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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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선태는 1911년 전라남도 완도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사로 활동했다. 해방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며 국회의원으로 3선을 역임했다. 민주당 인권옹호위원회 부위원장, 제2공화국 무임소 장관을 지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민주통일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2008년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78년 사망했다.

김선태 (1911년)
기본 정보
이름김선태
한자 표기金善太
출생1911년
사망1978년 12월 29일
출생지전라남도 고흥군
묘소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국립서울현충원
본관금릉 김씨
직업변호사
정치인
정치 경력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의원 활동제8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학력
학력주오 대학 법학부 졸업
수상
수상황조근정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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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전라남도 완도군 출신으로,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군이다. 니혼 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1938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판사로 활동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판사직을 사임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제1공화국 시기인 1954년 정계에 입문하여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강경한 투쟁을 벌였으며, 자유당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기관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제2공화국 출범 후 잠시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 활동이 규제되어 잠시 은거했으나,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신민당과 민주통일당 등에서 활동했다. 정치인 박광태가 그의 비서 출신이다. 1978년 서울특별시 도봉구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2.1. 일제강점기 활동

니혼 대학 전문부 법과를 1939년 3월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후,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어 광복 전까지 청진지방법원 회령지청과 청주지방법원(대전지방법원 청주지청) 등에서 판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2.2. 해방 이후 정치 활동

해방 후 판사를 사임하고, 1946년 8월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면서 국민대학의 감사와 강사를 맡았다.

제1공화국 시기인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전라남도 완도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강경한 투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자유당 치하에서 가장 학대받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자유당을 향한 빠르고 날카로운 비판으로 "기관총"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인권옹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1958년 제4대 총선과 1960년 제5대 총선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서 연이어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자유당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미수 사건 당시에는 국회 조사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제4대 국회에서는 경찰 중립화 법안 기초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사건 때는 국회 특별 조사단원으로 활동했다.

제2공화국 출범 후인 1960년 8월, 장면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계에서 은퇴하고 한동안 은거했다.

1969년 변호사 활동을 재개하며 3선 개헌 반대 투쟁위원회 간부를 맡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70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무위원과 인권옹호위원장을 역임했다. 1973년에는 신민당 당권파인 유진산에 반대하며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을 지냈다.

정치인 박광태가 그의 비서 출신이다.

1978년 서울시 도봉구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2.3. 사망

1978년 서울특별시 도봉구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3. 평가

1978년 시점에서 역대 국회의원 중 1분당 약 470자를 발언하여 가장 빠른 속도를 기록했다.

3.1. 부정적 평가

일제 강점기 시절 1938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었으며, 청진지방법원 회령지청과 대전지방법원 청주지청 판사를 지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4. 일화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에 반대하는 세력을 대표하여 강경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자유당 치하에서 가장 학대받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투쟁 방식과 자유당을 공격하는 빠른 독설 때문에 "기관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1978년 시점에서 역대 국회의원 중 1분당 약 470자라는 가장 빠른 발언 속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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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결과
1948년제헌 총선1대국회의원전남 완도군조선변호사협회12,283 (32.32%)2위낙선
1950년2대 총선2대국회의원전남 완도군무소속9,098 (22.78%)3위낙선
1954년3대 총선3대국회의원전남 완도군무소속7,293 (19.67%)1위당선 (초선)
1958년4대 총선4대국회의원전남 완도군민주당17,181 (40.99%)1위당선 (재선)
1960년5대 총선5대국회의원전남 완도군민주당32,057 (72.27%)1위당선 (3선)
1973년9대 총선9대국회의원서울 영등포구 갑민주통일당29,793 (14.06%)3위낙선