문을 버리고 항복했다.[7]

1581년 나오이에가 병사하고, 어린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가 뒤를 이었으며,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면서 비젠 국도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갔다.[8]

1582년 2월, 야하마 전투에서 모리 군이 우키타 군을 대파하고 우키타 모토이에를 전사시키자, 히데요시는 우키타 가문 구원 및 모리 가문 공략을 위해 직접 출진을 결의했다. 히데요시는 우키타 가문이 멸망하면 모리 가문 공략이 어려워진다고 판단하여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3. 전투 경과

1582년 3월 15일, 하시바 히데요시는 2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히메지성을 출발하여 주고쿠 지방 정벌에 나섰다.[6] 우키타 씨의 협력을 얻어 총 3만 명의 군세로 빗추에 진입, 4월 15일에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하고 류오산에 진을 쳤다. 저습지를 이용한 평성인 다카마쓰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3,000~5,000명의 병사로 농성하며 항복을 거부했다.[6] 4월 27일, 히데요시는 우키타 군을 선봉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히데요시는 수공(水攻) 전술을 채택, 5월 8일 아시모리 강 물을 막는 제방을 쌓아 6월 8일 장마로 다카마쓰 성을 고립시켰다.

개구리개 코 제방 유적


모리 데루모토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구원군을 이끌고 사루카케성에 진을 쳤으나, 제방 때문에 히데요시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수군을 책략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모리 군의 보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루카케성


5월 15일,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지원을 명령하고 직접 출진할 준비를 했으나,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측과 강화 교섭을 진행, 시미즈 무네하루할복과 빗추, 미마사카, 호키 3개국 할양 조건으로 6월 4일 화의를 성립시켰다. 같은 날 무네하루는 히데요시 본진 앞에서 춤을 추고 싯구를 남긴 후 자결했다. 히데요시는 주고쿠 오가에시를 시작, 산요도를 통해 동쪽으로 철수했다.

3. 1. 히데요시의 출진과 다카마쓰 성 포위

1582년 3월 15일,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2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주고쿠 지방 정벌을 위해 히메지 성을 출발했다.[6] 도중에 우키타 씨의 옛 거성인 가메야마 성에 들러 우키타 씨가 오다 군에 협력하는 것을 확인하고, 우키타 군 1만 명을 더해 총 3만 명의 군세로 빗추 지역에 진입했다.

4월 15일, 히데요시는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하고 류오산에 진을 쳤다. 다카마쓰 성은 저습지를 이용한 평성으로, 조총기마 전법에 강했다.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3,000~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며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이에마사구로다 요시타카를 보내 무네하루에게 항복하면 빗추, 빈고 2개국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무네하루는 이를 거절하고 모리 데루모토에게 충성을 다했다.[6]

4월 27일, 히데요시는 우키타 군을 선봉으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성 수비대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퇴각했다.

3. 2. 수공(水攻) 전술

1582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난공불락의 다카마쓰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수공(水攻) 전술을 채택했다. 저습지에 있는 늪성이라는 점을 역이용한 전략이었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이 전술을 제안했다.[3]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지휘 아래 하치스카 마사카쓰, 우키타 타다이에, 호리오 요시하루, 이코마 지카마사, 구와야마 시게하루, 토다 마사하루의 지원을 받아 제방 건설을 시작했다. 아사노 나가마사고니시 유키나가는 배와 뱃사공을 모아 호수에 떠 있을 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4]

5월 8일, 히데요시는 몬젠 마을(현: JR기비선아시모리역 부근)에서 개구리개 코(이시이 산 남쪽 기슭)까지 동남쪽 약 4킬로미터, 높이 8미터, 하단 24미터, 상단 폭 12미터에 달하는 긴 제방을 만들어 아시모리 강의 물을 막는 공사에 착수했다.[8]

축제 봉행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쓰가 임명되었고, 우키타 타다이에가 구로다 요시타카의 지도 아래 몬젠 마을에서 시모데다 마을까지를 담당했다. 하라코사이 마을은 하치스카 씨가, 마쓰이에서 모토코야마까지를 호리오 요시하루, 이코마 치카마사, 키노시타 시게카타, 쿠와야마 시게하루, 토다 마사하루 등이 담당했다. 개구리개 코부터 앞쪽은 탄바중이 담당하게 되었고, 아사노 나가마사는 빗추 다카마쓰성이 호수에 떠 있는 섬이 되었을 때의 성 공격 준비에 임했다. 아시모리강의 제방 설치 방법은 구로다 가신의 요시다 나가토시가 제안했다고도 한다.

