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타이시
1. 개요
긴타이시는 형 나림불루 사후 버일러가 되었으며, 누르하치의 처이자 홍타이지의 생모인 효자고황후의 오빠로서 누르하치와 매부-처남 관계였다. 건주 여진과의 갈등 속에서 딸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고 맹약을 맺었으나 파기하기도 했다. 누르하치와의 대립 끝에 1619년 건주군에게 포획되어 사망하고 여허부는 멸망했다. 그의 아들 니야하는 후금에 투항하여 정황기에 편입되었고, 손자 나라 밍주는 강희제 연간 대학사가 되었다. 명나라는 여허 멸망 후 긴타이시의 후손에게 은전을 내리고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 전칭 만주어 | ᡤᡳᠨᡨ᠋ᠠᡳᠰᡳ (Gintaisi) |
|---|
| 서적 | 만주실록 |
|---|---|
| 권 | 6권 |
| 쪽수 | 274쪽 |
| 출판사 | 중화서국 |
| 출판년도 |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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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허나라 할라 -
서태후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를 낳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청나라 말기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양무 운동 추진 및 의화단 지원 등 다양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여허나라 할라 -
예허나라 완전
예허나라 완전은 청나라 말기의 인물로, 순현친왕 혁현의 부인이자 광서제의 생모이며, 서태후의 동생으로서 황실과의 복잡한 인척 관계를 통해 가문의 권력 확대에 기여하다가 1896년에 사망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1619년 사망 -
후지와라 세이카
후지와라 세이카는 1561년에 태어나 1619년에 사망한 일본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기반으로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고 하야시 라잔 등을 제자로 두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유학을 강의하고 『촌철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619년 사망 -
페르디난트 2세
페르디난트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으로, 반종교개혁을 추진하여 30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나 초기에는 승리했으나, 이후 전쟁의 역전과 재정난 속에 아들에게 제위를 계승했다.
2. 생애
긴타이시는 형 나림불루가 사망한 후 버일러(貝勒) 자리를 계승했다. 그의 여동생 몽고저저(ᠮᠣᠩᡤᠣᠵᡝᠵᡝmnc, 孟古哲哲중국어)는 누르하치努爾哈赤중국어(ᠨᡠᡵᡤᠠᠴᡳmnc)의 아내이자 홍타이지皇太極중국어(ᡥᠣᠩ ᡨᠠᡳᠵᡳmnc)의 생모로, 훗날 효자고황후로 추존되었다. 이로 인해 긴타이시는 누르하치의 처남이 되었으며, 한때 누르하치의 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건주여진의 세력 확장과 해서여진 내부의 복잡한 관계로 인해 점차 대립하게 되었다. 1593년, 여허는 다른 8개 부족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했으나 구러 산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이 과정에서 여허 서성버일러 부자이布寨중국어(ᠪᡠᠵᠠᡳmnc)가 전사하면서 양측의 적대 관계는 깊어졌다.
1597년, 긴타이시는 딸을 누르하치의 아들 다이샨代善중국어(ᡩᠠᡳᡧᠠᠨmnc)에게 시집보내고 다른 부족들과 함께 누르하치와 맹약을 맺기도 했으나, 곧 이를 파기하고 딸을 몽골 내칼카(內喀爾喀)의 자이사이(宰賽)에게 보내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1609년(또는 1598년 설도 있음)에는 동성버일러 자리에 올랐다.
이후 건주여진과의 군사적 충돌이 잦아졌다. 1604년과 1613년 누르하치의 공격으로 여허는 여러 성과 요새를 잃었다. 긴타이시는 명(明)과 연합하여 누르하치에 대항하려 했으나, 명이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 대패하면서 지원을 받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1619년,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의 승리 이후 대군을 이끌고 여허를 공격했다. 긴타이시는 여허 동성을 지키며 항전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항복을 거부하고 분신을 시도했다. 이후 도주하려다 건주군에게 붙잡혀 교살당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여허부는 멸망하였다.
2.1. 건주여진과의 관계
긴타이시는 형 나림불루가 사망한 후 버일러(貝勒) 자리에 올랐다. 누르하치努爾哈赤중국어(ᠨᡠᡵᡤᠠᠴᡳmnc)의 아내이자 홍타이지皇太極중국어(ᡥᠣᠩ ᡨᠠᡳᠵᡳmnc)의 생모인 효자고황후 몽고저저(ᠮᠣᠩᡤᠣᠵᡝᠵᡝmnc, 孟古哲哲중국어)는 긴타이시의 여동생이었으므로, 긴타이시와 누르하치는 처남과 매부 사이였다. 당시에는 긴타이시를 누르하치의 형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1588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세력이 커지자, 여허의 동성버일러 나림불루는 건주에 땅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1593년, 여허는 다른 여덟 부족과 연합하여 건주여진 정벌에 나섰다. 이 9부 연합군(해서여진 4부, 몽골 3부, 장백산 2부)은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누르하치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고, 여허의 서성버일러였던 부자이布寨중국어(ᠪᡠᠵᠠᡳmnc)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누르하치는 부자이의 시신을 반으로 잘라 여허로 돌려보내는 잔인함을 보였고, 이 사건으로 건주여진과 여허는 서로 죽여야 할 원수 사이가 되었다.
