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라 (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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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라(Ula)는 여진족의 부족으로,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존재했다. 초기에는 키르사 강 유역에서 시작하여 쑹화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561년 부얀이 우라제부를 통합하고 우라성을 건설하며 버이러를 자칭했다. 이후 하다에 종속되기도 했으나, 예허 등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17세기 초 부잔타이 시대에 누르하치와 대립하다가 1613년 멸망했다. 울라나라는 만주족 씨족으로, 신해혁명 이후 조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

울라 (여진)
지리
위치쑹화강 유역
역사
별칭후룬, 울라
주요 부족후룬 부족
주요 도시울라
멸망 시기1613년
멸망 원인누르하치의 공격으로 멸망
주요 지도자부잔타이
정치
정치 체제부족 연맹
언어
사용 언어만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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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우라의 역사는 크게 건국과 발전, 그리고 멸망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후룬 구룬(우라)은 시조 나치부루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후손들이 명나라와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특히 부얀(ᠪᡠᠶᠠᠨmnc)은 1561년 우라제부를 통합하고 버이러를 자칭하며 우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부얀 사후 하다(Hada)에 종속되기도 하였으나, 하다의 내분을 틈타 다시 독립하였다. 부간(ᠪᡠᡤᠠᠨmnc)의 시대를 거쳐 만타이(ᠮᠠᠨᡨᠠᡳmnc)가 즉위하였으나, 만타이 부자는 솨얀 시란(ᠰᡠᠸᠠᠶᠠᠨ
ᠰᡳᡵᠠᠨmnc)에서 피살되었다.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ᠪᡠᠵᠠᠨᡨᠠᡳmnc)는 누르하치의 지원을 받아 한으로 즉위하여 예허 등과 연합하여 누르하치에 대항하였고, 한때 조선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1613년 누르하치의 공격으로 우라는 멸망하고 부잔타이는 예허로 망명하였다.

2.1. 건국과 초기 발전 (15세기 중반 ~ 16세기 후반)

후룬 구룬(우라)의 시조 나치부루(ᠨᠠᠴᡳᠪᡠᠯᡠmnc)는 본래 호이파와 우라 지역 사이의 키르사 강( ᡴᡳᡵᠰᠠ
ᠪᡳᡵᠠmnc) 상류 유역에서 성씨 없이 홀로 살다가 쑹화강(숭아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우라 부족의 수장이 되었다.

나치부루의 아들 샹갼 도르호치(ᡧᠠᠩᡤᡳᠶᠠᠨ
ᡩᠣᡵᡥᠣᠴᡳmnc)는 1,000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후룬 구룬을 경영했다고 전해진다. 도르호치의 아들 갸마카 쇼주구(ᡤᡳᠶᠠᠮᠠᡴᠠ
ᡧᠣᠵᡠᡤᡡmnc)는 1443년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兀者前衛) 지휘(指揮)에 임명되었다.

갸마카 쇼주구의 아들 둘기(ᡩᡠᠯᡤᡳmnc)는 성화 연간(1464-1487)에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도독(兀者前衛都督)에 임명되었다.

둘기 사후, 갸마카 쇼주구의 다른 아들인 수허터(ᠰᡠᡥᡝᡨᡝmnc)가 명나라로부터 탑산전위도독(塔山前卫都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갸마카 쇼주구의 4남 수이툰의 아들 커시너(ᡴᡝᠰᡳᠨᡝmnc)가 도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커시너와 그의 아들 처처무(ᠴᡝᠴᡝᠮᡠmnc)는 바다이 다르한(ᠪᠠᡩᠠᡳ
ᡩᠠᡵᡥᠠᠨmnc)에게 살해당했다.

커시너 피살 이후, 그의 손자 왕타이는 시버부의 수하이성(ᠰᡠᡳᡥᠠ
ᡥᠣᡨᠣᠨmnc)으로 도주했고, 차남 왕주 와이란(ᠸᠠᠩᠵᡠ
ᠸᠠᡳᠯᠠᠨmnc)과 그 아들 볼콘 셔진(ᠪᠣᠯᡴᠣᠨ
ᡧᡝᠵᡳᠨmnc) 등은 하다( ᡥᠠᡩᠠmnc)를 건립했다.