공사에는 군인과 농민 등을 동원하여, 1섬에 100문의 돈, 쌀 1되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보수를 지급했다. 제방은 5월 8일 공사 착수에서 19일에 준공되기까지 불과 12일 만에 완성되었다.

6월 8일, 장마 시기에 계속 내린 비로 인해 아시모리 강이 범람하여, 200ha나 되는 호수가 만들어졌고 다카마쓰 성은 고립된 섬이 되었다. 제방을 완성한 히데요시는 제방 위에 망루를 설치하여 성내의 모습을 감시했다.

성내에서는 수공이라는 전법에 동요하여, 물자 보급로가 끊기고 병량미가 부족해진 것과, 모리 씨의 원군이 오지 않는 것도 겹쳐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성내까지 침수되었기 때문에, 성병은 작은 배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3. 3. 모리 가문의 대응과 원군

모리 데루모토는 급보를 받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과 함께 다카마쓰성 구원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다. 당시 모리 가문은 당주와 깃카와, 고바야카와 두 장수가 모두 모인, 가용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을 동원했다. 히데요시의 편지(''아사노가 문서'')에 따르면 모리 군세는 5만 명, ''유임 퇴치기''에 따르면 8만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히데요시에 의해 부풀려진 것이며, 모리 가문은 분국이 불안정하여 실제로는 1만 명의 병사밖에 동원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데루모토는 사루카케성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성에 가까운 이와사키산(고신산)에는 깃카와 모토하루, 그 남쪽 히자시산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배치하여 히데요시와 대치했다. 그러나 이미 제방이 완성되어 있었고, 데루모토 등은 히데요시가 만든 호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5월 21일이 되어서야 모토하루와 다카카게가 오다 세력과 직접 대치하는 위치로 진을 옮겼다.

모리 군이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히데요시가 모리 수군에 대한 책략을 써서 구루시마 수군, 다카하타 수군, 시오야키 수군을 이반시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모리 가문은 제해권을 잃고 육로로만 보급을 의존해야 했고, 물자 부족으로 데루모토의 본진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한, 모리 세력은 물에 잠긴 다카마쓰성에 배로 물자를 지원하려 했지만, 배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5월 15일, 히데요시는 모리 데루모토와의 직접 대결에 대비하여 가이 다케다 씨를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를 아즈치성으로 보냈다.

5월 17일,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편지를 받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접대하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히데요시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5월 29일, 노부나가 자신도 교토 혼노지에 들어가 빗추로 출진할 준비를 했고, 출진 날짜는 6월 4일로 정해졌다. 이 때문에 모리 가문은 위기 상황에 놓였다.

3. 4. 화의(和議) 성립과 히데요시의 철수

히데요시는 모리 데루모토와의 대결에 대비하면서도 모리 씨와의 강화 교섭에 들어갔다.[3] 모리 측은 군승 안코쿠지 에케이구로다 요시타카에게 파견하여 "5개국(빗추, 빈고, 미마사카, 호키, 이즈모) 할양과 성병의 생명 보전"을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하고 "5개국 할양과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할복"을 요구했기 때문에, 교섭은 일단 결렬되었다. 모리 측은 시미즈 무네하루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히데요시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무네하루는 자신의 목숨을 성과 함께 하고 싶다며 이를 거부했다. 모리 측은 안코쿠지 에케이를 다카마쓰 성에 보내 설득을 시도했지만, 무네하루는 "주가인 모리 가문과 성내 병사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목은 싼값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와 형인 시미즈 무네토모(겟세이 입도), 동생 난바 무네타다(덴베), 고바야카와 씨의 원군인 스에치카 노부카 4명의 목을 내놓는 대신 농성자들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탄원서를 써서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맡겼다.

마침 이때(6월 3일 밤) 히데요시 측은 아케치 미쓰히데로부터 모리 측에 보내진 사자를 붙잡아 전날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교토혼노지에서 사망했다(혼노지의 변)는 밀서를 손에 넣었다.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 등 막료들과 합의하여, 한시라도 빨리 모리와 화해하고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기 위해 상락할 방침을 굳혔다. 또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사망으로 인해 후원자를 잃은 상태임을 모리 측에 들키지 않도록 철저하게 노부나가 사망 사실을 은폐했다.

