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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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득구는 1956년 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프로 복싱 선수였다. 1978년 프로 데뷔 후 대한민국 라이트급 챔피언과 동양 챔피언을 거치며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1982년 WBA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패배 후 뇌사 상태에 빠져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권투 경기 규칙 변경과 선수 보호 조치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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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득구 |
출생 이름 | 이덕구 |
로마자 표기 | Gim Deuk-gu |
한자 표기 | 金得九 |
출생일 | 1955년 7월 29일 |
출생지 | 강원도 고성군 바남리 |
사망일 | 1982년 11월 18일 |
사망지 | 미국 네바다주 파라다이스 |
체급 | 라이트급 |
스타일 | 사우스포 |
권투 전적 | |
총 경기 수 | 20 |
승리 | 17 |
KO승 | 8 |
패배 | 2 |
무승부 | 1 |
무효 경기 | 0 |
2. 생애
김득구는 1956년 강원도 고성군의 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서울로 상경하여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76년 복싱을 시작했다.[2]
2. 1.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김득구는 1956년 8월 10일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의 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2] 5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세 번 더 재혼했다.[2]16세 때인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서울로 상경한[2] 김득구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동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3. 복싱 경력
김득구는 1976년 복싱에 입문하여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다가 1978년 프로로 전향했다.[1] 29전 4패의 아마추어 전적을 쌓은 후, 프로 선수로서 뛰어난 실력과 투지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1980년 대한민국 챔피언, 1982년 동양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며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1]
1982년 11월 13일, 김득구는 세계 타이틀에 처음 도전했다.[17]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WBA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에게 도전했으나, 14라운드 19초에 KO패를 당했다.[17] 김득구는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한국 밖에서 경기를 치른 적이 없었으며, 북미에서 경기를 치른 것도 처음이었다.[4]
3. 1. 프로 전향 및 국내 활동
1978년 동아체육관에서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마치고 프로 복서로 데뷔했다.[1] 1980년 12월 6일 이필구를 상대로 10회 판정승을 거두며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에 올랐다.[17]1982년 2월 28일 김광민을 상대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었고, 이 경기로 세계 복싱 협회(WBA) 랭킹 1위에 올랐다.[1] 이후 같은 해 7월 18일까지 3차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스톤 게오프와의 3차 방어전 한 달 전에는 논타이틀전에서도 판정승을 거두었다.[17]
3. 2. 동양 챔피언 등극 및 세계 랭킹 1위
1982년 2월 28일, 김득구는 김광민과의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챔피언전에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동양 챔피언이 되었다.[1] 이 승리로 김득구는 세계 복싱 협회(WBA) 랭킹 1위에 올랐다.[1] 이후 같은 해 7월 18일까지 OPBF 3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특히 스톤 게오프와의 3차 방어전 한 달 전에 논타이틀전을 치러 판정승을 거두기도 했다.4. 레이 맨시니와의 경기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1월 14일), 김득구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 경기장에서 WBA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 레이 맨시니에게 도전했다.[1] 이 경기는 김득구에게 첫 해외 원정 경기이자, 15라운드 경기였다.
경기 후 김득구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일간의 뇌사 상태 끝에 11월 18일 향년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김득구는 1978년 프로로 전향하여, 1982년 2월 28일 동양 태평양 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하였다. 이후 7월 18일까지 3차례 방어전을 성공하였다.[17] 1982년 11월 13일, 세계 타이틀에 처음 도전하였으나, 레이 맨시니에게 14라운드 KO패를 당했다.
김득구의 주요 경기 이력은 다음과 같다.
