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 (언론인)
1. 개요
김상기는 1918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상과를 졸업한 언론인이다. 1957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동아일보 출판부장, DBS 동아방송 국장, 사장, 부회장을 거쳐 회장을 역임했다. 사장 재임 시 '언론 자유'를 강조하며 문화 사업 확장에 기여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를 통해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 1991년 동아일보 고문, 성곡학술문화재단 감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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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영 -
최인규 (1919년)
최인규는 연희전문학교와 뉴욕대학교를 졸업 후 대한교역공사와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4대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3·15 부정선거의 총책임자로 지목되어 4·19 혁명 이후 구속,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윤치영 -
대한민국 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3공화국은 5·16 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박정희 정부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경공업 중심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나, 1972년 유신으로 해체되었다. -
일제강점기 사람 -
서명원
서명원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종손으로, 교육학자이자 대학교수, 교육행정 관료로서 서울대학교 교수, 문교부 차관, 여러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문교부 장관, 학술회 회원,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 사람 -
임화수
임화수는 이정재와 함께 동대문파의 2인자이자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영화계 대부로 활동하며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정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고 정치 테러에 개입했으나 4.19 혁명 이후 몰락하여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당한 정치 깡패이자 영화 제작자이다. -
울산 김씨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울산 김씨 -
김종인
2. 생애
1918년 4월 14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인촌 김성수와 그의 첫 부인 고광석 사망하고 이아주 부인 소생 3남으로 출생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상과를 졸업했다. 195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동아일보사에서 동아일보 출판부장과 DBS 동아방송 국장, 동아일보 사장, 동아일보 부회장을 거쳐 동아일보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3월 2일 사장 취임사를 통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기로에 당면한 현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장 자리는 영광의 좌석이 아니라 고난의 자리임을 잘 알고 있다"며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지구전이기 때문에 동아의 과거가 그랬듯,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궁극의 목표를 향해 꾸준하고 의연하게 전진해 나가자"고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김 전 회장은 다양한 문화사업으로 국내 문화 발전에도 앞장섰다. 1981년에는 서울 여의도 사옥에 '동아문화센터'를 개설해 평생교육의 장을 열었다. 1984년에는 '음악동아', '월간 멋' 등 2개의 월간지를 창간하며 잡지 저널리즘의 영역을 확장했다. 4월 음악동아 창간호는 '지휘봉의 제왕 카라얀', '스페셜 인터뷰-윤이상' 등을 실어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사장(1981~82년)과 회장(83~89년) 재직 시 서울 여의도 사옥에 동아문화센터를 개설하고, '음악동아', '월간 멋' 등 2개의 월간지를 창간하는 등 사세를 키웠다. 1981년 신년호부터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했다. 발행부수도 1979년 100만 부에서 5년 새 50만 부가 증가해 1984년에는 한국 일간신문 사상 최초로 발행부수 150만 부를 돌파 하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로 정점을 이뤘다. 그해 1월 19일자 동아일보는 12개 면 중 6개면에 걸쳐 박 군 치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6·10 민주화운동을 촉발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치사사건 보도를 그대로 내보내기도 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이 나온 날에는 서울시내 가판대에서만 동아일보 40만 2800부가 팔리기도 했다.
1991년 3월 동아일보 고문, 이후 성곡학술문화재단 감사로도 피선되었다. 그밖에 한국민간방송협회 이사와 방송윤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1. 초기 생애
1918년 4월 14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인촌 김성수와 그의 첫 부인 고광석 사망하고 이아주 부인 소생 3남으로 출생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상과를 졸업했다.
2.2. 언론 활동
김상기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인촌 김성수의 3남으로 출생했다.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상과를 졸업했다. 1957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동아일보 출판부장, DBS 동아방송 국장, 동아일보 사장, 부회장을 거쳐 동아일보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사장 취임사에서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지구전이기 때문에 동아의 과거가 그랬듯,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궁극의 목표를 향해 꾸준하고 의연하게 전진해 나가자"고 밝혔다.
사장(1981~82년)과 회장(83~89년) 재직 시 서울 여의도 사옥에 동아문화센터를 개설하고, '음악동아', '월간 멋' 등 2개의 월간지를 창간했다. 1981년 신년호부터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했고, 1984년에는 한국 일간신문 사상 최초로 발행부수 150만 부를 돌파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는 6·10 민주화운동을 촉발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치사사건 보도를 그대로 내보냈으며,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이 나온 날에는 서울시내 가판대에서만 동아일보 40만 2800부가 팔렸다.
1991년 3월 동아일보 고문, 성곡학술문화재단 감사로도 피선되었다. 한국민간방송협회 이사와 방송윤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3. 군사정권 하의 언론 투쟁
2.4. 문화 사업
김상기 전 회장은 다양한 문화사업으로 국내 문화 발전에 앞장섰다. 1981년 서울 여의도 사옥에 '동아문화센터'를 개설해 평생교육의 장을 열었다. 1984년에는 '음악동아', '월간 멋' 등 2개의 월간지를 창간하며 잡지 저널리즘의 영역을 확장했다. '음악동아' 창간호는 '지휘봉의 제왕 카라얀', '스페셜 인터뷰-윤이상' 등을 실어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또한 동아일보의 사세 확장에도 기여했다. 동아일보는 1981년 신년호부터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했다. 발행부수도 1979년 100만부에서 5년 새 50만 부가 증가해 1984년에는 한국 일간신문 사상 최초로 발행부수가 150만부를 돌파하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신문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2.5. 동아일보 사세 확장
김상기는 다양한 문화사업을 통해 국내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981년 서울 여의도 사옥에 '동아문화센터'를 개설하여 평생교육의 장을 열었으며, 1984년에는 '음악동아', '월간 멋' 등 2개의 월간지를 창간하여 잡지 저널리즘의 영역을 넓혔다. '음악동아' 창간호는 '지휘봉의 제왕 카라얀', '스페셜 인터뷰-윤이상' 등을 게재하여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김상기는 동아일보의 사세 확장에도 기여했다. 동아일보는 1981년 신년호부터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했다. 발행부수는 1979년 100만부에서 5년 만에 50만 부가 증가하여 1984년 한국 일간신문 사상 최초로 150만부를 돌파하며 국내 최고 신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2.6. 은퇴 이후
3. 가족 관계
부인은 원종숙이다. 딸은 김창원으로, 사위는 사업을 하는 이종훈이다. 딸 김영원의 사위는 변호사 이민교이다. 딸 김효신이 있으며, 아들 김병국은 1959년 3월 18일에 태어나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과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며느리는 주영아이다. 아들 김병표는 (주) 주원 대표이사이며, 며느리는 신준희이다.
4. 평가
김상기는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동아일보 사장, 1983년부터 1989년까지 회장을 역임하며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신문 경영 일선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1년 3월 2일 사장 취임사에서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지구전이기 때문에 동아의 과거가 그랬듯,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궁극의 목표를 향해 꾸준하고 의연하게 전진해 나가자"며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의지를 바탕으로 동아일보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는 12개 면 중 6개 면에 걸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하였으며, 이는 6·10 민주 항쟁을 촉발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이 나온 날에는 서울시내 가판대에서만 동아일보 40만 2800부가 팔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