6월 3일 심야부터 4일의 회담에서 히데요시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불러, 할지를 가베 강(다카하시 강)과 야하타 강 이동(以東)의 할양(앞선 5개국에서 빗추, 미마사카, 호키 3개국으로 양보)으로 하고, 시미즈 무네하루 자결을 화해 조건으로 제시했다. 모리 측은 어쩔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여, 여기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또한 인질로, 히데요시 측에서 모리 시게마사・다카마사 형제(후에 모두 모리 성을 칭함)가 보내졌다.

모리 씨는 4월 하순에 제해권을 잃고, 지구전을 준비하고 있는 오다 군에 대해 맹공할 병력이 없고, 지구전에 견딜 물자 수송 수단에 곤란을 겪고 있어,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된다.[7]

빗추 다카마쓰 성 혼마루 터에 있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무덤


4일 오전, 무네하루는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안주로 작별 연회를 열고, 성내 청소 등을 가신에게 명하고, 몸치장을 했다. 그 후 무네하루 등 4명은 히데요시가 보낸 작은 배를 타고 히데요시의 본진까지 가서 술잔을 나눴다. 그리고 무네하루는 춤을 춘 후, "'이 세상을 지금이야말로 건너가리라. 무사(もののふ)의 이름을 다카마쓰의 이끼에 남겨두고'"라는 싯구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머지 3명도 잇달아 자결했고, 4명의 가이샤쿠를 한 고쿠후시 마사도 자결했다. 히데요시는 무네하루를 무사의 거울로서 칭찬했다.

히데요시는 화의가 성립되자, 다카마쓰 성에 스기하라 이에쓰구를 남겨두고, 4일 오후에는 산요도를 동쪽으로 향했다('''주고쿠 오가에시'''). 모리 측이 혼노지의 변 소식을 입수한 것은 히데요시가 철수한 다음날인 5일로, 기이의 사이카 衆으로부터의 정보였다는 것을, 요시카와 히로이에의 각서(안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모토하루 등이 히데요시를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카카게가 맹세를 교환한 이상은 강화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데루모토도 추격을 단념했다.

4. 전투 후의 정세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의 실질적인 후계자가 되었다.[5] 주고쿠 정벌로 히데요시의 실력을 알고 있던 모리 가문은 히데요시와의 화친을 유지하며 그의 패업을 지원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에서 모리 가문은 중용되었고, 모리 데루모토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고다이로가 되었다.

빗추 다카마쓰성은 우키타 가문의 가신인 하나부사 가문이 관리하게 되었다.[5]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하나부사 마사나리는 주군 우키타 히데이에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여 에도 시대하타모토로 출세하였다.[5] 몇 년 후 하나부사 가문이 빗추 아소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카마쓰 성은 폐성되었다.[5]

한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한 후 시미즈 무네하루의 아들에게 지행 1만 석을 주려고 했지만, 무네하루의 장남인 가게하루는 모리 가문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고 전해지며, 『모리 가문 문서』에 가게하루 자신이 그 뜻을 적어 남긴 서장이 남아있다. 그 후 시미즈 가는 하기번 요리구미로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으며, 유신 후에는 도막에 공헌하여 남작에 서임되었다.

현재, 다카마쓰성 니노마루 터에는 겐묘지라는 절이 건립되어 있으며, 그 경내에 무네하루가 자결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에 석비가 세워져 있다.

5. 참전 무장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에 참전한 주요 무장은 다음과 같다.

오다 군 (히데요시 측)모리 군


5. 1. 오다 군 (히데요시 측)

참전 무장


5. 2. 모리 군

농성군원군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3]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1995
[4] 논문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islands of the Gods : a reappraisal of Konishi Ryusa, a merchant, and of Konishi Yukinaga, a Christian samurai, in sixteenth-century Japan https://doi.library.[...]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2005
[5]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6] 사전 清水宗治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7] 간행물 高松城水攻め前夜の攻防と城郭・港 倉敷の歴史 2008
[8] 서적 備中高松城水攻め築堤跡 高松城水攻め築堤公園建設に伴う確認調査 http://sitereports.n[...] 岡山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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