날짜 | 경기 종류 | 상대 선수 | 결과 | 비고 |
---|---|---|---|---|
1978년 12월 7일 | 프로 데뷔 | ||||
1980년 12월 6일 | 10전째 | | 승 |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등극 | ||||
1982년 2월 28일 | 15전째 | | 승 | 동양 태평양 라이트급 챔피언 등극 | ||||
1982년 11월 13일 | 20전째 | 레이 맨시니 | 14라운드 KO패 | WBA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 도전 |
4. 1. 경기 전 상황
김득구는 세계복싱협회 1위 컨텐더였으나,[1] 미국 복싱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4] 김득구는 라이트급 체중 한계인 135파운드 이하로 체중을 줄이기 위해 고전했으며, 경기 전 "그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는 경기 며칠 전 라스베이거스 호텔 갓등에 "살든지 죽든지"라는 메시지를 적었다.[1]4. 2. 경기 내용
경기 초반부터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는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다. 맨시니는 김득구의 왼쪽 귀를 찢고 왼쪽 눈을 부풀게 했으며, 자신의 왼손도 평소 크기의 두 배로 부풀어 오를 정도였다.[3] 경기 후 맨시니의 왼쪽 눈은 완전히 감겼다.[1]하지만 후반 라운드로 갈수록 맨시니가 김득구보다 훨씬 많은 펀치를 날리며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11라운드에는 김득구의 무릎을 꺾기도 했다.[1] 13라운드 초반, 맨시니는 김득구에게 39개의 펀치를 퍼부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6]
14라운드가 시작되자 맨시니는 김득구에게 오른손 펀치를 날렸고, 김득구는 뒤로 휘청였다. 이어진 맨시니의 왼손은 빗나갔지만, 곧바로 강력한 오른손 펀치가 김득구의 턱에 적중했다. 김득구는 로프에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으나, 심판 리처드 그린은 경기를 중단시키고 맨시니의 TKO 승리를 선언했다. 이는 14라운드 19초 만의 일이었다.[3]
경기 종료 후 몇 분 만에 김득구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수술에도 불구하고 11월 18일에 사망했다.[3]
5. 사망
1982년 11월 13일 (한국 시간 14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경기장에서 열린 레이 맨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챔피언전에서 김득구는 경기 후 뇌사 판정을 받고, 4일간의 투병 끝에 11월 18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권투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경기 14라운드가 시작된 지 불과 19초 만에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한 김득구는 쓰러졌다 일어났으나 심판의 패배 선언 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김득구는 미국 권투계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레이 먼시니는 이 경기가 "전쟁"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1] 경기 며칠 전, 김득구는 라이트급 체중 한계인 135파운드 이하로 체중을 줄이기 위해 고전했다. 경기 전 김득구는 "그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는 경기 며칠 전 라스베이거스 호텔 갓등에 "살든지 죽든지"라는 메시지를 적었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언론에서는 "죽이든지 죽든지"로 보도되었다.[1]
1982년 11월 13일, 시저스 팰리스 부근 경기장에서 먼시니와 김득구의 경기가 열렸다. 두 선수는 경기 상당 부분을 치열하게 맞붙었고, 먼시니는 잠시 기권을 고려하기도 했다.[5] 김득구는 먼시니의 왼쪽 귀를 찢고 왼쪽 눈을 부풀게 했으며, 먼시니의 왼손은 평소 크기의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3] 경기 후 먼시니의 왼쪽 눈은 완전히 감겼다.[1] 그러나 후반 라운드에 접어들면서 먼시니가 김득구보다 훨씬 많은 펀치를 날리며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11라운드에는 김득구의 무릎을 꺾었다.[1] 13라운드 초반 먼시니는 김득구에게 39개의 펀치를 퍼부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슈거 레이 레너드(당시 경기 해설자 중 한 명)는 김득구가 매우 강하게 반격했다고 말했다. 레너드는 나중에 이 라운드가 팽팽했다고 평가했다.[6] 14라운드가 시작되자 먼시니가 앞으로 돌진하며 김득구에게 오른손 펀치를 날렸다. 김득구는 뒤로 휘청였고, 먼시니의 왼손은 빗나갔지만, 이어 먼시니가 또 다른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날렸다. 김득구는 로프에 날아가 머리가 매트에 부딪혔다. 김득구는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심판 리처드 그린은 경기를 중단시켰고, 먼시니가 14라운드 19초 만에 TKO승을 거두었다.[3] 당시 경기를 취재했던 랄프 와일리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김득구가 죽어가면서도 로프를 잡고 일어서는 모습을 "내가 목격한 가장 위대한 신체적 업적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1]
김득구는 그전에 15라운드 경기를 치른 적이 없었다. 반면 먼시니는 당시 훨씬 경험이 많았다. 그는 세 번의 15라운드 경기를 치렀고 한 번은 14라운드까지 경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김득구는 17승 2패 1무의 전적을 기록했고, 그중 8승은 KO승이었다.
김득구의 어머니는 경기 3개월 후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2] 경기의 심판인 리처드 그린은 1983년 7월 1일 권총으로 자살했다.[9]
김득구는 한국 권투 선수의 여자친구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약혼녀 이영미를 남겨두었다.[1] 김득구 사망 당시 이영미는 그의 아들 김치완을 임신 중이었고, 김치완은 1983년 7월에 태어났다. 김치완은 치과의사가 되었다.[2] 2011년, 김치완과 그의 어머니는 만치니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착한 아들(The Good Son)'' 제작의 일환으로 레이 만치니와 만났다.[1][10]
5. 1. 사인 및 뇌 손상
1982년 11월 13일 (한국 시간 14일) 레이 맨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챔피언전에서 패배한 후 쓰러져 11월 18일 향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14라운드 시작 19초만에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한 김득구는 쓰러졌다 일어났으나 심판의 패배 선언 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4일간 뇌사 상태에 있다가 어머니 양선녀 씨의 동의를 얻어 산소 마스크를 떼어 내었다.
병원에서 김득구는 두개골에 100cc의 혈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7] 응급 뇌수술이 시행되었지만, 경기 5일 후인 11월 18일에 사망했다. 신경외과 의사는 한 방의 펀치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17]
5. 2. 장례 및 추모
1982년 11월 18일, 김득구는 레이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쓰러져 향년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김득구는 4일간 뇌사 상태에 있다가 어머니 양선녀 씨의 동의를 얻어 산소 마스크를 떼면서 사망했다.[1]6. 사망 여파
김득구의 비극적인 죽음은 권투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스포츠 사고를 넘어, 그의 어머니와 경기 심판의 자살, 그리고 상대 선수였던 레이 맨시니의 트라우마 등 비극적인 사건들로 이어졌다.