2.2. 부얀과 부간 시대 (16세기 후반 ~ 17세기 초)

1561년, 부얀(ᠪᡠᠶᠠᠨmnc)은 우라제부를 통합하고, 쑹화강(송화강) 연안에 있는 홍니(ᡥᠣᠩᠨᡳmnc)에 우라성과 궁궐을 축조한 뒤 버이러를 자칭했다. 부얀의 시대에 우라는 하다(Hada)에 종속되었으나, 하다의 왕타이 사후 혼란을 틈타 독립하고 예허(Yehe) 등과 세력을 확장했다.

부얀의 사후 아들 부간(ᠪᡠᡤᠠᠨmnc)이 수장을 계승했다. 이 무렵 부얀의 종형제인 하다의 완 한 왕타이의 세력이 강성하여 여진 각 부의 패주가 되었으며, 우라도 하다에 종속되었다. 우라는 하다에 협력하여 공동의 이익을 취함으로써 왕타이의 패권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명나라와도 하다를 거쳐 교류하였다.

하다의 왕타이가 죽은 뒤 후계자인 후르간(ᡥᡡᡵᡤᠠᠨmnc)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여 후계자 분쟁이 벌어져 하다가 혼란에 빠지자, 우라는 여세를 몰아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 예허와 수완, 시버 2부를 분할하고, 원래 우라의 지배를 받았던 수이하성을 탈환했다.

부간의 사후 아들 만타이(ᠮᠠᠨᡨᠠᡳmnc)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만타이 부자 두 사람이 변경에 있는 마을인 솨얀 시란(ᠰᡠᠸᠠᠶᠠᠨ
ᠰᡳᡵᠠᠨmnc)이란 곳으로 가서 그곳을 수선하고 해자를 파도록 했는데, 이때 부자가 마을의 부녀자 두 명을 탐하여 결국 밤에 그들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2.3. 부잔타이 시대와 멸망 (17세기 초)

부잔타이(ᠪᡠᠵᠠᠨᡨᠠᡳmnc)는 만타이의 동생으로, 누르하치의 지원을 받아 우라의 한(汗)으로 즉위했다. 그는 숙부 힝냐(ᡥᡳᠩᠨᡳᠶᠠmnc)의 암살 시도를 피해 누르하치가 보낸 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즉위했다.

부잔타이는 예허와 몽골 제부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1597년에는 예허와의 혼인동맹을 이용하여 동해여진 와르카의 안추라쿠 일대 세 부족을 신속시켰다. 1603년~1605년 무렵에는 조선 함경도 종성의 동관진과 온성의 유원진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한 건퇴에 병력을 유둔시켜 인근 조선의 번호였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신속시켰다. 1605년, 부잔타이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堂上)의 직첩을 받았다.

1607년 2월, 부잔타이의 우라는 누르하치의 세력과 조선 함경도 종성 오갈암(烏碣巖)에서 충돌했고, 우라군은 대패했다. 그해 4월에도 누르하치 군대와 충돌하여 많은 물자를 노획당했다.

부잔타이는 예허와 협력하여 누르하치에 대항했지만, 1613년, 누르하치는 우라를 친정하여 멸망시켰고, 부잔타이는 예허로 망명했다.

3. 씨족

우라나라(ᡠᠯᠠ ᠨᠠᡵᠠmnc)는 우라 지역의 대표적인 씨족이다. 신해혁명 이후 대부분 한성(漢姓)인 조(趙)씨로 바꾸었고, 일부는 동(桐), 강(相) 등의 성씨를 사용했다.

3.1. 울라나라 할라

울라나라(烏拉那拉, ᡠᠯᠠ ᠨᠠᡵᠠmnc)는 오라씨(烏喇氏)라고도 한다. 울라나라는 무쿤(穆昆, Mukūn)과 할라(哈拉, Hala)의 연칭으로, 울라(烏拉, Ula)는 종족을 뜻하는 무쿤이고, 나라(那拉, Nara)는 성씨를 뜻하는 할라이다. 만주족의 씨족 중 하나로 16세기 후반 후룬이 울라기야(烏拉街, ᡠᠯᠠ ᡤᡳᠶᠠᡳmnc) 일대로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명말에 여진족 울라부 수장을 배출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대부분의 우라나라씨는 한성(漢姓)인 조(趙)씨로 가장했고, 일부는 동(桐), 강(相) 성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