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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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경찰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연행하여 고문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이다. 경찰은 사건 은폐를 시도했으나, 부검 결과 고문으로 인한 사망임이 밝혀졌고,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폭로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관련자들의 이후 행적과 사건을 희화화하는 방송 자막 사용 등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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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
---|---|
사건 개요 | |
이름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장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
날짜 | 1987년 1월 14일 |
사망자 | 1명 |
결과 | 6월 항쟁, 대한민국의 민주화 |
위치 정보 | |
사건 배경 | |
시대적 배경 |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 |
사회적 분위기 | 권위주의 정권의 폭압적인 통치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 |
사건 진행 | |
수사 과정 | 서울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불법 체포 및 고문 |
고문 방법 | 물고문 |
사망 원인 |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 |
사건 은폐 시도 | |
경찰 발표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허위 발표 |
은폐 시도 | 사건 축소 및 고문 사실 은폐 시도 |
진실 규명 | |
진실 폭로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고문치사 사실이 세상에 알려짐 |
관련자 처벌 |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및 진상 규명 |
사건 영향 | |
6월 항쟁 |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됨 |
민주화 운동 |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됨 |
사회적 변화 |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요구 증가 |
박종철 | |
박종철 |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
사망 당시 나이 | 23세 |
기념 | |
추모 공간 | 남영동 대공분실은 추모 공간으로 사용 중 |
![]() | |
기타 정보 | |
관련 웹사이트 | 위키백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2. 사건 발생 및 은폐 시도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은 당시 학생 운동 관련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한다는 명목으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불법 연행되었다.[1]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행방을 물었으나 박종철이 진술을 거부하자 폭행과 물고문 등 잔혹한 고문을 가했고, 결국 다음 날인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오전 11시 45분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박종철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2]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14일 밤 박종철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려 했으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 최환 검사가 사체보존명령을 내려 이를 막았다. 사건 당일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초기 사건 지휘를 맡았다. 1월 15일 한양대학교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는 온몸의 피멍과 장기 손상 등 명백한 고문 흔적을 확인했다. 황적준 박사는 경찰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1월 17일 부검 소견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당시의 압력에 대해 기록한 일기장을 공개하기도 했다.[3][4]
2. 1. 불법 체포 및 고문
사건 당시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다.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으며, 출소 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1987년 1월 13일 자정경,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이 박종철의 하숙집에서 그를 불법적으로 연행했다.[1] 연행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지도위원으로 당시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된 박종철에게 공안 당국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행방을 물었으나, 박종철은 진술을 거부했다. 이에 수사관들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2. 2. 사망 및 초기 은폐 시도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은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1] 당시 경찰은 학생 운동 관련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한다는 명목으로 박종철을 연행했다.취조실로 끌려간 박종철은 박종운의 행방을 함구했다. 이에 수사관들은 박종철에게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결국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에 이르렀다. 같은 날 오전 11시 45분경,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박종철은 이미 숨져 있는 상태였다.[2]
경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14일 밤에 박종철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검사가 시신 보존 명령을 내리면서 경찰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사건 발생 당일 밤 당직 검사였던 안상수 검사가 사건 지휘를 맡았다.
3. 언론 보도와 진상 규명 노력
박종철 학생의 사망 이후 중앙일보의 보도를 시작으로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5] 이 소식은 다른 국내 언론과 방송사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6]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사망했다"는, 후에 거짓으로 밝혀진 내용을 발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부검의였던 오연상 의사로부터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는 증언을 확보해 보도하면서, 단순 쇼크사가 아닌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경찰은 1월 19일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물고문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고문 경찰관으로 조한경과 강진규 두 명만을 지목하여 구속하는 등 사건의 전모를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7] 심지어 경찰은 부검을 마친 박종철의 시신을 유족의 동의 없이 서둘러 화장하여 증거 인멸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발언으로 고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그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시민 학살 책임자로 지목되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발언은 더욱 큰 논란을 일으켰다.