6. 1. 관련 인물들의 비극
김득구의 어머니 양선녀는 아들이 사망한 지 3개월 후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2] 경기 심판이었던 리처드 그린 역시 죄책감으로 1983년 7월 1일 권총으로 자살했다.[9][18] 상대 선수였던 레이 맨시니는 이 사건으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어 권투 선수를 그만두고 영화배우가 되었으며,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렸다.[18]6. 2. 사회적 반향과 인식 변화
김득구가 쓰러지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생히 중계되면서,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로 인정받던 권투가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8]미국 의회에서 권투의 위험성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 결과 권투계는 세계 타이틀전 경기 방식을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줄이고, 매 라운드 사이의 휴식 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늘렸으며,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또한 1984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 권투 종목에서 헤드기어 착용이 의무화되었다.[8]
7. 복싱 규칙 변경
1982년 11월 13일에 있었던 김득구의 사망은 권투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싱 경기 규칙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김득구가 쓰러지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로 여겨지던 권투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권투가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미국 의회에서는 권투의 위험성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8]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권투계는 선수 보호를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 세계 타이틀전의 라운드 수를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단축했다. (세계복싱평의회(WBC)가 먼저 시행했고, 세계복싱협회(WBA)와 국제복싱연맹(IBF)도 잇따라 단축했다). 라운드 간 휴식 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연장했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11] 1984년 하계 올림픽부터는 올림픽 복싱에서 헤드기어 착용이 의무화되었다.[8]
이러한 변화들은 김득구의 죽음이 권투계에 선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더 안전한 스포츠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7. 1. 라운드 수 단축
세계복싱평의회(WBC)는 김득구 사망 직후 총회에서 경기 전 선수들의 의료 관리에 관한 규칙을 변경하고, 세계 타이틀전 경기 규칙을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단축했다.[8] 세계복싱협회(WBA)와 국제복싱연맹(IBF)도 1987년에 WBC의 결정을 따랐다.[8] 1988년에 설립된 세계복싱기구(WBO)는 처음부터 12라운드 챔피언십 경기를 도입했다.[8]7. 2. 선수 보호 조치 강화
김득구의 사망은 권투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선수 보호를 위한 여러 조치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경기 라운드 수가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단축되었다. 이는 세계복싱평의회(WBC)가 먼저 시행했고, 이후 세계복싱협회(WBA)와 국제복싱연맹(IBF)도 따랐다. 1988년에 설립된 세계복싱기구(WBO)는 처음부터 12라운드 챔피언십 경기를 운영했다.[8] 매 라운드 사이의 휴식 시간은 60초에서 90초로 늘어났고,[11] 선수가 쓰러지지 않더라도 심판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경기를 중단할 수 있는 스탠딩 다운제가 도입되었다.[11]
1984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 복싱에서는 헤드기어 착용이 의무화되었다.[8] 경기 전 선수들의 건강 검진 절차도 강화되어 심전도, 뇌 검사, 폐 검사 등이 추가되었다.[12] 한 복싱 관계자는 "1982년 이전에는 선수들의 경기 전 검진이 혈압과 심박수 확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12]
이러한 변화들은 김득구의 비극적인 죽음이 권투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로 이어진 것을 보여준다.
8. 대중문화에서의 김득구
김득구의 삶과 죽음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뤄졌다. 2002년에 개봉한 대한민국 영화 ''챔피언''에서는 유오성이 김득구를 연기했다.[14] 워런 제본의 노래 "붐 붐 만치니"는 김득구와의 경기를 언급한다.[15] 선킬문(Sun Kil Moon)의 앨범 ''그레이트 하이웨이의 유령들''에는 만치니와의 경기를 언급하는 "덕구 김"이라는 곡이 있으며, 이 노래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최고의 플레이리스트" 기사에 포함되었다.[16]
8. 1. 영화
2002년 개봉한 대한민국 영화 ''챔피언''은 유오성이 김득구를 연기한 그의 삶과 경력을 다룬 영화이다.[14]8. 2. 음악
워런 제본의 노래 "붐 붐 만치니"는 김득구와의 치명적인 경기를 언급한다.[15]선킬문(Sun Kil Moon)의 첫 번째 앨범 《그레이트 하이웨이의 유령들》에는 만치니와의 경기를 언급하는 "덕구 김"이라는 15분짜리 트랙이 포함되어 있다. 이 노래는 201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기사 "최고의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되었다.[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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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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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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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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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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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hap News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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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e Defends His Dec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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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k-K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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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RICHARD GREEN
http://www.nytim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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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b 영화
The Fight That Changed Boxing Forev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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