부자이의 아들 부양구布揚古중국어(ᠪᡠᠶᠠᠩᡤᡡmnc)는 즉위 초, 자신의 여동생이자 당시 해서여진(海西女眞)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동고東哥중국어(ᡩᠣᠩᡤᠣmnc)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내 건주와 화친하려 했으나, 동고 본인이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1597년, 긴타이시는 자신의 딸을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다이샨代善중국어(ᡩᠠᡳᡧᠠᠨmnc)에게 시집보냈고, 울라烏拉중국어(ᡠᠯᠠmnc), 호이파輝發중국어(ᡥᠣᡳᡶᠠmnc), 하다哈達중국어(ᡥᠠᡩᠠmnc)와 함께 누르하치와 피를 나누어 마시는 삽혈(歃血) 맹세까지 맺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긴타이시는 이 맹세를 깨고 딸을 몽골 내칼카(內喀爾喀)의 자이사이(宰賽)에게 다시 시집보냈다. 1609년(또는 1598년 설도 있음), 긴타이시는 동성버일러 자리에 올랐다.
양측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1604년, 누르하치는 긴타이시를 공격하여 성 2개와 요새 7곳을 빼앗았다. 1613년에는 건주로 도망쳤던 울라의 수장 부잔타이布占泰중국어(ᠪᡠᠵᠠᠨᡨᠠᡳmnc)를 넘겨달라는 누르하치의 요구를 긴타이시가 거절하자, 누르하치는 4만 대군을 동원하여 우수(烏蘇) 등 19곳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위기에 몰린 긴타이시는 명(明)과 손을 잡으려 했지만, 명나라는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에서 누르하치에게 크게 패배하여 여허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명나라 패잔병까지 흡수하여 여허로 총공세를 펼쳤다. 여허군은 성 밖으로 나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성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긴타이시는 동성을, 부양구는 서성을 각각 맡아 방어했다.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긴타이시의 외조카인 홍타이지는 여허군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도 했다. 누르하치의 명령을 받은 건주군은 동굴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동성을 공격했고, 성벽이 무너지자 건주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긴타이시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건주 장수들은 그가 불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불이 꺼진 후 긴타이시는 도망치려다 건주군에게 발각되어 사로잡혔고, 결국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서성을 지키던 부양구는 동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로써 여허부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긴타이시의 아들 니야하尼雅哈중국어(ᠨᡳᠶᠠᡥᠠmnc)는 남은 여허 부대를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여 만주 정황기(正黃旗)에 편입되었다. 니야하의 아들이 바로 청나라 강희康熙중국어 연간 대학사(大學士)를 지낸 나라 밍주納蘭明珠중국어(ᠨᠠᡵᠠᠨ ᠮᡳᠩᠵᡠmnc)이다.
한편, 명(明)의 만력제(萬曆帝)는 여허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사중(給事中) 요종문姚宗文중국어에게 명하여 직접 국경 밖으로 나가 여허의 후손을 찾도록 했다. 긴타이시의 아들 덜거러이(ᡩᡝᡵᡤᡝᠯᡝmnc)에게 몽골로 시집 간 딸 두 명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만력제는 각각에게 백금(白金) 2천 냥씩을 하사했다. 또한 명나라 조정은 긴타이시와 부양구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하다의 후손인 왕세충王世忠중국어을 긴타이시의 처조카로 삼아 유격(游擊) 벼슬을 주었다.
2.2. 여허부의 멸망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세력이 강성해지자, 여허는 위협을 느꼈다. 1588년 긴타이시의 형이자 당시 동성 버일러였던 나림불루는 건주에게 토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593년, 여허는 해서여진의 다른 부족 및 몽골, 장백산 세력과 연합하여 건주여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9부 연합군은 통일된 지휘 체계 없이 오합지졸에 가까웠기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누르하치 군대에게 구러 산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여허 서성 버일러 부자이가 전사했고, 누르하치는 부자이의 시신을 반으로 갈라 여허로 돌려보내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여허와 건주여진은 돌이킬 수 없는 원수 관계가 되었다.
부자이의 아들 부양구는 서성 버일러 자리를 계승한 후, 한때 누르하치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는 당시 해서여진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여동생 동고를 누르하치에게 보내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동고 본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597년, 긴타이시는 자신의 딸을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에게 시집보내고, 울라, 호이파, 하다 부족과 함께 누르하치와 피를 나누어 마시는 삽혈(歃血) 맹세를 맺었다. 그러나 긴타이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맹약을 깨고 딸을 몽골 내칼카의 자이사이(宰賽)에게 다시 시집보냈다.
