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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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기중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 용담 군수, 평택 군수, 전라남도 동복 군수를 역임하고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한일합방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육영 사업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영신학교를 설립하고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발전에 기여했으며,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고 사회에 기부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사망 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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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학자 - 김경중 (1863년)
김경중은 조선 말기 관료로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진산 군수 등을 지냈으나 한일 병합 후 낙향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조선사》를 저술하고 흉년에 곡식을 내어 백성을 구제하기도 했으며, 김성수를 후원한 교육인이자 기업인이다. - 대한제국의 학자 - 주시경
주시경은 황해도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교육받고 독립신문 활동을 통해 국어 운동에 참여하여 국문동식회를 조직, 국어 교육과 연구에 헌신하며 현대 한국어 문법의 토대를 구축한 한국어 연구의 선구자이자 근대 국어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 울산 김씨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울산 김씨 - 김종인
김종인은 5선 국회의원과 장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며 경제민주화를 추진했으나 뇌물수수 전력과 국보위 참여 경력 등으로 논란이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경제학자이다.
김기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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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기중은 김요협의 장남으로 1천 석의 농토를 물려받을 정도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의령원 참봉 등을 지냈다.[3] 늦도록 아들이 없어 동생 김경중의 넷째 아들 김성수를 양자로 들였고, 이후 소실에게서 서자 김재수를 얻었다.
1904년 용담 군수, 평택 군수, 전라남도 동복 군수 등을 역임했다.[2][3] 1906년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나라가 기울어짐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사직했다.[2][3] 이후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교육 계몽 강연을 다니는 등 사회 활동을 펼쳤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육영사업에 투신하여 1908년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고, 1929년에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였다.[2] 1923년에는 동생 김경중과 함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양자인 김성수가 운영하도록 하였다.[2] 1933년 84세로 사망하자 사회장이 추진되었다.[2]
2. 1. 초기 생애
1888년 식년과[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2][3] 이후 음서 제도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의령원 참봉을 지냈다.[3]아버지 김요협이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다. 아버지가 외가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았고, 사업 수완은 부족하여 2천 석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나 재산은 넉넉하였다. 늦도록 아들이 없어 동생 김경중의 넷째 아들 김성수를 양자로 들였다. 그 뒤 소실 공주김씨 김영희로부터 서자 김재수를 얻었다.
2. 2. 관료 생활과 사회 활동
1888년 식년과[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2][3] 이후 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의령원 참봉을 지냈다.[3]1904년 용담(龍潭) 군수를 거쳐 평택 군수·전라남도 동복(同福) 군수를 지냈다.[2][3] 1906년 통정대부(정삼품)에 올랐으나 나라가 기울어짐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사직했다.[2][3]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주었고, 교육 계몽을 역설하는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최종 관직은 가선대부에 이르렀고, 1910년 관작을 사퇴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투자하여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1908년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茁浦)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고 김성수, 송진우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문물과 교육제도를 시찰한 후 1929년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 계동(桂洞)에 교사를 신축하였다.[2] 양자 김성수가 중앙학회로부터 중앙학교를 인수하려 할 때, 집안에서는 반대하였으나 홀로 김성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한다.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주는 한편 사회에 기부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동생 김경중과 함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계받아 양자 김성수로 하여금 운영케 했다.[2]
2. 3. 교육 사업 투신
1888년 식년과[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2][3] 이후 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의령원 참봉을 지냈다.[3]1910년 한일합방 이후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투자하여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1908년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茁浦)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고 김성수, 송진우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문물과 교육제도를 시찰한 후 1929년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 계동(桂洞)에 교사를 신축하였다.[2] 양자 김성수가 중앙학회로부터 중앙학교를 인수하려 할 때, 집안에서는 반대하였으나 홀로 김성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한다.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주는 한편 사회에 기부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동생 김경중과 함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계받아 양자 김성수로 하여금 운영케 했다.[2]
2. 4. 사망
1933년에 84세로 사망하자 거국적으로 사회장이 추진되었다.[2]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할아버지 | 김명환(金命煥) |
아버지 | 김요협(金堯莢, 1833 ~ 1909) |
어머니 | 영일정씨(迎日鄭氏, 1831 ~ 1911) |
동생 | 김경중(金暻中, 1863 ~ 1945) |
부인 | 전주이씨(全州李氏, 1855 ~ 1924) |
양자 | 김성수(金性洙, 호는 인촌, 1891 ~ 1955) |
자부 | 고광석(高光錫, 1886 ~ 1919) |
손자 | 김상만(金相万) |
자부 | 이아주(李娥珠, 1899년 ~ 1968년) |
손자 | 김남(金楠) |
손자 | 김상석(金相晳) |
손자 | 김상흠(金相欽) |
손자 | 김상기(金相琪) |
손자 | 김상종(金相淙) |
측실 | 공주김씨 김영희(金永熙, 1875 ~ 1963) |
외조부 | 정계량(鄭季良) |
참조
[1]
웹사이트
http://people.aks.ac[...]
[2]
웹인용
김 관(金 灌)
https://web.archive.[...]
2008-11-06
[3]
서적
인촌 김성수전
197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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