3. 1. 초기 언론 보도와 경찰의 입장

박종철 학생이 사망한 후,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는 한 검찰 간부로부터 “경찰, 큰일 났어”라는 말을 듣고 단서를 포착했다.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2단 기사를 작성해 제출했고, 이는 석간 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되었다.[5] 이 소식은 다른 국내 언론과 외신에도 인용되었으며, 같은 날 KBS와 MBC 저녁 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다루어졌다.[6]
다음 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강 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으며, 박종철 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는 거짓된 내용을 발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였던 오연상 의사로부터 "사건 현장에서 바닥에 물이 흥건했던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확보하여, 단순 쇼크사가 아닌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3. 2. 부검과 진실 폭로
박종철 학생의 사망 이후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한 검찰 간부로부터 “경찰, 큰일 났어”라는 말을 듣고 사건의 심각성을 감지했다. 1월 15일, 신 기자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2단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중앙일보 석간에 단신으로 보도되었다.[5] 이 기사는 다른 국내 언론과 외신에서도 인용되었으며, 당일 KBS와 MBC 저녁 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다루어졌다.[6]
다음 날인 1월 16일,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과 치안감 박처원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고, 박종철 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낮 12시경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는 곧 의문에 부딪혔다. 동아일보는 부검의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의사 오연상으로부터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는 증언을 확보하여, 단순 쇼크사가 아닌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결국 여론에 밀려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의 발표를 뒤집었다. 그는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욕조 물에 한 차례 잠시 집어넣었다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고 밝히며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임을 시인했다.[7] 하지만 이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보다는, 고문 경찰관 조한경과 강진규 2명만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해 구속함으로써 사건을 축소하려는 시도였다. 심지어 경찰은 부검을 마친 박종철의 시신을 가족의 동의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서둘러 화장하여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새로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시민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발언은 더욱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4.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폭로와 6월 항쟁
사건 관련 경찰관들이 구속된 후, 서울남부구치소를 통해 사건이 축소·은폐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 정보는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 전민련 상임의장과 교도관 등을 거쳐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 비밀리에 전달되었다.[8][9]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경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폭로했다.[10] 이 폭로는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국민적 여론에 불을 지폈으며,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는 이후 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 운동인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1][12]
4. 1. 사건 축소 은폐 폭로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안유 구치소 보안계장은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 외에 경찰관 3명이 추가로 고문에 가담했으며, 경찰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안 계장은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의장은 추가 가담 및 은폐 사실을 적은 쪽지를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전달하도록 했다.[8] 이 쪽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었다.[9]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중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경찰관 5명이 고문에 가담했으나, 단 2명만 가담한 것으로 사건이 축소되었고, 책임을 맡기로 한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10] 폭로 다음 날 통일민주당은 당 차원의 진상조사를 벌이겠다고 발표했으며,[11]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명확한 진상 규명과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대행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대한변협 측에 전달했다.[12]
4. 2. 6월 항쟁으로의 확산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구치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는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3명 더 있으며, 경찰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안 계장은 이 사실을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알렸고, 이부영은 이 내용을 쪽지에 적어 서로 친분이 있던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전달했다.[8] 이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었다.[9]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중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했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으로 '대공경찰의 대부'로 불리던 박처원의 주도 아래 경찰관 5명이 고문에 가담했으나, 단 2명만 가담한 것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했으며, 책임을 맡은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10] 이 폭로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정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폭로 다음 날 통일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벌이겠다고 발표했으며,[11]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명확한 진상규명과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대행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대한변협 측에 전달하였다.[12] 이러한 사건의 전개는 이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5. 사건 관련자들의 이후 행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후 행적은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일부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편, 2019년 6월 2일 SBS의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서는 출연자 전소민이 사레들려 기침하는 장면에 ‘1번을 탁 찍으니 억 사례 들림’이라는 자막을 사용하여, 사건 당시 경찰의 거짓 발표("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를 연상시키며 사건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5. 1. 박종운
당시 경찰이 박종철을 고문치사하면서까지 소재를 파악하려 했던 박종운은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여 논란이 되었다.[13]5. 2. 신창언, 박상옥, 안상수
수사를 지휘했던 신창언 검사는 이후 민자당(현 국민의힘의 전신)의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냈다.[14]담당 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당시 박상옥 검사는 사건이 축소, 은폐된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이 되었다.[15]
또 다른 담당 검사였던 안상수는 한나라당 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창원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안상수 역시 수사 당시 사건 은폐에 가담했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일었다.[16][17]
6. 사회적 파장과 영향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종철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한 이 사건은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의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초기 경찰의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5][6], 고문치사라는 사건의 참혹한 진실이 점차 드러나면서 국민적 저항은 거세게 타올랐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인권 유린 사건을 넘어,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각계각층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과 시위가 잇따랐으며,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고문 가담 경찰관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7] 정권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결국 전두환 정권의 6.29 선언 발표와 민주화 이행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박종철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6. 1. 언론 보도 관련 논란
박종철 학생의 사망 이후,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한 검찰 간부로부터 사건의 심각성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는 중앙일보 석간에 2단 크기로 실렸으며[5], 사건을 처음으로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식은 다른 국내 언론과 외신에도 인용되었고, 당일 KBS와 MBC 저녁 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보도되었다.[6]
사건이 알려진 다음 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강 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고, 박종철 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시도였으며, 곧 동아일보가 부검의 오연상의 증언을 확보하면서 거짓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연상은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증언하며 물고문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 발표를 번복했다. 그는 "박종운 군의 소재를 심문하던 중 박종철 군의 머리를 욕조 물에 잠시 넣었다 빼는 행위를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며 고문 사실을 일부 시인했다.[7] 하지만 이 역시 조한경, 강진규 등 현장 경찰관 2명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며 사건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또한, 경찰은 부검이 끝난 박종철의 시신을 유족의 동의 없이 서둘러 화장하며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한편,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시민 학살 책임자로 지목되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발언은 더욱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참조
[1]
웹인용
고 박종철열사 25주기 추모제...(슬픔)
http://www.kdemo.or.[...]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12-2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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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문 보도… 내 생애 이런 신문을 다 보는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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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3
[3]
웹인용
부검 통해 드러난 고문사…경찰은 회유·협박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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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인용
조국 “안상수가 박종철 고문은폐 막았다? 사실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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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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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본부 공안사건과 관련 박종철 군 숨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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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학생 박종철군 가혹행위로 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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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25년만에 얼굴 드러낸 박종철 사건 폭로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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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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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건 1억 주고 덮으려해 분노가 치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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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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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黨서도 조사키로 "朴鐘哲군사건은 조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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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숨진 과정 眞相규명 賠償소송代行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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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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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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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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