1604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하여 성 2개와 주변 보루 7곳을 함락시켰다. 1609년(혹은 1598년), 긴타이시는 형 나림불루의 뒤를 이어 동성 버일러가 되었다. 1613년, 누르하치는 건주로 도망 온 울라 부족의 수장 부잔타이를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긴타이시가 거절하자, 4만 대군을 동원하여 우수(烏蘇) 등 19곳의 보루를 함락시키며 여허를 압박했다.
궁지에 몰린 긴타이시는 명과의 연합을 시도했지만, 명나라는 이미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대패하여 여허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1619년,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명나라 패잔병까지 흡수하여 여허로 총공세를 펼쳤다. 여허군은 성을 걸어 잠그고 방어에 나섰으며, 긴타이시는 동성을, 부양구는 서성을 각각 지켰다. 누르하치는 긴타이시의 외조카인 홍타이지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긴타이시는 거부했다. 건주군은 땅굴을 파는 방식으로 동성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 안으로 진입했다. 긴타이시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분신을 시도했다. 건주 장수들은 그가 불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불길 속에서 탈출하려던 긴타이시는 건주군에게 발각되어 사로잡혔고 결국 교살당했다. 동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양구는 서성의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여허부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긴타이시의 아들 니야하는 남은 여허 부족민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여 만주 정황기에 편입되었다. 니야하의 아들이 훗날 강희제 시대의 유명한 대학사 나라 밍주이다.
한편, 명나라 만력제는 여허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사중 요종문을 보내 여허의 후예를 찾도록 했다. 긴타이시의 아들 덜거러이와 몽골로 시집 간 두 딸의 소식을 확인한 만력제는 이들에게 각각 백금 2천 냥을 하사하며 위로했다. 또한 명나라 조정은 긴타이시와 부양구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하다 부족의 후손 왕세충을 긴타이시의 처조카로 삼아 유격(游擊) 벼슬을 내렸다.
2.3. 사후
긴타이시의 아들 尼雅哈중국어(혹은 倪迓韓)는 여허 부대를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였으며, 만주 정황기(正黃旗)에 편입되었다. 니야하의 아들은 강희(康熙) 연간 대학사(大學士) 나라 밍주(納蘭明珠)이다.
명(明) 만력제(萬曆帝)는 여허성의 함락 소식을 듣고 급사중(給事中) 요종문(姚宗文)에게 명하여 직접 새외(塞外)로 가서 여허의 자손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긴타이시의 아들 德爾格勒중국어에게 몽골로 시집 간 딸 2명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만력제는 각각 백금(白金) 2천량을 하사하였다. 명나라 대신들은 긴타이시와 부양구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하다 후손 왕세충(王世忠)을 긴타이시의 처조카로 삼아, 유격(游擊) 직을 제수하였다.
3. 가족
* 시조 : 싱건다르한(星懇達爾漢, 혹은 勝根打喇漢, 打葉)
증조 : 추쿵거(祝孔革, 혹은 褚孔格, 杵孔格), 싱건다르한의 증손자
* 조부 : 타이추(太杵, 혹은 台坦柱)
백부 : 칭기야누(淸佳砮)
* 사촌 : 부자이(布寨)
부친 : 양기누(楊吉砮, 혹은 養汲努)
* 형제 : 나림불루(納林布祿), 사이비투(Saibitu, 賽碧圖, 혹은 賽必圖), 아산(Asan, 阿山) 등
* 여동생 : 몽고저저(Monggojeje, 孟古哲哲) : 훗날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 처 : 성씨 미상, 아들 덜거러이(德爾格勒)를 따라 후금으로 귀순함, 당시 누르하치의 형수로 여겨짐. 천명(天命) 10년(1625) 누르하치는 손윗사람을 대하는 예로 덜거러이의 모친 등 6명을 연회에 초청함 천총(天聰) 6년(1632) 정월, 홍타이지가 니칸(尼堪) 아고(阿哥)의 모친, 참부(察木布)의 모친, 난주의 조모(南楮之祖母) 등 6명의 장자를 연회에 초청함
아들1 : 덜거리(德爾格勒 혹은 德爾赫禮)
* 손자 : 난추(南楮), 솔호(索爾和), 조오서(趙色)
증손자 : 무잔(穆占) 등
증손녀 : 수타이 태후(蘇泰太后)
아들2 : 니야하(Niyaha, 尼雅哈, 혹은 倪迓韓)
* 손자 : 정쿠(Jengku, 振庫, 혹은 鄭庫), 밍주(明珠)
증손자 싱더(性德)(나라 싱더), 규서(揆叙), 규방(揆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